968장. 선택.
“누구야?”
“진짜 분위기 있다.”
“첼로 연주자인 것 같아.”
“개쩐다…….”
저벅저벅.
키가 큰 금발의 남자가 어깨에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첼로 가방을 메고 걸었다.
선글라스로 가려져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늦은 저녁 바람을 맞으며 얇은 코트를 가볍게 걸친 남자는 마치 모델처럼 보였다.
지나가는 여성들이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완벽한 핏이었다.
자연스럽게 날리는 금빛 장발 광고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남자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었다.
지하철에서부터 계속된 남자의 행보.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다.
누가 봐도 한국에 공연하러 온 외국인 연주자같은 품새였다.
툭!
그렇게 길을 걷던 금발의 남자가 지나가는 행인과 살짝 부딪쳤다.
첼로 가방이 컸던 탓에 일어난 사태였다.
“뭐야!”
제법 덩치가 좋은 한국 남자가 인상을 팍 썼다.
헬스로 다져진 듯 반팔에 드러나 보이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일반인들은 겉모습만 보고도 충분히 위축될 만큼 남자는 건장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예상대로 흐르지 않았다.
도리어 미소를 띤 채 걷고 있던 금발 남자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과 부딪친 한국 남자를 선글라스를 낀 눈으로 조용히 응시했다.
파바밧.
선글라스를 통해서도 똑똑히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
움찔.
순간 건장한 한국 남자는 몸을 옥죄는 서늘한 냉기에 몸을 떨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차갑고 비릿한 냉기였다.
방금 우쭐해 보였던 허세가 금방 사라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역전되며 날카롭게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어린 시절 주먹 좀 썼던 남자는 곱상하게 생긴 외국 남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벅저벅.
곧바로 사과하자 다른 말없이 정확하게 한 번 응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외국인.
“너 방금 쫄았냐? 킥 복싱은 왜 다니냐?”
옆에서 같이 걷던 친구가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다가서며 이죽거렸다.
“씨발. 저 새끼 눈빛 못 봤지?”
“병신아! 선글라스를 꼈는데 어떻게 봐.”
“난 봤다. 아오! 예전에 병식이 형 같았어.”
“병식이 형? 그 살인자 형?”
“그래 새꺄. 누군지 몰라도 저 새끼 평범한 놈이 아니다. 오금이 다 지렸다고.”
“그 정도야? 그냥 잘생긴……. 어. 이 새끼 어디 갔어?”
“어! 진짜 어디 간 거야?”
어느새 모습을 감춘 금발의 외국인.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는 강남 거리에서 그의 모습은 귀신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손유리!”
손대균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쳐다.
딸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껏 변호사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의 마음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크게 결심한 듯 확고함이 음성에서 묻어나왔다.
그리고 의심할 것 없이 그 변화의 핵심에는 장태산이 존재했다.
출발할 때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일정에 대해 통보했고 그에 따라 집에서도 두 사람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아내는 딸의 귀국과 동시에 언급된 귀한 손님의 정체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다.
손대균도 처음 보게 되는 오광재.
회주를 통해 이름만 통보받았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이미 사위처럼 대했다.
- 아빠. 나머지 얘기는 집에 가서 할게요.
뚝.
일방적으로 손유리 쪽에서 전화가 끊어졌다.
“하아아.”
손대균은 통화가 끊어진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던 휴화산이 폭발한 것 같았다.
딸아이 스스로 꾹꾹 눌러놓고 지냈던 감정이 불타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다.
쉽게 꺼질 것 같지 않다는 게 불안했다.
시간이 지난 만큼 손유리의 선택은 확고해졌을 터였다.
“이걸 회주가 알면…….”
아들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다고 알려져 있는 회주였다.
살인은 물론 어둠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만행을 저지르는 장본인이지만 자식에게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파장이 심상치 않을 것이다.
딸 손유리와 오광재, 단순한 남녀 간의 만남이 아니었다.
“장태산……. 왜 네가 하필 그곳에…….”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할 말이 없었다.
우연과 우연히 겹쳐 또다시 필연이 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각자의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이런 식의 과정을 밟는다면 결국 끝이 좋지 않을 건 자명했다.
손대균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괴로웠다.
딸의 진심을 무시한 대가가 이자까지 보태져서 되돌아왔음을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얽힐 대로 얽힌 인연의 대가.
“태산아…….”
손대균은 복잡한 심정이 담긴 목소리로 장태산의 이름을 불렀다.
겉으로 보이는 냉정한 모습과 달리 최대한 장태산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싶었던 마음속의 외침.
손대균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
‘지금 이건 뭐지?’
오광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가슴에 화로를 끌어안은 듯 화기가 차올랐다.
손유리는 오랫동안 만남을 상상해 오던 자신의 약혼녀였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어느 날 운명처럼 결정된 혼처.
손유리의 사진을 보고 오광재는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아버지가 가끔 전해주는 사진 속 손유리는 오광재에게 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하면서도 손유리의 사진 속 모습을 보며 버텼다.
아버지가 말했다.
손유리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오광재의 신부감으로 운명지어진 여인이라고.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운명으로 짝이 된 정혼자가 다른 남자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장인이 될 손대균 리앤장 이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사이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와드득 심장 근육이 찢겨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할 감정으로 오광재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 큰 고통이 전해졌다.
엄마 없이 자란 오광재였다.
자신을 낳고 돌아가셨다는 엄마 대신 아버지가 항상 오광재 곁에 있었다.
아버지야 언제나 사랑을 듬뿍 안겨줬지만 가슴 한켠에 남겨진 빈자리를 채우지는 못했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고 허전하기만 했던 오광재의 깊은 마음.
손유리의 사진을 처음 받아 보던 순간 완벽하게 그 빈자리가 메워졌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손유리를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편지가 수백 통에 달했다.
단 한 번도 보내지 못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건 진짜 사랑이라 믿었다.
손유리도 자신을 보면 바로 사랑에 빠질 거라 확신했다.
그런 확신에 찬 이유 때문에 수 많은 여자들의 관심에도 무심할 수 있었다.
“오광재 씨, 미안해요. 오늘은 선약이 있습니다.”
손유리의 태도는 한결같이 당당했다.
모습은 상상하던 그대로였지만 풍겨오는 마음의 색깔은 오광재의 상상과 너무 달랐다.
오광재는 지금 손유리에게 있어 자신이 타인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파르르.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들려 있는 꽃다발이 흔들렸다.
오광재의 들끓은 마음과 같았다.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주아야. 저녁 먹자고 하지 않았어?”
“네? 네!”
장주아가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걸 장주아도 알았다.
‘오빠랑 유리 언니가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
지금껏 오빠 주변의 여성들을 상당수 만나 봤다.
다들 가까이 다가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오빠는 한결같이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 많은 여인들과의 사이에 큰 사고가 없다는 걸 장주아는 느낄 정도였다.
하나같이 여성들은 애가 탔지만 오빠는 그녀들의 마음과 달리 담백했다.
그나마 오정의 임윤아 정도가 오빠와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손유리는 임윤아와도 느낌이 달랐다.
오빠와 손유리 사이에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빠. 나 배고파요!”
장주아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개입하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는 완벽한 타인의 인생이었다.
오빠야 알아서 잘할 테지만 오늘 알게 된 손유리는 조금 걱정이 됐다.
그리고 애써 분노를 누르고 있는 오광재라는 남자.
그도 마찬가지였다.
멀끔하고 세련된 외모의 호감형 남자였지만 고리타분하게 정혼자 얘기만 늘어놨다.
확실히 느껴지는 눈빛에서 보이는 강렬한 기운.
그건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까웠다.
‘……복잡해지겠네.’
미술학도였기에 순간의 감정선을 잡아내는 데 도가 튼 장주아.
세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류로 보아 앞으로의 운명이 평탄하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그래 가자.”
“난 집밥 먹고 싶은데…….”
“재료 준비해 놨다.”
“정말?”
“그래. 오빠가 오랜만에 솜씨 한 번 발휘해 줄게.”
“으흐흐. 우리 오빠 최고!”
장주아는 자신의 여행용 가방을 받아가는 오빠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언니 같이 가요. 우리 오빠 요리 솜씨 끝내줘요.”
“그래…….”
손유리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건 운명이야.’
한국에 도착하기 전 손유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장태산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만난 장태산의 여동생, 그리고 입국장에서 조우한 장태산.
잠잠하게 있어 줄줄 알았던 심장이 먼저 반응하며 요동쳤다.
손유리의 결심을 단박에 뒤흔들어 버렸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첫사랑.
장태산과 맞닥뜨리게 되자 이성은 마비되고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모습이 그대로였다.
그의 눈빛에서는 외모와 달리 성숙한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남달랐던 여유로움이 이제는 원숙하게 익어 있었다.
성공한 사회 원로 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힘과 원숙함에서 흘러오는 여유였다.
그런 장태산도 자신을 보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심전심.
아프게 심장이 저려오는 감정을 같이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과 남은 인생은 온전히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버지와 가족도 내가 존재해야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었다.
불현듯 찾아온 각성에 이끌려 손유리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정해진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외모는 그럴싸하게 시선을 끌었지만 묘하게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호탕하게 웃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했지만 감춰진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영감이 발달한 손유리가 보는 직관.
양해를 구하는 태도를 취해 조용히 다음 약속을 거절했다.
더 이상 아빠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손유리에게 필요한 건 장태산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기내에서 알게 된 장주아가 자연스레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손유리는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드르륵.
대형 가방을 밀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선배, 무겁습니다. 저 주십시오.”
장태산이 비어 있는 왼손을 내밀었다.
“네…….”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그에게 밀어 건넸다.
능숙하게 양손으로 가방을 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장태산.
“우리 오빠지만 진짜 매너남이다.”
“예전에도 그랬어.”
“그래요? 그래서 주변에 여자들이 많은 건가?”
“여자가…… 많아?”
“언니 한국에 있을 때에는 안 그랬어요?”
“……그랬던 것 같아.”
손유리는 장주아의 말에 과거를 떠올렸다.
법대 미녀들도 장태산 주변을 수시로 맴돌았다.
예술대에서도 장태산을 향해 러브콜을 보냈던 여학우들이 많았다.
“흐흐.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나도 우리 오빠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 돼서 다른 남자들이 눈에 안 들어와요.”
장주아가 손유리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때.
“유리 씨!”
타다닥.
오광재가 세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정확하게 손유리 앞을 막아섰다.
그녀 앞으로 스윽 내미는 꽃다발.
물끄러미 꽃과 오광재를 번갈아 쳐다보는 손유리.
마음에 1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네?”
오광재는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 순간에도 연신 번들거리는 오광재의 두 눈동자.
“전 지금껏 제 것을 남한테 줘 본 적은 있어도 빼앗긴 적은 없었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