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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5장. 추억의 나이. (954/1,284)

965장. 추억의 나이.

“주희야……. 그동안 미안했다.”

“???”

“염치없지만 용서해 줘라. 신연주만 탓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옹졸했다.”

“우리가 미쳤지……. 그깟 피부과가 뭐라고.”

“용서해 줄 거지?”

‘도대체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장주희는 그동안 참여하지 못했던 병원 실습에 다시 참여했다.

걱정 가득한 발걸음을 옮기며 의국으로 향하던 중에 외과 수련생 동기들을 마주쳤다.

몸이 먼저 알고 긴장했다.

신연주와 함께 자신을 괴롭히던 동기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반응했다.

마음을 다잡으며 잊으려 했지만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빠 덕분에 새로운 마음으로 충전했지만 그간 쌓인 정신적 충격이 하루아침에 회복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동기들은 주희를 마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과 해왔다.

모두의 태도는 진심 같아 보였다.

“너희들이…… 사과한다면 받아줄게.”

장주희는 예상치 못한 동기들의 반응에 쿨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병원 실습을 관두지 않는 한 자주 봐야 할 관계였다.

사과까지 하는데 굳이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들도 피해자나 마찬가지였다.

“연주는?”

장주희는 동기들 틈에서 보이지 않는 신연주를 찾았다.

동기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명령하던 신연주 모습이 안 보였다.

오빠는 모든 상황이 정리됐고, 이제는 실습 생활만 잘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냥 오빠가 하는 말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슈퍼 히어로 같은 오빠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늘 신뢰했다.

“……연주네 집안 사건 몰라?”

“집안 사건? 뭔데?”

장주희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인터넷에 스마트폰까지 차단당한 채 지낸 시간이 꽤 됐고 또 뉴스를 볼 시간도 없었다.

“정말 몰라? 신상주 교수님 잡혀가던 날 연주네 집안 인터넷에서 꽤 털렸잖아. 연주네 아빠가 불법으로 멀쩡한 회사를 작업해서 팔아먹었대.”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를 보니까 진짜 너무하더라. 자기 자본 하나 없이 타인 회사를 그렇게 삼킬 수 있어?”

“상류층 상당수와 사채업자, 조폭까지 연루되었다고 하던데?”

“완전 인간말종 집안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연주가 뭘 보고 자랐겠냐.”

한때는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추종했던 동기들이 신연주를 놓고 본격적으로 험담했다.

‘이것도 오빠가 한 일?’

다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오빠라면 충분히 연주네 집안을 강력 청소기로 먼지 제거하듯 정리했을 터였다.

“그래서 연주는 안 나왔어?”

“조교 언니가 휴학계 냈다고 알려줬어.”

“쪽팔려서 학교 다니겠냐?”

“그게 문제가 아니지. 검찰이 소환 조사했잖아. 그럼 재산 동결될 테고……. 거지 되는 건 순식간이야.”

“이 와중에도 빼돌릴 거 정리하느라 바쁠 거 같은데?”

“흐흐흐. 신연주라면 그럴 거다.”

동기들은 신연주에게 있어 전혀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신태주 교수에 관해서는 어떤 동정론도 없었다.

도리어 재단 이사회에서 보직 해임이 빠르게 결정됐다.

교수실도 경찰에서 압수 수색을 하고 난 직후 폐쇄됐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그의 흔적이 지워졌다.

간담췌장과 교수도 한국대 출신으로 다른 병원에서 스카우트해 빠르게 채워졌다.

“그랬구나…….”

장주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하면서도 어딘지 섭섭했다.

신연주에게 직접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이제 물 건너갔다.

오빠가 뿌리째 뽑아 버린 뒤였다.

앞으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듯했다.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때 황승재 교수가 나타났다.

얼굴에 드리워진 여유로운 미소가 보기 좋았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동기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과장? 황승재 교수님이?’

시간 강사와 펠로우 급으로 활동하던 황승재였다.

과장이라는 말에 장주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 과장이다.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

황승재가 빙그레 웃었다.

‘임시’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어제 병원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곧 있을 진급 평가에서 정식으로 과장 타이틀을 달게 될 거라는 소식이었다.

일이 술술 풀렸다.

아들도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올 때는 생사를 헤매는 중환자였지만 지금은 또렷하게 의식을 차렸다.

수술이 완벽하게 된 듯 모든 게 무탈했다.

부서진 뼈들도 제자리를 잡아갔다.

이대로 두 달만 입원하면 퇴원을 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다시 재회한 아이 엄마 정민희와도 혼인신고를 마쳤다.

정식으로 아들의 법적보호자가 됐다.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주희가 있었다.

“장주희.”

“넵! 교수님.”

기합이 들어간 장주희가 힘껏 대답했다.

폴리클에게는 하늘과 같은 외과 과장이었다.

“오늘따라 너답지 않게 기합이 팍 들어갔다. 평소처럼 대답해도 돼.”

“네?”

장주희는 황승재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아리송해했다.

황승재 교수는 과거 다른 과 폴리클일 때 몇 번 스쳐 지나가며 인사한 게 전부였다.

학교에서도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장주희를 대하는 황승재 교수는 무척 친분이 쌓인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오후 수술 시간에 늦지 마라.”

“???”

“뭐야? 그 바보스런 표정은? CABG 잡혔잖아.”

황승재 교수가 웃으면서 핀잔을 줬다.

황승재 교수는 장주희를 이미 폴리클이 아니라 한 명의 완벽한 팀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수술실에?’

눈앞이 멍해진 장주희.

황승재 교수는 평소에도 깐깐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마치 자신을 동료처럼 대했다.

거기에 함께 서 있는 동기들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수술실 참여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결정됐다.

집에서 쉬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왜 머릿속에 본 적도 없는 수술에 대한 이미지가 떠다니는 거지?’

장주희는 머리에 떠오르는 CABG 수술 과정을 눈앞에 펼쳐보는 듯한 현상에 다시금 아찔해졌다.

하루아침에 천재가 된 듯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학 지식들이 언젠가 공부해 놓은 듯 바로바로 출력이 됐다.

“오빠…….”

장주희는 신음 섞인 목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자신이 쉬는 동안 마법을 부려 놓은 오빠 장태산.

장주희의 입가에 더 없이 신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

“하아.”

드골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새하얀 구름 위를 날았다.

누가 봐도 시원하고 아름다운 정경.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던 손유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왠지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자신이 원한 귀국이 아니었다.

떠날 때도 그랬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이를 두고 떠났던 그날.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남자를 기다렸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자의 슬픔은 감히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픔을 바탕으로 독하게 버텼다.

집안의 도움은 최소한으로 받았다.

이를 악물고 그림에 몰두했다.

너무 힘들 때마다 마음으로 그의 번호를 수없이 눌렀다.

다른 이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위로했지만 손유리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떤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랑스 재학 중에도 손유리를 상대로 수시로 작업이 들어왔다.

어느 곳에 있어도 모델 같은 모습의 손유리에게 남자들은 하나같이 매료됐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유럽인들도 수시로 대시했다.

그때마다 손유리는 난감한 미소로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완벽하게 온 마음을 차지해 버린 그 남자.

‘우리 운명은 왜 이러는 걸까…….’

손유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법대에서 우연을 가장한 채 먼저 운명의 고리를 그에게 던졌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첫인상.

첫사랑은 아직도 아픔인 채로 진행중에 있었다.

그리고 기구한 운명의 장난처럼 손씨 가문과 그는 원수가 됐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었다.

어떤 것도 계획하지 못했고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흘러갔다.

프랑스 미술계의 스승과 동료들도 귀국을 만류했다.

이제 이름을 얻기 시작한 손유리의 재능이 아깝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빠의 진심 어린 부탁과 냉철한 명령이 떨어졌다.

엄마도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다.

자상했던 할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고, 오빠는 어린애 수준의 바보가 됐다.

혼자서만 행복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굴레.

손유리는 착잡한 시선으로 초점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저…….”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맑은 음성.

고개가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바로 옆 좌석.

누가 봐도 아름답다는 말을 건넬 만큼 눈에 띄는 이십대 초반의 숙녀가 손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표를 끊다 보니 이코노미석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네?”

“혹시 손유리 화가님 아니세요?”

“네……. 맞는데 누구신지…….”

손유리는 상대를 전혀 몰랐다.

익숙한 느낌이 약간 있었지만 쉽게 어디서 스쳤는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대 미대 다니시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선배님! 저도 한국대 미대 졸업했어요. 지금은 석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프랑스 미술 잡지를 통해 선배님 프로필과 작품을 봤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여성의 모습에 손유리는 긴장을 풀었다.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지만 한국대는 손유리의 모교였다.

“여기서 후배님을 만나네. 반가워.”

손유리가 활짝 웃었다.

“와아아! 진짜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인연이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맞아.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네. 그런데 이름이…….”

“아차! 제정신 좀 봐. 장주아라고 해요. 편하게 주아라고 불러주세요.”

“장주아…….”

손유리는 이름을 듣고 몇 번이고 입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곱씹었다.

뭔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었다.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도 같았지만 아련한 느낌만 계속 맴돌았다.

“선배님.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얼마 전 전시회에 내놨던 ‘나의 이상주의’ 대상이 누군지 알 수 있어요?”

“그거 봤어?”

손유리가 웃으며 물었다.

최근 전시회에 내놓은 자신의 작품을 기억했다.

“네! 뒤뷔페 작품처럼 순수한 강렬함과 그리움이 몽땅 화폭에 담겨 있었어요. 단순하면서 천진난만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누군가를 향한 불꽃같은 사랑에 대한 미련은…… 같은 게 느껴졌어요. 저만의 착각이었을까요?”

“!!!”

손유리는 내심 깜짝 놀랐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파악해 내고 있었다.

한 가지 그림을 두고도 보는 이에 따라 백이면 백, 천이면 천 가지로 해석이 모두 달라졌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화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장주아.

“괜한 질문을 드렸나요?”

장주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학을 맞아 유럽 박물관 투어에 나섰다.

매우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귀국길에 올랐다.

명화들을 컴퓨터나 화보집이 아닌 직접 눈으로 보는 호사를 누리며 깨달은 바가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접하게 된 한국 화가 손유리에 대한 이야기.

프랑스는 은근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특히 예술계 쪽은 그 벽이 더 높았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화가 손유리는 동양을 대표하는 청년 화가 3인에 올랐다.

이 사실은 엄청난 영광이었다.

앞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꼬리표가 될 만큼의 찬사였다.

‘이별의 상처겠지.’

장주아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손유리를 보며 짐작만 했다.

아직 자신도 맛보지 못한 작품으로 승화된 뜨거운 사랑.

예술가들은 사랑을 에너지 삼아 자신의 작품에 영혼을 담는다고 했다.

손유리도 그랬을 것이다.

“주아야. 그거 알아?”

“네?”

촉촉이 젖은 손유리의 목소리.

“추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더라.”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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