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3장. 대부(3).
“아빠. 기회에요.”
“장태산을 어떻게 믿어? 이제 투자회사 대표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하아아아.”
오양식품 대표실.
요 몇 달 사이 지옥을 맛본 대표 아성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중견기업에서 규모를 더 키우고 싶은 욕망이 넘쳤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대기업 회장님 소리가 듣고 싶었다.
탄탄한 고정 소비자들을 바탕으로 착실하게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다른 기업들과 달리 무리하게 사세를 늘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하나둘씩 계열사를 늘리는 맛으로 성실하게 경영하는 오양식품.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탄탄하다는 소리를 제법 듣고 있었다.
그렇게 잘 운영해 오던 오양식품에 일이 터졌다.
선친이 작고한 뒤 아성대가 무리한 욕심을 부린 것.
한 수 아래였던 우뚝이까지 앞으로 치고 나오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나마 가족들 중에서 가장 학벌이 높은 아유라가 전면에 나섰다.
한국대 동문이라는 인맥을 적극 활용해 사업 확장에 가속도를 붙였다.
경영 컨설팅 명목으로 회사의 대부분 자료가 넘어갔다.
그리고 기대했던 평가가 내려졌다.
내친김에 곧바로 해외 사업이 추진됐다.
흑자를 내고 있던 기업이라 대출은 원하는 대로 잘 나왔다.
빠른 속도로 해외 지사들이 하나둘씩 세워졌다.
시작할 당시만 해도 물건 수주도 수월하게 잘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고가 연속 터졌다.
물건이 도착하면 수입업자들이 클레임을 걸기 일쑤.
이상하다 싶은 순간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깎여 내려간 기업 신용도.
은행 대출로 시작된 자금 운용은 2금융을 넘어 사채에까지 손을 내밀게 됐다.
그리고 현재는 내일 당장 회사가 부도 처리돼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어음 할인도 막혔다.
얼마 전부터는 오양식품 부도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업계 중심으로 돌았다.
사업을 꾸려오는 동안 나름 친분을 쌓았던 이들이 등을 돌렸다.
직원들도 동요했다.
컨설팅 투자회사가 사채업자와 함께 회사를 압박하고 있다.
10억에 회사를 팔지 않으면 부도를 내겠다며 노골적으로 회사를 빼앗으려는 자들.
“가업을 이대로 날릴 생각은 아니죠?”
아유라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자신의 지분까지 이미 담보로 잡혔다.
순진한 부모들은 꿍쳐 놓은 돈도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는 순간 하류 인생이 될 것이다.
평생 회사를 말아먹었다는 원망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건 기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사업이 망했다는 건 부유했던 가문과 윤택했던 삶이 끝나는 것과 같았다.
“유라야……. 장태산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냐? 그 잘나가는 투자회사 대표가.”
“제 친구에요.”
“네가 경쟁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때는 철없던 시절이었어요.”
“난 그래서 이해가 안 간다.”
“아빠. 태산이는 그런 나쁜 놈들과 질적으로 달라요. 그리고 회사 회생 후 적당한 지분을 달라고 했어요. 엔젤 투자자에요.”
“그러니까 그가 왜? 우리를 돕는다는 말을 하냐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성대는 투자자들에 대한 불신에 이미 마음이 닫혀있었다.
장태산 대표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먹으면 쓰러트리지 못한 그룹이나 기업들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장태산을 두려워했다.
그런 장태산이 오양식품 따위를 거들떠 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 마음을 돌려야 해.’
패배주의와 절망, 불신으로 팽배한 아빠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상황.
아유라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장태산과 잤어요.”
조용한 목소리가 대표실에 울렸다.
“뭐, 뭐라고?”
깜짝 놀라는 아성대.
다른 건 몰라도 딸은 이성 문제에서는 지금껏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관리가 철저한 구석이 많은 딸이었다.
그런 딸이 아빠 앞에서 뒤통수를 날렸다.
“집에 안 들어온 날, 그와 밤을 같이 보냈어요.”
아유라는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얘기의 끝을 봤다.
“유라야!!!”
“이유는 충분하죠? 그러니까 받아들여요. 장태산……은 책임이 뭔지 아는 진짜 남자에요.”
‘미안해. 태산아. 오늘은 널 팔아야겠다.’
도덕적으로 아무 흠결 없는 장태산이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절망스러운 아성대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못난 자신 때문에 딸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워하지 말아요. 태산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아유라는 진심을 고백했다.
처음 마주칠 때부터 호감이 갔던 장태산.
그가 마음에 박혀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구나.”
“할아버지는 이해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아빠도 힘내요. 우리 살아남아…… 이렇게 만든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줘요!”
세상의 매서운 맛을 뼈저리게 맛본 아유라.
학교 공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을 배웠다.
기업 경영의 시작과 끝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알게 됐다.
***
- 아씨! 가문에서 포인트를 쐈습니다.
아씨? 너 지금 나에게 욕한 거냐?
중요한 순간에 들려오는 상큼한 욕.
- …….
알림은 언제나 불리하면 대답하지 않았다.
이계 알파닥과 갈수록 성질이 비슷해졌다.
그건 그렇고 리차드 강 차사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중요한 문제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적 문제는 포인트로 해결이 됐다.
포인트는 개도 신으로 만들 수 있는 우주 머니였다.
- 속 터져 죽겠네! 빨리 좀 얘기해 봐요!
우리 장립, 성질 참 지랄이다.
잡귀 주제에 저승 차사들 앞에서도 이렇게 큰소리 뻥뻥쳤다.
갱 두목의 여자를 사랑했을 만큼 무모했던 장립이었으니 이해한다.
찌릿.
오 차사가 레이저를 발사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저러다 둘이 연분이라도 날까 내심 걱정된다.
저승사자와 잡귀의 엽기 로맨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 저 말 많은 잡귀 나에게 넘길 생각 없나?
강 차사가 넌지시 물어왔다.
“포인트 얹혀 드릴까요?”
- 그동안 의리도 있는데 그냥 분리수거하겠네.
- 혀, 형님! 차사님! 제가 잠시 제 처지를 망각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주둥이를 꽉 붙들고 있겠습니다!
오 차사에게는 큰소리치던 장립도 순찰 사자 앞에서는 꼬리를 말았다.
사실 나도 궁금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 말이다.
- 아저씨.
그때 승민이가 다가와 내 옆에서 옷자락을 잡았다.
영혼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전생에 장군이었다지만 지금 생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스윽.
그런 승민이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영혼이었지만 모든 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버리지 않으마.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승민이.
- 장 신선과 인연이 깊군. 그랬군……. 그랬어.
지그시 나와 승민이를 바라보던 강 차사는 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있습니까?”
- 그건 나도 밝힐 수 없네. 허락되지 않는 과거 생의 운명은 오늘처럼 각자가 풀어야 하는 법일세.
사실 승민이가 낯설지 않았다.
지리산 여우와 곰처럼 승민이도 나와 인연이 깊은 듯했다.
- 순찰사자님. 혹시 그 방법을 제시하려 하십니까?
- 그렇다.
- 특혜이옵니다!
오 차사가 다시 강한 어조로 나왔다.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내가 특혜를 받은 건 맞다.
하지만 그녀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오 차사! 나 질투해?”
훅 치고 들어갔다.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맞네! 질투! 이 쪼잔한 아줌마야.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감히 질투를 해!
그새를 못 참고 장립이 끼어들었다.
오 차사를 차갑게 쳐다보는 장립.
이럴 때 보면 이 자식 가끔 괜찮다.
- 아니거든! 나 그리고 아줌마 아냐!
- 왜 그래. 죽기 전에 아줌마였잖아. 참고로 난 진짜 총각.
장립이 오 차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자극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딱 둘 수준이 맞았다.
당장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려줘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 장 신선은 저 아이를 책임질 수 있나?
“책임요?”
살려 주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책임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 신동 보호 기간이라 오늘까지만 기억할 거네. 아마 자고 나면 지금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겠지.
강 차사가 승민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대충 상황은 이해가 갔다.
전생과 영혼계를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
열 살이 지나면 아이들은 신동으로서 발현되던 기억이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겁니까?”
내 질문에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 차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 전부 다.
“네? 전부 다요?”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대답이 나왔다.
- 죽었어야 할 인연이네. 오늘 내가 떠나도 언제든 다른 차사가 목숨을 거두러 올 걸세. 그걸 막기 위해서는 강한 인연 줄이 필요하지. 자네와 같은 강력한 신선 말일세.
쉬운 문제가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깊이 개입될 줄 몰랐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 아저씨…… 저 살 수 있는 거죠? 우리 아빠 엄마랑 같이 이번 생은 살 수 있는 거죠?
승민이가 눈물 가득한 시선으로 애절하게 바라봤다.
“하아.”
짧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타인의 인생을 전부 책임진다는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
오정 임성철 회장의 죽음을 대신해 내가 그의 업을 같이 나눠졌다.
승민이도 마찬가지.
- 저 아이가 일평생 사는 동안 짓는 모든 선업과 악업에 대해 장 신선이 책임진다고 하늘에 선포해야 하네. 그래야 강한 인연 줄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네.
- 아저씨! 저 착하게 살게요! 세상 살면서 절대 악업 짓지 않고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게요. 약속해요! 저 믿어주세요!
승민이가 진심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말했다.
믿고 싶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온전히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야 할 승민이의 인생.
그 풍파가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 진선님, 타인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아시죠? 자기 인생도 잘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 타인이라니요? 지금이라도 포기하세요, 그럼 모든 게 조용히 마무리 될 겁니다.
오 차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흐음…….”
다시 새어나오는 신음.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 아이의 인생.”
- 아!
- 이런!
- 역시!
- 아저씨!!!
각자 뱉어내는 탄성들이 연속 터졌다.
“전 겁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한두 명 인생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저 아이를 구하다 업을 짓게 된다면 그 또한 제 운명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나도 생각지 못했던 생을 살고 있었다.
단지 아빠 엄마랑 평범하게 한 생 살고 싶다는 아이의 소망을 무시하고 모른 척할 수 없다.
- 그 말로 계약은 성립됐네. 이제부터 저 아이는 장 신선의…….
- 대부가 되셨네요! 그것도 영혼의 대부! 캬아! 역시 우리 형님은 멋집니다!
장립이 엄지척을 내밀었다.
- 대부……. 그래요. 아저씨가 오늘부터 저의 대부입니다!
승민이가 활짝 웃었다.
맑은 하늘의 새하얀 구름 같은 미소였다.
그거면 됐다.
대부가 될 이유로 충분하고도 넘쳤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