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장. 찐 꼰대.
“잘나가기는 개뿔. 이번에 실수하기만 해봐라.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서양유업 회장실.
탄탄한 중견 기업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던 서양유업.
기업들 사이에서 회장 소리를 듣고 싶어 계열사를 늘려온 안동근이 이를 박박 갈았다.
오양식품이 어느 날부터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큰딸이 시집가서 살고 있는 사돈집이지만 욕심에 아주 눈이 뒤집혀 사리분간을 하지 못했다.
계획했던 대로 서양유업과 한덩어리가 되면 대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무늬만 회장이 아닌 대기업의 진짜 회장이 되는 게 가능했다.
사실 안동근도 처음부터 욕심을 부렸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냉혈한 기업가라 해도 엄연히 오양은 딸의 시댁 집안이었다.
사돈댁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몇 년 전부터 큰딸 부부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권태기가 올 만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딸의 방황이 심해졌다.
시집가기 전 젊었을 때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 호빠를 드나들었다.
먼저 알고 아버지로서 말렸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사이 사위도 딸의 문제를 알게 됐다.
당연히 부부 사이가 회복될 리 없었다.
그즈음 막내딸이 안동근을 슬슬 자극했다.
미국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들어와 서양유업에서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막내딸 안소연.
아버지 안동근의 심기를 파악한 안소연은 사세 확장을 위해서는 인수 합병이 필수라고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오양식품을 찍었다.
그렇지 않아도 욕심이 커지고 있던 안동근 회장이 넘어갔다.
그간 잘도 숨겨 놓은 비자금과 인맥을 이용해 적합한 작업자를 찾았다.
한국 사회는 참 좁았다.
그 자리에서 신태주를 소개받았다.
하늘이 준 기회처럼 일이 척척 진행되고 잘 풀렸다.
이렇다 할 상류층 인맥이 없는 오양식품은 좋은 먹잇감이 됐다.
설계자, 거간꾼, 물주들이 속속 모였다.
계획대로 작업이 시작됐고 일은 착착 잘도 풀렸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똑똑.
“누구야!”
“아빠 저예요.”
“들어와.”
스르륵.
문을 열고 막내딸 안소연이 들어왔다.
30대에 들어선 안소연은 또 다른 매력을 물씬 풍겼다.
사방에서 혼처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다 마다하고 회사 경영에 뛰어들었다.
딸밖에 없는 안동근 회장의 뒤를 이을 차기 서양유업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다.
공부를 마치고 월가에서 잠깐 근무 경력을 쌓고 돌아와서 그런지 더 없이 냉정한 자본가가 된 안소연.
“일이 터졌다고 하던데 사실인 것 같네요.”
기획실에서 근무하는 안소연은 안동근 회장의 표정을 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놈들이 마무리를 못 해. 쯧쯧.”
안동근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신태주 대표가 바보는 아니에요. 그도 꼼짝 못 할 정도의 위인이 달라붙었어요.”
“너도 들었냐?”
“소문이 생각보다 빨라요.”
“장태산 그 자식에 대해서 알고 있지?”
“네.”
“어떤 놈이야?”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진짜 남자죠.”
“그 정도야?”
안동근이 미처 생각지 못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제 딸이 웬만한 남자는 성에 차 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안동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시잖아요. 소문 쫙 난 건.”
“그래도…… 아직 나이가 있는데.”
“젊은 사람은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이대로 물러나?”
“지켜봐야죠. 한두 사람이 얽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안소연이 무슨 수가 있는지 빙긋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넌 태연하구나. 방법이 있는 거냐?”
안동근이 꾀주머니로 불리는 딸 안소연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손해 날 것도 없잖아요? 리스크가 없는데 뭐하러 화를 내요.”
“그런가?”
안동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빠. 넓게 생각해 봐요.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잖아요.”
“뭐가 말이냐?”
“언니 곧 이혼할 거 같은데……. 이것저것 받아내면 좋잖아요.”
안소연이 배시시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
천천히 딸의 말을 곱씹던 안동근이 깜짝 놀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딸의 냉철한 판단에 귀가 솔깃했다.
“오양식품 주식 가치가 올라가면 땡큐에요. 상속이 상당히 이뤄져 형부 주식 지분이 꽤 높아요. 그것도 결혼 후에 획득한 주식이니……. 어느 정도는 분할 대상 아니겠어요? 그리고 형부도 바람 피웠잖아요. 증거도 있고.”
안소연이 이미 승기를 잡은 듯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금세 안동근의 표정이 풀어졌다.
막내딸은 가끔 이렇게 어렵지 않게 사업적 문제를 해결해 낼 때가 많았다.
확실히 안동근보다 시야가 넓었다.
“양쪽 손에 케이크를 들고 있어요. 신태주 대표가 잘 풀어나가도 좋고 오양식품이 위기를 탈출해도 이익이 쏠쏠해요. 그러니까 인상 풀어요.”
“흐흐흐. 우리 귀염둥이 막내딸 말을 듣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조상님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저를 이렇게 잘나게 낳아주신 아빠 엄마 은혜도 크잖아요.”
“그런가?”
“아빠. 조금만 참아요. 제가 반드시 아빠 소망 이루어지게 해드릴게요.”
“그래! 믿으마. 넌 우리 집의 기둥이다. 하하하하하하.”
회장실에 울려 퍼지는 안동근의 호탕한 웃음.
‘아유라……. 생각보다 똑똑해졌네. 바본 줄 알았는데 장태산을 이용할 줄도 알고.’
친절하게 뱉은 말과 달리 안소연의 눈빛은 경직돼 보였다.
온시은을 위해 위험한 상황임에도 클럽에 들어와 그녀를 구출해 나갔던 장태산.
당시 아유라에게 장태산의 전화번호를 물었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장태산이 거절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아유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도 장태산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유라.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한때는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던 아유라와 그 집안.
안소연은 비정한 자본주의 총아인 월가에서 사회생활을 확실한 진리 하나를 습득했다.
마지막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까지 적의 숨통을 확실히 졸라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 형님 갑자기 왜?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주희의 몸을 하고 생활하고 있지만 내 영혼은 장태산이다.
저런 쓰레기 허접 같은 교수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사람이 아니란 뜻이다.
누가 봐도 이건 더러운 갑질이다.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황승재 교수를 제거하려는 게 확실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좋은 의사 황승재.
그런 그를 핍박하는 정치 의사이자 교수 신상주.
주희를 괴롭히던 신연주의 작은아버지이고, 아유라의 오양식품을 집어삼키려는 신태주의 동생이다.
이 정도면 나와 필연적 악연으로 묶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봐줘?
웃기는 소리다.
“넌 뭐야!”
신상주가 어이가 없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황승재를 비롯해 근처에 서 있던 간호사들도 나를 보며 당황했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던 순간이다.
그걸 내가 막았다.
일개 폴리클 주제에 말이다.
“교수님, 설마 모두가 보는 신성한 아침에 그 손으로 동료 의사를 때리려는 건 아니죠? 그것도 펠로우급 선배님을 말이죠.”
의연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움찔.
신상주가 은근 당황하는 게 보였다.
“에이, 설마 아니겠죠. 배울 만큼 배우고 존경에 마지않는 한국대 의대 정교수님이 소화제 정도에 불과한 약제 하나 추가했다고 동료 의사를 몰상식하게 몰아붙이는 그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 믿을게요. 여기 간호사님들도 예쁘고 큼지막한 눈 다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추려내고 듣기 좋은 말들로 말장난을 시작했다.
“너…….”
얼굴이 금세 울그락 붉으락 변한 신상주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 저 새끼 화났는데요? 크크크.
장립 귀신이 재미있는 듯 웃었다.
나도 이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어 웃겼다.
괜한 시비를 걸고 싶어 동료 의사를 간호사 앞에서 면박 주는 못난 의사.
시대가 바뀌어도 그런 자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게 정말 싫었다.
확인 사살이 필요했다.
“교수님 그거 아세요?”
“뭐!!!”
“요즘 갑질 동영상 한 번 뜨면 얼굴 팔려서 살 수가 없대요. 네티즌들이 신상을 털기 시작하면 대대손손 얼굴이 팔려요.”
“!!!”
“스마트폰 보급 시대에요. 지금도 누가 찍고 있을지 몰라요.”
생글거리며 사방을 쓰윽 둘러봤다.
“지금 나랑 장난해!”
호통을 치면서도 사방을 살피느라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는 신상주.
저런 인간형은 병원에서나 교수지 밖에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키도 작고 볼품없는 몸매에 인상도 고약했다.
저렇게 생겨 먹은 자가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할 리도 없었다.
관상은 과학이다.
“에이, 일개 폴리클 주제에 장난을 어떻게 해요? 저 그렇게 간 크지 않아요. 잘 보여야 할 교수님 앞이잖아요. 제 꿈이 생각보다 커요. 교수님 밑에서 제대로 배워 한국대 교수할 생각인데요. 그런 제가 설마요? 주변 상황 눈치 못 채는 우동사리 뇌도 아니고.”
“풋…….”
“크큽.”
간호사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황승재 교수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우동사리?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그걸 알면서 묻나.
- 이 자식 완전 바본데요. 여기 의사들 똑똑하다고 하던데 무늬만 그런 것 같아요. 애들도 아니고 쯧쯧.
상황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장립이 혀를 찼다.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신상주만 재차 확인하듯 물어왔다.
아마 이런 경우는 살면서 경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감히 자신의 영지 같은 외과 병동에서 일개 실습생에게 희롱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말이다.
“교수님, 그렇게 들으셨어요? 그럼 제가 사과드릴게요. 설마 똑똑하고 영민하신 한국대 의대 교수님 뇌가 우동사리 같겠어요?”
싱긋 웃으며 물었다.
확인사살이다.
“야! 장주희!”
끓던 냄비의 뚜껑이 열리면서 신상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야?”
“헉!”
“신 교수님이 왜…….”
의국에서 회진을 위해 나오던 레지던트들이 묘한 대치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환자 보호자들도 여럿 섞여 조용히 구경에 참여했다.
이제는 빼박 현장이 됐다.
“교수님 얼굴이 붉어지셨어요. 혈압약 복용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다 큰일 나요. 분노를 가라앉히고 심호흡하세요. 하나에 들이쉬고 둘에 내쉬고.”
신상주 교수의 반응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남자 새끼가 어린 숙녀한테 버럭버럭 소리나 질렀다.
오늘 제대로 걸렸다.
“너, 너 미쳤어? 나 교수야!”
그래서 어쩌라고?
“네. 교수님 맞아요.”
어리석은 사람과 계속 놀아주는 것도 일이다.
“너 나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고 온전할 것 같아? 이게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세상 물정 모르는 일개 햇병아리 폴리클 주제에!”
살다 보면 가진 지위와 나이로 청춘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일명 찐 꼰대.
‘찐’이라는 말은 2014년에는 유행하지 않았지만 2020년에는 선풍적으로 많이 쓰이던 말이다.
“그러는 교수님은 온전할 거 같으세요?”
“뭐……라고?”
“정교수가 대단한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 앞에서 동료 의사를 모욕하는 건 신성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서 할 짓은 아닌 것 같네요. 교수님이 생각해도 쪽팔리지 않으세요?”
“이년이 미쳤나!”
터더덕.
열이 받은 상태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신상주 교수.
쉬이익.
손을 들어 나의 뺨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이미 욕설을 뱉을 때부터 제정신은 아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
딱 걸렸다.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순간 넌…… 뒈지는 거다!
“아악!”
재빨리 비명을 터트렸다.
지금 난 연약한 햇병아리 폴리클 실습생이다.
턱!
하지만 뺨에 손은 닿지 않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로 얼굴 옆에서 멈춘 신상주의 손.
“그만하시죠!”
“너…… 뭐야! 이 손 안 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