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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7장. 좋은 파트너(4). (946/1,284)

957장. 좋은 파트너(4).

‘X발! 하필 저 새끼가 여기에!’

홍문수는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자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잠시 이성의 끈을 놓친 게 후회됐다.

숨겨놓고 혼자만 가지고 놀아야 할 장난감이 딴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

눈앞에 실제로 그 남자가 나타나자 아예 꼭지가 돌았다.

평소 자존감이 높고 스스로 잘났다고 자부해 왔지만, 남자는 누가 봐도 괜찮았다.

청소년 시기 때부터 암암리에 학교 폭력의 배후자로 살아온 홍문수였다.

그만큼 가진 것 없는 자들과 자존감 낮은 인간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장립이라는 자를 자극해 먼저 폭력을 행사하게 유도했다.

이곳은 엘자그룹 핵심 공간.

여차한 순간 경비원들을 부르고 그들이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큰 착각이었다.

“장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차기 엘자그룹 회장으로 낙점된 고광문 전무가 변수로 나타났다.

그가 장립을 먼저 보고 당황해하며 영어로 신변의 안전을 물었다.

“괜찮습니다.”

한국어로 대답하는 장립.

“한국어도 하실 줄 아십니까?”

“제가 언어에 강합니다.”

“대단하십니다.”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고광문.

‘설마 저 자식이 오늘 방문한다는 중요한 손님?’

홍문수는 짧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정신이 멍해졌다.

오늘 본사 직원들에게 은밀하고도 특별한 지시가 하달됐던 일을 떠올렸다.

중요한 손님이 방문 예정이니 전 직원들은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지시였다.

특히 회장실과 같은 층을 사용하고 있는 전략기획실과 비서팀은 따로 한 차례 더 지시가 하달됐다.

서유나 때문에 그걸 잠시 까맣게 잊어버렸던 홍문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광문은 최대한 지금 사건을 조용히 수습하고 싶었다.

몇 걸음 옮기는 중에 듣게 된 홍문수의 치졸하고 저급한 말들.

그간 본 적 없던 그의 태도와 언사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홍문수 대리는 고광문도 익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자였다.

전략기획실에서 중요한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인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회장 직계 라인이 아니란 점에서 거리를 두고 있던 터였다.

홍문수는 의견 차이를 보이는 반대편 임원진 라인 소속이었다.

그런 그가 여직원과의 일로 중요한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

한 가지 사실만 봐도 오바이트가 나올 정도로 엉망인 자가 분명했다.

이대로 가만두어서는 안 될 자였다.

- 회장님. 저 새끼 눈빛 모습시오. 완전 당황했는데요. 크크크.

귀신 장립이 객관적 시선으로 상황을 살피며 웃었다.

그러나 임성철 회장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서유나가 인간적으로 안타까웠다.

오늘 일로 그녀가 가장 큰 피해를 받을 게 분명했다. 결국 회사 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거대 조직일수록 사적인 일에 얽힌 소문은 빨리 돌았다.

홍문수와 고광문의 목소리 때문인지 직원들 몇몇이 복도에 나타났다 금방 사라졌다.

시야에서는 벗어났지만 가까운 곳에서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있을 게 뻔했다.

임성철 회장은 오정의 주인이었다.

전반적으로 회사 돌아가는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직원들 사이에 개인적인 일이 소문 나면 서유나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잘못된 선택 한 번으로 한창 창창한 인생을 저당 잡히고 말 그녀.

- 회장님 가시죠. 여기 일은 그냥 저 사람한테 맡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장립이 자리를 뜰 것을 종용했다.

임성철 회장의 내적 갈등을 알아챘다.

그럼에도 임성철 회장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장립이 선뜻 움직이지 않는 임성철 회장에게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심적으로 심하게 갈등하고 있는 임성철 회장의 마음을 그도 느낀 것이다.

자칫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는 판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하룻밤 인연에서 끝난다면 좋겠지만 이 일로 계속 인연이 이어진다면 말이 달라졌다.

“장 대표님?”

고광문이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임성철 회장을 불렀다.

임성철 회장의 시선은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서유나를 향해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인연의 끌림이 강하게 느껴졌다.

실재 임성철 회장은 죽어가고 있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제는 가족들도 어느 정도 포기한 죽음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장태산 덕분에 이렇게 싱싱한 육신을 뒤집어쓰고 버젓이 숨 쉬고 있지만 냉정하게 임성철 회장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머리가 복잡했다.

이대로 서유나를 외면한 채 떠나면 두 사람 다 불행해질 것만 같았다.

“잠시 이 여성분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네? 네…….”

‘홍 대리 말이…… 사실이었어?’

크게 떠들어 대던 홍문수의 말 속에 장립과 여직원 사이의 일이 담겨 있었다.

장립이 이렇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관계는 아니었던 게 확실했다.

“홍 대리. 따라와.”

평소와 달리 강압적인 말투로 지시를 내리는 고광문 전무.

그만큼 화가 나 있다는 증거였다.

만약 이 일로 장립이 엘자그룹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그 손해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벅저벅.

고광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홍문수.

그러면서도 힐끔 뒤를 돌아봤다.

‘저 두 연놈을 가만두지 않겠어!’

반성은커녕 입장이 우습게 된 것에 대한 분노만 더 끌어 올랐다.

오늘 일로 확고부동하게 보장된 듯했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홍문수는 악심을 품었다.

“…….”

복도에는 서유나와 임성철 회장 두 사람만 남았다.

- 하아아.

귀신이 허공에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장태산이 아닌 임성철 회장을 따라나섰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남녀 간의 문제.

지켜보고 있자니 남 일 같지 않았다.

정신없는 객귀처럼 떠돌고 있지만 장립도 미국에 생전에 사랑하던 여자를 두고 온 터였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도 잊을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

혼백이 된 지금도 장립은 그녀를 잊지 못했다.

저벅.

임성철 회장이 결심을 굳힌 듯 걸음을 옮겼다.

단지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이지만 침묵 속의 움직임은 무게감이 남달랐다.

스윽.

임성철 회장이 손수건을 건넸다.

“고, 마워요.”

서유나가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생각지 못한 장립이 눈앞에 나타났고 홍문수가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어차피 다 끝나 버렸다.

해명할 기회도 핑계를 댈 이유도 없이 이미 사무실에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어렵게 공부해 입사한 엘자그룹도 이제는 안녕이었다.

“불러 봐요.”

“네?”

“번호요.”

“…….”

서유나는 눈물을 닦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포차의 남자가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바쁜 거 아시죠?”

“네…….”

임성철 회장이 서유나의 손에 스마트폰을 건넸다.

띡띡.

귀신에 홀린 듯 서유나가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퇴근 후에 만나요. 그곳에서. 소주 한잔해요.”

정확하게 분절해 또박또박 귓속에 들려오는 그의 멘트.

“왜……요?”

서유나가 다소 놀라며 다시 물었다.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온답니다. 그 이유 하나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

“…….”

서유나의 텅 빈 마음속으로 쑥 파고드는 임성철 회장의 당당한 미소.

서유나는 그의 눈빛에 이끌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 최악의 상황에서 마주한 또 다른 새로운 인연.

서유나는 왠지 오늘의 일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

“장립이라고?”

“네. 전무님.”

“그자가 올 줄이야…….”

“아는 자입니까?”

“중국 쪽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자야. 새로 나타난 권력자.”

“아…….”

‘젠장. 빌어먹을!’

홍문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고광문으로부터 사무실에 대기하라는 명을 받았다.

큰 사달이 날 게 확실했다.

쪼로로 자신이 모시는 전무에게 달려갔다.

요즘 들어 그룹 임원들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고광문 전무에게 상당수 임원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 선봉에 선 고선태 전무.

현 회장이 사촌형이었다.

“아빠. 문수 씨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 아니에요? 큰아버지가 임원들 의견도 없이 그런 중요한 인사를 만나다니……. 이건 명백히 아빠를 비롯해 임원들을 무시하는 처사예요.”

홍보팀에 근무하는 고선태 전무의 딸 고지아가 홍문수를 편들기 위해 찾아왔다.

홍문수가 전무실에 들기 전 미리 SOS를 쳤다.

의도한 대로 고지아가 곧바로 달려와 줬다.

그녀는 지금 홍문수에게 푹 빠져 있었다.

홍문수의 머리는 아버지도 인정할 만큼 비상했다.

집안도 마음에 들었다.

대내외적으로 엘자는 대그룹에 들었지만 가끔 사적 관계가 공적 관계까지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배우자가 될 사람의 집안 재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넌 왜 올라왔어. 보는 눈도 많은데.”

“보라고 해요. 그런다고 아빠 딸이 아닌 게 되나?”

고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외동딸로 오냐오냐 어리광을 다 받아주며 키웠다.

이름도 모르는 지방대 국문과를 겨우 졸업했지만 특채로 홍보팀에 입사했다.

분명한 낙하산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고선태 전무는 엘자그룹 중요 주주 중 한 명이다.

“그건 그렇고 그 여직원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시끄러워? 오늘 무슨 일로 소란이 있었던 거야?”

소문은 이미 고선태 전무 귀에까지 들어가 있었다.

홍문수 대리가 전에 만났던 전 여자친구와 복도에서 한 차례 다툼이 있었다고 말이다.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려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나자고 어찌나 억지를 부리는지. 그 바람에 큰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장립이라는 자가 끼어들어 문제가 좀 커졌습니다.”

“서유나 그 계집에 내숭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얌전한 척하면서 완전 여우야.”

고지아가 표독한 눈빛을 빛내며 내깔렸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학벌과 미모가 특출했던 서유나.

입사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찍은 홍문수 대리와 사귄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를 갈았다.

외동딸답게 욕심이 많았다.

목표한 바를 쟁취해야 그날 밤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쯧쯧. 그러게 왜 사내 연애는 해서…….”

“아빠. 지금 우리 문수 씨 추궁하는 거예요? 지금 나와도 사내 연애 중인데 말이 돼요?”

고지아는 배운 게 없다 보니 버릇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선태가 끼고 돌아 예의를 배우지 못했다.

“안타까워서 그렇지.”

“힘 좀 실어줘 봐요. 광문 오빠가 이 사람 자를 것 같단 말이에요.”

“그건 걱정 마. 홍 대리가 내 사람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 누구를 잘라? 그건 명백한 도발이지.”

어느새 사건은 자존심 대결로 흐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는 고자룡 회장에게 경고를 던질 타이밍 됐다.

“아빠만 믿으면 되죠?”

“그래. 믿어.”

“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

고지아가 고선태 전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애교를 부렸다.

‘이걸로 고비 하나는 넘기고!’

고광문 전무가 나서도 고선태 전무가 커버를 치면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했다.

어차피 서유나와의 일은 사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복도에서 큰소리가 났지만 큰일로 번질 우려는 적었다.

문제는 장립이라는 자가 중간에 끼어있다는 것.

“회장님과 장립이라는 자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합니다. 재정 상태도 열악한데 자꾸 중국 쪽에 사업을 확장하는 건 좋은 사업 방향이 아닙니다. 전략기획실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주제 파악을 못 해서 그래. 조만간……. 주총 한번 열어야 할 것 같아.”

사내 정치 전문인 고선태 전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회장과의 마찰 점.

일차적으로 한 차례 반대파들이 패배의 잔을 마셨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무너트릴 구실은 많고 많았다.

아무리 고자룡이 직계에 회장직을 맡고 있다지만 보유한 주식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빠! 그럼 그때 우리 문수 씨 과장 다는 거예요?”

“더 이상의 실수만 없다면 그래야지.”

고선태도 홍문수가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는 여대 교수에 아버지는 현직 부장판사였다.

모자란 딸의 빈자리를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았다.

똑똑한 홍문수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매사 잘 알 터였다.

‘문제는…… 장립 뒤에 그놈이 있다는 건데.’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고자룡 회장과 손을 잡고 있는 그놈.

아주 무서운 자였다.

***

- 형님! 말이 됩니까? 비가 온다고 쪼로로 달려나가다니!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장립으로 변신한 임성철 회장은 엘자그룹 회장과 가볍게 안면을 트고 돌아왔다.

장태산은 사무실에서 엘자그룹 미팅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사이 장립 귀신이 엘자그룹에서 있었던 전말을 일러바쳤다.

“잘 알아서 하실 거야.”

- 형님은 회장님을 믿으세요?

어! 그것도 많이.

껌딱지 같은 장립 귀신에 대한 신뢰도와 사뭇 달랐다.

- 그러다 큰 코 다칩니다. 회장님 지금 사고 치고 계십니다. 제 모습을 하고 여자와 사랑이라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너도 질투냐?

실재하지 않는 육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네! 저 질투 쩝니다!

걱정은 됐다.

임성철 회장님이 늦바람이라도 난다면 그 후폭풍이 장난 아닐 것이다.

단지 남녀 간의 가벼운 만남 정도가 아닌 듯했다.

곧 죽어야 할 자와 긴 시간 살아가야 할 자의 운명이 교착점을 갖게 돼 버렸다.

지금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업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저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살 만큼 살았고 긴 삶을 경험한 진짜 어른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모든 일을 그르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창 나이의 여인의 삶이 안타까워 위로차 만나는 자리일 것이다.

나라도 그 상황이라면…….

- 맺지 말아야 할 인연으로 인한 업의 파편이 생성되었습니다.

“!!!”

그 순간 들려온 알림음.

- 업풍이 강하게 밀려옵니다. 대비하십시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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