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1장. 대부
“신이시여……. 당신을 믿지 않았던 제 과거를 참회합니다. 제발……. 제 아들 승민이가 세상을 좀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평소 어떤 신도 믿지 않았던 정민희가 두 손을 모으고 신을 부르짖었다.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간 지 벌써 7시간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말해 주는 이가 없었다.
‘수술 ON’이라고 밝혀진 불빛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무리 인생이 하룻밤 꿈같다지만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갑작스런 사고는 물론 상상하지 못했던 황승재와의 조우, 그리고 지금 승민이의 긴급수술까지.
눈물은 진작 말라 더 흐르지도 않았다.
더 이상 불길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천년 같기만 한 7시간.
망부석처럼 수술실 복도에 앉아 정민희는 열리지 않는 수술실 문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길어지는 시간에 오가는 이들도 없었다.
앞서 커피캔 하나를 전해준 간호사가 다녀간 게 전부였다.
그것도 먹지 못했다.
자식이 안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커피가 입에 들어갈 리 없었다.
“승재 씨, 누구보다 전 당신을 믿어요. 부디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이 순간만큼은 본 적 없는 신보다 더 믿고 싶고 기대고 싶은 게 아이 아빠 황승재였다.
정민희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나 힘을 주어 움켜쥐었는지 핏기가 가신 두 손은 그녀의 지금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때.
지이이잉.
평생 열릴 것 같지 않던 수술실 문이 열렸다.
“!!!”
정민희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벅저벅.
밖으로 의사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입을 굳게 닫은 채 말이 없었다.
피곤한 기색이 표정에 가득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들 수고했다.”
“아닙니다……. 그럼.”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들이 하나둘 멀어졌다.
“승재 씨…….”
다소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정민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민희야…….”
황승재는 슬픈 눈으로 정민희를 바라봤다.
“우리 승재는요?”
“미안하다……. 정말로.”
“아!”
황승재의 미안하다는 말에 정민희는 긴 신음을 흘리며 다시 무너져 내렸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긴급수술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하늘은 매정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와 연결된 유일한 끈이 끊어져 버렸다.
“너와…… 승민이…… 이제 두 사람만 두지 않을게.”
“네?”
정민희가 눈물을 거두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상한 말이었다.
“수술…… 잘됐다.”
“아!!!”
다시 터지는 탄성.
“급한 불은 껐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장기 쪽 손상은 거의 잡았다. 골절이야 천천히 잡으면 될 것 같고, 머리 쪽은 수술 경과를 본 뒤에 MRI 촬영을 할 거야.”
“승재 씨!!!”
정민희가 황승재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었다.
와락.
그리고 두 팔로 억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안겼지만 사랑했던 그의 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따듯했다.
토닥토닥.
황승재가 정민희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였다.
홀로 아이를 낳고 지금껏 키워 온 사랑했던 여인.
지난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원망하며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혼자만의 부끄러움은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으로 승화됐다.
“이제 나만 믿어. 너희 둘……. 내가 평생…… 사랑하며 살게.”
“흐으으윽.”
그쳤던 정민희의 눈물이 다시 환희의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황승재를 만나는 자리에서 아들에 들려주고 싶었고 자신도 꼭 듣고 싶었던 고백.
지금껏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왔던 10년의 시간을 모두 다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둬. 승민이 완벽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해.”
“네……. 당신만 믿을게요.”
“그래. 나만 믿어.”
사라락.
눈물에 젖은 정민희의 머리칼을 거두어 쓰다듬는 황승재.
‘내 아들은 내가 지킨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욕이 활활 넘쳤다.
긴장했던 것보다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
신께서 보호해 주신 듯 우려했던 것보다 장기 손상 범위가 작았다.
아직 어린아이이기에 골절된 뼈는 시간을 들여 고치면 충분히 회복 가능했다.
“사고를 당했다고 했지?”
“네?”
“가해자는 뭐라고 해?”
“그게……. 승민이를 치인 게……. 재수 없다며 보험회사하고 알아서 하라고…….”
“뭐라고?”
***
“교수님 실력 대단하지? 다 죽어가던 아이를 저렇게 살려내다니……. 존경심이 샘처럼 마르지 않는다.”
“네.”
“내가 우리 황 교수님 실력 때문에 어려운 길을 택했다. 주희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 과 죽이지?”
“네…….”
깊은 생각 없이 대충 대답했다.
자꾸 시선이 침상에 누운 아이에게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수술이 없었다.
평소 폴리클들이 수행하는 일을 수행했다.
배정받은 환자를 돌아보고 한 명 한 명 상태에 대한 경과 기록지를 작성하는 일이다.
같이 병실을 돌던 4년차 레지던트인 우남우가 침을 튀기며 황승재 교수를 칭찬했다.
외과 병동에 입원한 정승민이라는 아이.
생각보다 경과가 좋아 중환자실 바로 옆에 있는 1인실로 이동했다.
아직은 황승재 교수의 정식 아들 신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는 현재 엄마의 성을 따랐다.
“너에 대한 기대가 크다.”
우남우가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선배님의 많은 도움 바랄게요.”
상냥한 주희 버전으로 대답했다.
“그래. 넌 내가 확실히 밀어주마. 외과 레지던트 되면 넌 꽃길만 걷는 거야.”
극구 사양이다.
내 아리따운 동생을 피 튀기는 전장에 몰아넣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점은 당사자인 주희가 선택할 몫이기도 하니 최대한 주변 선배들에게 조심했다.
“감사합니다.”
“커피 마실래?”
“아니요. 승민이 상태 더 체크해 보고 싶어요.”
“좋은 자세다. 나도 그랬다. 처음 내 손으로 수술한 환자에게는 더 애착이 가더라. 첫사랑과 같다고나 할까?”
첫사랑?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우남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 그 무엇.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럼 수고해.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도 된다. 장주희 넌 내가 책임진다.”
우남우가 은근히 흑심을 드러냈다.
어디서 내 동생을!
“고맙습니다.”
“수고.”
우남우가 방에서 나갔다.
- 저 의사 형님 꿈이 야무집니다. 감히 저 얼굴로 주희를 노리다니!
장립이 나 대신 분노했다.
그런데 넌 왜 화를 내는데?
- 그거야. 주희가 여동생 같고 뭔가 전생에 인연도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전생 인연?
개뿔이나!
너도 좋은 말 할 때 꿈 깨라.
- 형님 세상 인연이라는 게 말입니다…….
닥치고.
오 차사 어디 갔어?
- 갑자기 일이 있다고 황급하게 사라졌습니다.
오 차사의 행적이 궁금했다.
이쪽 병원 담당인 그녀는 일이 없는 시간에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나타나 장립과 수다를 떨었다.
그럴 때마다 신과 죽음의 세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삶과 죽음이라는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 같은 개념이었다.
모두에게 해당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죽음의 산증인이 오 차사였다.
며칠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녀의 성향이 파악됐다.
직업병이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막상 인간 생사가 남기는 미련과 죽은 사람들의 스토리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한편으로 매정해 보였던 그 오 차사가 오늘은 이 자리에 없다.
대신 종류가 다른 불길함이 느껴졌다.
그 이유 때문에 병실을 비울 수가 없다.
내가 맡은 담당 기록 환자로 승민이가 결정돼 있어 다른 의심을 받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환자들의 예후 과정은 수시로 확인해야 하는 일이어서 도리어 간호사들이 고마워했다.
- 형님.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뭐가?
장립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 오 차사 말처럼 인과의 정해진 법칙에 형님이 깊숙이 개입해 버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장립이 은근히 걱정을 해 왔다.
장립과 나도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고 연결되어 있다.
내가 멀쩡하게 이생을 살아내야 장립은 신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와 장립의 관계와 달리 황승재 교수와 승민이는 엮인 인과의 무게부터가 달랐다.
- 오 차사가 속 깊은 얘기까지는 안 했지만 어제 정말 당황해했습니다. 형님을 바라보는 시선에 안타까움과 측은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게 생각나서 자꾸 찝찝합니다.
나도 그렇다.
마법을 튕겨내던 보이지 않는 인과 법칙.
그래서 더 고민이 됐다.
- 아저씨…….
응? 아저씨?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1인실에는 나밖에 없는 상태.
당황스러워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승민이가 말을 걸어왔다.
문제는 침상에 누워 있는 승민이가 아니라는 것.
나를 부른 이는 승민이의 영혼이었다.
- 얘 뭐죠? 지금 죽은 건가요?
장립도 승민이의 영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너 괜찮아?”
바이탈 신호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침상에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승민이는 잠을 자는 듯 고요했다.
- 아직 괜찮아요.
눈앞의 승민이는 정확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믿을 수 없는 괴사였다.
여러 추측이 머릿속에서 난무하게 오갔다.
“너 혹시…….”
- 잠시 나왔어요. 생일인 오늘까지 신동 보호기간이라 괜찮아요.
신동 보호기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 삼신할머니가 오늘까지는 괜찮다고 그러셨어요.
아직 나와는 인연이 없는 삼신할머니.
뭔지 모르지만 신들 세계가 굴러가는 법칙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나왔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 저…… 아저씨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요.
“부탁?”
승민이와는 어제 수술로 인연의 첫 연결고리를 맺었다.
수술 중 아이의 영혼이 황승재 교수의 손등을 덮는 걸 본 게 다였다.
그럼에도 승민의 영혼은 주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남자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 오늘이 제 생일인 거 모르시죠?
“생일이었어?”
알 턱이 없었다.
- 꼬맹아. 이 형아가 그 부탁 들어줄게. 사탕 사줘? 그것도 아니면…….
- 살려주세요!
- 응? 뭐라고?
- 아저씨! 저 살고 싶어요! 아빠하고 엄마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승민이의 갑작스러운 부탁.
그때.
스스스스스스슷.
인적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1인실로 몰려드는 묵직하고 어두운 시커먼 기운.
- 으아아아아! 혀, 형님!!!
회귀의 전설 2부
대부(2).
“작은아빠. 장주희 그대로 놔둘 거예요? 이건 명백한 불법 의료 행위에요. 폴리클이 수술 메인에 두 번이나 선다는 게 말이 돼요? 그러다 의료사고라도 생기면 외과 과장인 작은아빠가 모두 책임져야 하잖아요.”
“상주야. 연주 말대로 시끄러워지는 거 아니냐?”
“그게 참 애매합니다. 저도 깜짝 놀라 전체적으로 살폈는데…… 문제삼을 만한 게 없습니다. 혼외자가 교통사고로 거의 죽을 지경이었는데 놀랍게도 살려냈습니다. 응급실에서 포기할 정도였어요.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신상주 교수가 큰형의 집을 찾았다.
가족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황승재가 그만큼 컸을 줄이야…….’
황승재가 큰 수술을 집도하는 동안, 자신은 세력을 확장하고 기세를 자랑하기 위해 외과 의사들을 대동하고 학회 다녀온 터였다.
부회장 자리에서 차기 회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한국병원 부원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타이틀이 필요했다.
그 틈에 터진 황승재 아들의 교통사고와 이어진 긴급 수술.
긴급하게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몇 번을 확인해도 테이블데스 상황이 분명했다.
어떤 실력 있는 의사가 와도 되살려낼 수 없는 상황이라 다들 판단했다.
그런 응급 환자를 황승재가 기적처럼 살려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스텝들을 데리고 감행한 수술이었다.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지 보기 위해 꼼꼼히 의료 기록을 살폈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당장 마음만 먹으면 징계위에 회부할 수도 있었지만 병원 내 여론이 황승재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한국대 병원 내에서 황승재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은연중에 황승재와 과거 연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다시없을 순애보로 각색이 돼 있었다.
여론이 이러한데 괜히 건드려봐야 당시 현장에 없던 자신만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동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신연주는 그 어느 때보다 독기가 바짝 올랐다.
진작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왕따 장주희가 기사회생해 병원을 들쑤셨다.
친분을 쌓아두었던 조원들까지 장주희의 경고에 신연주를 멀리했다.
이제는 대놓고 슬슬 피하는 게 느껴질 정도다.
장주희가 당해야 할 왕따 신세를 자신이 당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아주 엿같은 기분을 제대로 맛봤다.
‘장주희, 널 반드시 이 바닥에서 쫓아내고 말 거야!’
신연주의 계획과 기대를 비웃듯 장주희는 잘나갔다.
황승재 교수 라인에 벌써 발을 들였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긴가민가하던 선배들도 장주희의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레지던트 초년 차도 들어가기 힘든 중대한 수술팀에 두 번이나 합류한 폴리클.
병원생활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한국대 병원에서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뭐라고 하는데?”
신상주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차기 외과 과장은 황승재라고……. 다들 확정적으로 말하던데요.”
“뭐라고?”
“작은아빠. 부원장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그 자리 오래 못 버티실 거예요.”
신연주 경고가 신상주의 가슴에 쓴소리가 되어 박혔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속이 상했다.
평소에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치부해 버린 채 하수로만 여겼는데 이번 수술로 달리 보게 됐다.
어떤 외과 의사도 선뜻 해내지 못할 기적 같은 수술이었다.
그 일로 대내외적인 병원 평가가 극도로 상승했다.
의료 기술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시점이긴 하지만 외과의 기본은 담당 의사의 수술 능력에 달렸다.
응급실에 있던 각과 레지던트들이 발 빠르게 소문을 물어 날랐다.
크게 눈에 띄는 큰 사건이 없었던 한국대 병원에서 대형 이슈거리가 터진 셈이다.
긍정적인 평판이 쌓이면 자연스레 윗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심장외과라는 특수한 과목도 한몫했다.
누구나 쉽게 습득할 수 없는 고난위도 외과 파트.
지속적인 평안과 반영구한 자리보전을 꿈꾸던 신상주와 많이 달랐다.
“연주야. 그만해.”
신태주가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나섰다.
요즘 들어 그도 찝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장태산이 오양식품과도 관련 있다니.’
팀장 홍영기의 보고를 받았다.
오양식품 현 사주 딸과 장태산 사이가 꽤 친분이 있다는 보고였다.
신태주의 촉은 예민했다.
인수합병 투자 전문 회사는 언제든 불법으로 엮일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합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뒤에 감춰진 암계와 정치 자금 등등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반드시 정치권 인사를 몇몇 끌어들여야 했다.
혼자 독식하려 했다가는 바로 이 바닥에서 퇴출되고 만다.
좁은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더 그랬다.
이익 마진률이 20%를 넘어서면 안 됐다.
문어발 다리처럼 정치, 언론, 법조계 등등 방패가 될 동업자들을 섭외하는 게 능력이었다.
아직까지는 큰 탈은 없지만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훼방꾼 장태산.
재수 없게 그놈의 여동생도 딸이 악연으로 얽혀있었다.
“연주 말이 틀린 건 아니죠. 당신이나 서방님이나 경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뭔지 모르지만 장씨 집안과 얽히는 게 기분 나빠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오미영이 한마디 하며 끼어들었다.
“조만간 뭔가 수를 내보겠습니다.”
“작은 아빠. 재수 없는 장주희와 엮다보면 황승재 교수도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사스런 눈빛을 보이는 신연주.
“도움 필요하면 말해라. 나도 거들어 주마.”
“알겠습니다.”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신상주.
‘황승재. 장주희. 너희들……. 확실히 보내주마!’
***
- 왔어요! 아저씨…….
- 형님…….
승민이와 장립의 영혼이 바짝 쫄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자의 등장.
사람은 아니었다.
병실 안으로 스산하게 몰려들어오는 이상한 기운은…….
- 나 기다렸어?
오 차사다.
그녀가 벽을 통과하며 나타났다.
배시시 웃음을 짓는 그녀.
- 야! 너 뭐야! 바짝 쫄았잖아!
장립이 오 차사임을 확인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 나 보고 싶었구나? 그런데 어쩌지. 오늘은 잡귀랑 놀아줄 시간이 없네.
- 왜? 사고 쳤어?
- 왜냐하면…….
스윽.
오 차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등장하는 블랙 슈트 차림의 덩치 좋은 남자.
스스스스슷.
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오 차사와 비교할 수 없는 무게의 묵직한 포스를 풍겼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영국 신사가 썼을 법한 검정색 중절모를 깊이 눌러써 눈까지 가렸다.
흡사 훈련소 조교 같은 분위기.
- 아저…….
- 꿀꺽.
가련한 영혼들은 등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었다.
보아하니 오 차사보다 상위 레벨의 등장이었다.
- 다들 대충 눈치 채셨겠지만 정식으로 소개드립니다. 여기 계시는 차사님은 저승사자계의 신화적인 인물로 지금껏 영혼 회수에 거의 실패한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 공로로 최근 순찰사자로 임명되어 영계 법칙을 어지럽히는 사태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오 차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소개 받은 차사가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무게를 잔뜩 잡고 있지만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
근육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저승사자와 너무 비슷해 보였다.
- 오 차사. 서론이 길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런 말을 듣겠나. 간단히 넘어가게.
- 넵! 순찰사자님!
오 차사의 군기가 바짝 들었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알아버린 상대의 정체.
- 진선님. 예의를 지켜 주십시오. 여기 계시는 순찰사자님은 최근에 엄청난 업적을 올리신 분입니다. 악신들의 후원을 받는 영혼들을 철저히 분리수거하신 공로로 거의 진선급에 맞먹는 카르마 포인트를…….
- 오 차사. 거기까지.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큼큼.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순찰사자.
씨익.
정체가 다시 확인되자 장난스런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강 차사님, 신수가 훤하십니다.”
- 응? 나를 알아……. 어! 자네는!!!
순찰사자가 깊게 눌러썼던 모자를 들어 올리며 나를 봤다.
짐작했던 대로 그분이었다.
- 수, 순찰사자님, 아시는 분이세요?
오 차사가 당황했다.
뭔가 일을 꾸미려다 들통이 나서 크게 당황한 분위기.
- 하하하. 반갑네. 여기서 다 만나는군.
리차드 강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잡았다.
열렬히 반가워했다.
나도 반갑다.
“승진하셨나 봅니다.”
- 모두 다 자네 덕분이네. 러시아 악마와 구광필 일당들을 처리하고, 통영에서 포인트 쫙 벌었지 않았나. 고과 점수가 꽉 차서 순찰사자가 됐네.
진짜 고마워하는 리차드 강의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그를 특별히 불러 포인트 착실하게 챙겨줬었다.
러시아의 운게른부터 구광필, 최도철까지.
악신이 후원하는 놈들 중심으로 제대로 털어 영혼을 인계했다.
그런 은혜를 모르면 진짜 개새끼다.
- 저기. 순찰사자님…….
- 오 차사. 내가 얘기했지. 여기 장태산 신선이 나 많이 도와줬어. 그래서 승진했으니까. 자네도 신경 써서 모셔. 그럼 좋은 일이 있을 거야.
- …….
나에 대한 칭찬에 오 차사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쌤통이다.
- 형님! 아시는 차사님이십니까? 볼 때부터 범상치 않다 느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산 형님의 오른팔…….
- 장 신선, 아는 잡귀인가?
리차드 강은 한때 고려의 대장군이었다.
잡귀의 알랑방귀쯤은 가볍게 묵살했다.
그 기세에 눌려 장립이 찍소리를 못 하고 뒤로 빠졌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이제는 본론을 확인할 때.
- 장 신선. 저 귀인의 소천을 방해한 게 자네인가?
리차드 강 차사가 승민의 영혼을 보고 물었다.
“네.”
거짓 없이 답했다.
- 이거…… 난처하군.
- 순찰사자님. 영계법을 비롯해 윤회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리차드 강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오 차사가 한 발 더 나섰다.
그녀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상황을 밝혀 처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맞았다.
- 가기 싫어요! 난 우리 아빠와 엄마랑 살 거예요! 1100년 만에 다시 만난 인연이란 말이에요! 그때도 어린 나이에 아빠와 엄마를 잃었어요. 오랑캐들의 칼에 맞아 죽은 부모님을 다시 만났는데 또 헤어지라는 건 너무 가혹한 벌이에요!
“!!!”
알 수 없었던 전생의 인연에 깜짝 놀랐다.
전생에도 부모 자식으로 인연이 닿았던 이들이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각자의 전생에 담긴 이야기들.
- 귀인이시여. 당신은 그 덕으로 국가를 지키는 장군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번 생이 아쉽다 말하지만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별은 아픈 법입니다. 영계의 법에 따라 이번 생은 여기서 마무리하십시오. 다음 생에는 반드시…….
- 됐다고요! 강 차사. 제 후배님도 되시는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전생에 못다 한 효도 이생에서 마무리 짓게 도와주십시오.
현생의 어린아이 영혼체이지만 아직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승민이.
리차드 강 순찰사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승민이가 리차드 강의 장군 선배였던 모양이다.
번뜩 좋은 생각이 스쳤다.
“제가 포인트 지불하죠. 얼마면 됩니까?”
이 세상이나 저세상이나 포인트로 안 되는 건 없었다.
엄연히 양쪽 세상에서 정식으로 통하는 카르마 포인트.
- 포인트 문제가 아니네.
“네? 그러면…….”
리차드 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 비틀어진 운명의 선을 매어둘 수 있는 강력한 새로운 인연법칙이 필요해.
“그게 뭡니까?”
뭔가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리차드 강이 나와 승민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 그건…….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