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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4장. 맛이 어때?(3) (953/1,284)

964장. 맛이 어때?(3)

띠리링 띠링 띠리리리~♬.

바흐의 파르티타 2번 샤콘느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이 넓은 거실에 울렸다.

화성의 신비감과 대위법의 극대화로 탄생한 바이올린의 넓고 풍성한 성량은 고유의 음색을 담백하게 표현해냈다.

신선한 충격이 공간을 울리며 리듬을 타고 장주희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장주희는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평소 지칠 때마다 찾아 듣던 음악이 오늘따라 완벽하게 위로가 돼 주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선율에 어울리는 화가가 떠올랐다.

장 앙투안 와토.

적색과 흑색의 구분이 명확해서 좋아했다.

언니 덕분에 각종 미술을 접하면서 알게 된 화가다.

방학 때 언니와 함께 방문했던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던 와토의 그림이 떠올랐다.

비너스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섬을 배경으로 그려졌다는 그림.

‘키테라 섬의 순례 A’의 그림 속의 조화로운 자연이 생생한 화음과 잘 어울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의 거장들은 생각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장주희는 요즘 호사를 누렸다.

막연했던 한국대 의대 본과생의 삶.

매일이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몰아붙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함께했던 친구들이 이성 교제와 대학교 생활을 동시에 즐길 때 장주희는 원서로 된 의학서적을 애인처럼 붙들고 살았다.

글자만 봐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 과정을 10년 동안 지속해야 온전한 전문의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 하나만 파고들어 서른 살이 되어서야 겨우 밥값이 가능한 의사들의 세계.

그만큼의 사회적 보상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남들은 우아한 상류층이라 단편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그야말로 백조의 삶과 같았다. 엄청난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물속에서 두 다리를 얼마나 발버둥쳐야 하는지 모른다.

“하아아아.”

연주가 끝나자 장주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짧고도 길었던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버텨보려고 노력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오빠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하나둘 진행시켰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일체 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집 밖으로도 나가지 못했다.

주희는 그래도 행복했다.

아침과 저녁에 시간이 날 때마다 오빠가 집에서 밥을 차려주었다.

엄마표 못지않은 정성 가득한 한상차림.

주희는 오빠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고 힘을 냈다.

오빠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능력 이상으로 힘을 내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시간.

잠시의 휴가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오빠 고마워…….”

주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오빠가 없었다면 지금의 삶을 꿈도 꾸지 못했을 터였다.

잠깐의 휴식은 엄청난 힐링이 됐다.

그동안 살펴보지 못한 시간들을 뒤돌아보고 자신을 온전히 찾는 시간이 됐다.

바닥났던 기운이 차오르며 몸에 생기가 돌았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 나갈 힘을 비축했다.

신연주 따위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장주희의 뒤에는 언제나 든든한 오빠가 버티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오빠가 어떤 식으로든 신연주를 정리했을 것이다.

오빠는 먼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니지만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에게는 그들이 누구라 해도 가차 없이 대응했다. 집안을 괴롭히던 친척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툭하면 집안에 찾아와 큰소리를 치던 친인척들은 이제 고분고분한 양이 됐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도움을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옳지 않은 금전적 지원은 일체 허용하지 않는 게 오빠였다.

집안 장손인 아빠의 기강이 오빠로 인해 바로 섰을 정도다.

“좋다…….”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면서도 장주희는 행복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온 신연주와의 그의 집안이 어떤 상태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

- 장씨 조상님이 후손 관리 계좌를 통해 포인트를 지급했습니다.

우리 조상님이 포인트를?

갑자기 들려오는 뜬금포 알림음.

- 일단 패죠.

갱단 출신 장립은 의외의 순간에 무척 과격하게 굴었다.

날 보며 깜짝 놀란 신연주를 패고 시작하라고 주문을 넣었다.

- CCTV도 없습니다. 형님 잘하시는 그 패고 마법으로 고쳐주기 기술을 사용하면 다시는 기어오르지 않을 겁니다.

생각하는 게 영특해졌다.

그 말을 듣고 잠깐 고민됐다.

그러나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신연주가 괘씸하고 미웠지만 그렇다 해도 여성이다.

저런 연약한 여자를 팬다는 건…….

“야! 장주희!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작은아빠 일, 네 오빠가 어떻게 한 게 맞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어떻게 교수님에게 그럴 수 있어! 이 악마 같은 더러운 계집애야!”

쫘아아악!

이런! 손이 나의 이성보다 먼저 반응했다.

“아아악!”

신연주가 짧은 비명을 토했다.

내가 의국으로 향하자 다들 눈치를 채고 방향을 틀어 돌아섰다.

머리가 좋은 인재들이다 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다.

- 형님, 방금 전에는……. 여자라고 봐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 문제 없다.

난 지금 장태산이 아니라 장주희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여자라고 해서 봐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악인은 남녀를 떠나 그저 악인일 뿐이다.

- 존경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첫 번째 원칙은. 룰이 없다는 격언을 오늘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귀신의 아부성 발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크게 놀란 신연주를 쳐다봤다.

“네까짓 게 감히…… 날!”

신연주가 손으로 뺨을 감싸고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희 집 가훈이 ‘네까짓 게’야? 잡혀간 신 교수도 그러던데 너도 그러네? 집안이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던데.”

여자들 사이에서나 보여지는 비웃음을 띠고 신연주를 상대했다.

“닥쳐! 네가 우리 집안을 알기나 해! 우리 아빠가 가만 안 둘 거야!”

“집안이라고 할 게 있나? 고조부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함경남도 산골 골짜기에 살던 나무꾼이었고, 강점기 시절에 증조할아버지는 변절자, 할아버지는 일제 악질 순경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과 독재자를 위한 충성스러운 개가 되었고……. 네 아빠와 작은아빠는 힘 없는 자들을 상대로 사기 치거나 종처럼 부려먹으며 갑질 전문가가 됐는데 그게 자랑할 만한 집안이란 거야?”

“!!!”

팩트 폭력에 신연주가 토끼눈을 떴다.

자기 조상들의 삶을 나보다 더 몰랐던 모양이다.

“넌 상관없겠지. 워낙 집안 내력을 보고 자란 없는 애니까. 인류애와 사랑과 자비를 알기나 하겠어? 성형이나 명품이면 모를까.”

- 오! 형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팩트 지립니다!

신연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눈에서 레이저 같은 악독함이 쭉쭉 뿜어져 나왔다.

“눈 깔아라. 빨대로 먹물 쪽 빨아버리기 전에.”

“너…… 너…….”

신연주는 나의 입에서 터진 과격한 말투에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왜? 듣기 싫어? 쫄려?”

모습은 장주희지만 난 오크 때려잡던 장태산이다.

그간 악인들 수십 명을 처리해 본 나에게 작은 새끼 악마 길들이는 건 일도 아니다.

“고소할 거야! 너 지금 나 협박하고 폭력 행사하고…….”

“증거 있어?”

“뭐, 뭐라고?”

“널 협박한 증거 있냐고? 그리고 내가 언제 때렸는데?”

“너 미쳤어! 네가 내 뺨을 때려서 이렇게 부어…….”

의국에 있던 대형 거울을 바라보던 신연주.

“헛!”

그리고는 깜짝 놀라 신음을 삼켰다.

검붉어졌던 얼굴이 감쪽같이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때리는 동시에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귀신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깔끔한 하급 마법 스킬.

고통은 배가 됐지만 치료는 완벽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무……슨 짓을 한 거야!”

신연주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짓? 에이 우리 사이에 짓은 아니지. 지금껏 네가 나에게 했던 행동들은 그럼 뭐라 말해야 하지? 동기들을 꼬드겨 왕따를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던진 언어폭력은 우정인가? 그냥 이것도 사랑이 넘치는 우정의 매라고 생각해.”

웃으면서 신연주를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파르르 파르르.

신연주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 액션 좋습니다! 흐흐흐.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 장립은 신이 났다.

오늘로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주희를 본래 자리로 돌려보낼 때가 됐다.

며칠 동안 쉬면서 바닥났던 기도 다시 재충전했다.

내가 언제까지나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주희의 인생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개입은 주희와 나 둘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었다.

그전에 깔끔하게 이번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바로 눈앞에 그 원흉이 있다.

주희가 받은 거에 이자를 살짝 계산해 돌려줄 생각이다.

“매일 도도하고 착한 척하더니 이게 네 본 모습이잖아! 가증스럽고 독한 독사 같은 년!”

신연주가 매를 벌고 싶은지 막말을 내뱉었다.

독사눈에는 독사만 보인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가증이라…… 하나 더 알려줄까?”

“???”

“지금쯤이면 금융 사기꾼이라 불리는 네 아빠도 탈탈 털리고 있을 거다. 인터넷 뉴스를 비롯해 사방에서 네 아빠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던데.”

“……거짓말!”

“확인시켜주면 믿을래? 그럼 기다려.”

의국에 있는 컴퓨터를 클릭했다.

그리고 종합 포털을 열었다.

화면에 커다랗게 보이는 실시간 검색어와 뉴스.

“기업입수합병 전문 기업 B&S의 신태주 대표를 사기 혐의로 고발합니다. 제목에서 느낌 오지 않아?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도배했네. 신태주, 기업사냥꾼, 어? 신상주 교수도 연관 검색어로 떴는데? 이러다 너도 나오는 거 아냐?”

“!!!”

신연주는 화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티즌들의 포악성과 무서움을 그녀도 어느 정도 알았다.

한 번 털리면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고 했다.

인터넷에 남겨진 흔적이야말로 임의로 지울 수 없었다. 영원한 낙인 같았다.

사회적으로 정당한 일이라면 더 말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 알지?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말인데 알려나 모르겠다. 매일처럼 악이 승리하는 집에서 자랐으니.”

“다, 닥쳐!”

- 독하네요! 저 정도 됐으면 공포나 반성 모드에 들어가야 정상인데…….

신연주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다.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면 옳지 않다’ 같은 기본 규칙을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남들을 밟고 쓰러뜨려야 승리자가 된다는 피라미드 꼭대기 이론으로 무장된 케이스.

밟힌 자들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갑질 사이코패스였다.

“준비해 둬야 할 거다.”

신연주에게 기본 개념 교육은 무의미했다.

피부에 와 닿는 현실만이 그녀에게 벌이 될 것이다.

“무슨 짓을 준비하는 거야! 너희 오빠랑 뭔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아주 바보는 아니어서 눈치는 빨랐다.

그래봤자 늦었다.

후회는 늦었다 싶은 순간이 가장 늦은 법이다.

“신연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은 예뻤지만 그 얼굴 뒤에 감춰진 본래 모습은 무척 추했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했다.

마음 하나 바꾸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충고 하나 할게.”

“됐어! 듣기 싫어!”

거부하지만 상관없다.

“사람들 모두 누구나 바닥부터 시작해. 각자 시작하는 바닥의 깊이는 다르지만…… 넌.”

말을 짧게 끊었다.

그리고 날 죽일 듯 바라보는 신연주의 눈동자를 냉정하게 응시했다.

“그 바닥의 진짜 밑바닥을 경험해야 될 거다. 아무리 메꿔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무저갱의 바닥…….”

철저하게 박살을 낼 것이다.

물질이 전부라 여기는 신씨 가문에 진짜 가난을 선물할 예정이다.

죽을 것처럼 고통을 느낄 게 뻔했다.

물질이 풍부한 자들에게 가난만큼 큰 고통과 악몽은 없다.

악마의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 뜨거운 맛을…… 제대로 한번 느껴봐.”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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