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장. 맛이 어때?(2)
- 손 장로님. 우리 아들이 사진을 보더니 안달이 났어요. 자기 색시 언제 만나게 해 주냐고 말입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손대균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부족한 아이라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입니다.”
- 들다마다요. 유리 양 같은 재원이 요즘 어디 있습니까. 남다른 미모에 성품도 착한 데다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 프랑스에서 떠오르는 동양 작가 3인에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정말 잘 자랐어요.
“감사합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 내뱉으면서도 손대균의 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어느 순간 흘러가듯 자연스레 결정된 딸의 혼처.
손대균에게는 딸의 혼인 계약이 과거의 고리타분한 유물이 아니었다.
2014년 현재에도 통하는, 권력을 키워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부친의 강권에 큰 고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일이 이렇게 됐다.
유리에게도 넌지시 얘기는 해놓은 일이지만 딸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웃고 지나갔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먼 미래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점점 현실이 됐다.
급기야 공부 중인 딸을 불러들였다.
회주는 전혀 의심 없이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손대균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특수한 영적 능력도 갖고 있다.
다채로운 욕망을 가진 회원들을 마음껏 주물렀다.
그를 한 번이라도 대면한 자들은 알아서 하나같이 충성을 맹세했다.
배신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아버지도 손국중도 비단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집단 세뇌라도 당한 듯 회주의 메시지를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 곧 귀국한다 한 것 같은데…… 언제 오나요?
회주는 프랑스에 있는 딸의 모든 걸 꿰고 있다.
손대균도 파악 못 하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정도의 라인도 구축하고 있다.
“며칠 내로 올 것 같습니다.”
- 도착하는 날에 아들을 보내겠습니다.
“네?”
- 아들이 몸이 달았답니다. 유리 양 사진을 본 뒤로 상사병에 시달린다니까요.
“알겠습니다.”
손대균은 군소리 없이 승낙했다.
딸의 운명이 자신의 손을 떠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가문을 견고히 하고 지켜 내기 위해서는 회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앞서 일로 제대로 경고를 받았다.
다른 장로들이나 회원들이 색안경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 충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손씨 가문은 자신의 대에서 명맥을 다하게 될 터였다.
집안이 갖고 있는 약점이 많았다.
이미 아버지 손국중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다.
그걸 물고 늘어진다면 피할 길이 없다.
일송회는 배신자로 낙인찍힌 자를 처절하게 벌했다.
- 그리고 장태산이 요즘 뭘 꾸미고 있다는데…… 준비는 하고 있나요?
본격적으로 일 얘기가 나왔다.
“최선을 다해서 방비 중입니다.”
- 위험한 놈입니다. 손 장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회주의 경고가 더해졌다.
평소와 달리 장태산에 대한 경계 권고는 진심이었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놈입니다.”
손대균이 다소 차갑게 대꾸했다.
- 나도 준비하고 있어요. 때가 오면…….
회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심중은 분명해 보였다.
장태산과 일송회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말을 들은 손대균의 눈동자에 잠깐 빛이 동했다 사라졌다.
회주가 어떤 인물인지 장태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회주가 직접 움직인다면 장태산을 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필요하시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 물론이죠. 손 장로님은 든든한 오른팔이 아니겠어요. 이제 곧 가족이 될 터인데.
회주는 믿음과 신뢰의 신호를 보냈다.
“회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마음을 기억해 두겠어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로 우리 학자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있던데 조용히 처리해 주세요.
요즘 일부 시민단체가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송회 소속 학자들을 고소하고 있었다.
“명예훼손과 민사소송을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놈들과는 어떤 대화도 무의미합니다. 법과 힘으로써 감춰진 진실을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베테랑들을 붙였습니다.”
- 믿어요. 우리 손 장로님만 한 법조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회주야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손대균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속을 절대 알 수 없는 회주다.
감춰진 그의 정체는 몇몇 사람들만 겨우 알고 있는 실정이다.
철저하게 세상 모두를 속이는 위선자.
그에게는 어떤 꼬투리도 잡히지 말아야 했다.
“결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래요. 백 마디 말보다는 행동과 결과죠. 바쁜데 이만 끊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들어가십시오.”
띠릭.
회주와의 통화가 끝났다.
“휴우우.”
긴장을 풀며 손대균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회주의 능력을 모두 확인한 자는 아직 아무도 없다.
그만큼 측정 불가였다.
어떤 곳에 그가 심어 놓은 끄나풀이 있을지 역시 몰랐다.
“장태산…….”
손대균은 장태산의 이름을 곱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언제나 그는 가슴 한켠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남아 있었다.
삐이이잇.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날카롭게 울리는 인터폰.
“무슨 일이야.”
- 이사님. 장태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장태산을 전담하고 있는 팀장이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를 해왔다.
“장태산이?”
- 신태주 대표 동생인 신상주 교수를 엮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 뉴스에……. B&S에 대한 뉴스가 떴습니다.
“무슨 뉴스?”
- 어떻게 알았는지 내부자들의 대포폰 대화가 모두 유포됐습니다.
“이런 멍청한……. 바로 들어와 보고해!”
- 넵!
손대균의 인상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장태산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나름 변호사들을 파견해 중요 증거들을 폐기하라 일러두었던 일인데 어리석은 자들이 걸린 듯했다.
딸깍.
인터넷을 연결한 손대균.
뉴스판에 실검 1위로 올라온 B&S 기사에 각종 비리 내용이 연관 검색됐다.
신태주 대표의 이름도 동시에 순위에 올랐다.
뉴스를 클릭했다.
그 순간 촤르르 따라 뜨는 인수합병 전문 기업 대표 신태주의 각종 비리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뉴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체계도와 공격 수법, 자본의 흐름과 정관계 로비스트 이름까지 적절하게 비실명 처리되어 올라와 있었다.
네티즌은 물론 국민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했다.
완벽한 공격 방법.
“장태산……. 참으로 너답다.”
기사를 훑어보던 손대균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봐도 피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완벽하게 짜여진 자료가 공유된 이상 정치권은 꼬리 자르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그들의 충직한 사냥개 검찰이 나서서 적당한 사냥감을 갈가리 찢어발길 터였다.
적의 병기로 적을 제압하는 장태산.
참으로 무서운 후배였다.
***
- 아빠! 작은아빠가 잡혀갔어요!
“뭐라고? 상주가?”
- 네! 경찰들이 찾아와서 뇌물죄와 마약류 의료법 위반이라며 끌고 갔어요.
“이런 미친!”
- 아빠……. 이제 나 어떡해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신연주가 물었다.
“아빠가 알아서 하마. 리앤장 변호사들을 붙일 거니까 걱정 마. 아빠 인맥을 활용하면 바로 풀려날 수 있어.”
신태주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많이 놀랐을 딸을 달랬다.
목표 대상이던 오양식품이 코앞에서 날아갔다.
백방으로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던 사이 동생까지 잡혀갔다.
정체 모를 불길함이 그를 엄습했다.
“대표님!!!”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팀장 홍영기가 샛노랗게 얼굴이 질려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나 통화하는 거 안 보여?”
신태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큰일 났습니다!”
늘 신태주의 눈치를 살피고 예의를 가장 우선하는 홍영기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일인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신태주가 물었다.
“인터넷에……. 대표님과 회사가 털렸습니다!”
“털려? 내가?”
“대포폰으로 통화했던 내용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백업해 두었던 자료들까지 상당수…… 자료가 유포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신태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과거에는 수기로 장부를 기록했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다.
사이버 공간에 저장해 두고 있던 장부 내역들.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후에 유용하게 협박용이나 몸보신용으로 쓰기 위해 따로 보관해 두었던 자료들.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해외 비밀 보안 사이트에 백업해 두었다.
미국FBI가 덤벼도 털 수 없다는 비공개 사이트.
그곳에 보관해 두었던 자료가 풀렸다면 그 사이트가 해킹을 당했다는 말이 됐다.
“지금 네티즌들이 벌떼처럼 여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
신태주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아빠?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신연주가 전화기 너머에서 애처럼 아빠를 불렀다.
“아빠가 급한 일이 있다. 이따가 통화하마.”
신태주가 급히 딸과의 통화를 끝냈다.
“얼마가 공개된 거야?”
“……저도 모르는 부분까지입니다.”
“아…….”
“인터넷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너무 자세하게 유포됐습니다. 여기.”
스마트폰을 내밀어 해당 화면을 보여주는 홍영기 팀장.
“!!!”
뉴스를 읽어 내려가던 신태주의정신이 멍해졌다.
절대로 세상에 밝혀지면 안 되는 내용들이 먼저 떠 있었다.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모든 초기 계획과 진행 과정 내용들이 팩트에 기반해 정리되어 있었다.
신태주의 뇌에서 뽑아 놓은 듯 전혀 빈틈이 없었다.
정치인들과 언론인들, 법조계 인사들의 이름은 보안 처리되어 있었다.
네티즌들이 해당 기사에 대놓고 실명을 오픈하라고 난리가 났다.
어떤 식으로든 기사의 확산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보를 오픈한 당사자로 짐작되는 상대가 신태주와 연루된 고위 관계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신태주를 밟지 않으면 모두 한꺼번에 보내버리겠다는 경고다.
이제는 아군이 적이 될 판.
“대표님…….”
지금 심정은 홍영기도 신태주와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몇몇 사건에는 자신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그것까지 오픈되어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감옥에 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장태산…… 이 개새끼!!!”
신태주는 눈알을 뒤집으며 이를 갈았다.
장태산을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 준비중에 있었다.
그런데 대비할 틈도 없이 선빵을 맞았다.
너무나 뼈아픈 일격.
새파란 살기가 신태주의 눈에서 줄기차게 뻗어 나왔다.
***
“어떡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신연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신상주가 끌려가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신연주는 의국에 돌아와 바로 아버지 신태주에게 긴급하게 전화를 넣었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곱게 한 화장이 엉망이 되어 지워졌다.
장주희에게 호되게 당해 팔과 어깨가 아직도 얼얼했다.
자신의 든든한 뒷배였던 작은아빠 신상주가 눈앞에서 끌려가는 것을 본 선배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일제히 수군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 앞으로 의사 인생은 끝났다, 고소하다는 등의 막말을 내뱉었다.
누구 하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에 영혼이 털린 채 끌려가는 작은아빠 신상주의 모습을 모두 보란 듯이 지켜봤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 경멸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신상주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 시선은 신연주에게로 향했다.
신연주는 그들의 시선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신상주가 빠지면 끈 떨어진 연이나 진배없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간의 온갖 갑질 사건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선후배들이 있을 때는 가차 없이 무시했다.
외과 교수이자 병원 고위 관리자였던 작은아빠는 누구보다 신연주에게 든든한 조력자이자 방패였던 셈이다.
신연주는 함께 공부했던 동기들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장주희와 비슷하게 돌아가며 괴롭히던 타깃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을 갈굴 때마다 묘한 쾌감에 젖어들었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혀 이제 반대의 처지가 돼 버렸다.
“아빠 회사에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신연주는 조금 전 작은아빠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던 장주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장주희의 모습은 지금껏 온갖 갑질을 다 해온 자신보다 더 사악해 보였다.
끼릭.
의국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신연주가 몸을 돌렸다.
“신연주……. 잡았다!”
열린 문 앞에서 악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연주를 보며 웃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