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5장. 구해줘(3).
“불?”
룸에서 술을 마시던 한 여당 의원이 불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꽤 잘나가는 2선 의원이다.
아직 3선 중진은 아니지만 대통령과 같은 지역 출신으로 여당과 청와대의 가교역할을 맡았다.
청와대가 원하는 바를 물불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입으로 털어대는 일을 했다.
검사장 출신이라 검찰과도 인연이 깊었다.
승진하고 싶은 정치검사들이 그의 밑으로 줄을 섰다.
민정수석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다.
여당 쪽 의원들도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지방 지역구가 수도권 못지않게 탄탄했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다선 의원이 될 게 확실했다.
조국일보를 비롯해 보수 일간지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대검찰청 재직 시절 이미 언론사와 연이 닿아 있었고 이슈가 될 만한 정보들을 수시로 넘겼다.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는 피의자 범죄 사실 사전 유출.
이런 식의 술자리에서 넌지시 떡밥을 뿌리면 그다음은 언론사에서 알아서 척척 작업을 했다.
탄탄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의 상부상조로 전직 대통령도 한 큐에 보냈다.
당시 그 사건 뒤에서 치밀한 공작을 벌였다.
대검중수부장이 죄를 뒤집어썼지만 진짜 몸통은 따로 있었다.
곽중섭 전 검사장이자 현직 의원.
중앙지검과 대검찰청 중요 보직 검사들과 함께 화끈한 시간을 즐겼다.
텐프로 여성들은 다른 직업여성들처럼 함부로 터치할 수 없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누리고 있는 권력을 믿고 마음껏 주무르며 질퍽하게 놀았다.
룸으로 들어오기 직전 마담에게 별도의 주의를 받은 접대 여성들은 알아서 속으로 화를 삭이며 시중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 모두가 마음만 먹는다면 거짓말처럼 내일의 삶을 앗아가 버릴 권력자들이었다.
분명 법을 제정하고 수호하는 현직의원과 고위 검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짓은 버려진 개만도 못했다.
한두 번 이런 꼴을 보는 게 아니어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동종 업계 종사자들은 물론 종업원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두고 정치검사들을 똥 묻은 개새끼라고 불렀다.
“노래 정지해!”
시끄럽게 떠들던 노래방 기기가 일시에 멈췄다.
때르르르르르르르르릉.
그때서야 선명하게 들리는 비상 벨소리.
“뭐야? 진짜 불이라도 난 거야?”
“헙!”
방안에 뒤섞여 있던 남녀 모두가 크게 놀랐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으며 얼어붙었다.
“문 열어!”
검사 시절 화재 참사 현장을 수시로 검증했던 검사들이었다.
화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기에 비상 벨 소리에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더욱이 이곳은 지하 룸.
터더더덕.
문 쪽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검사가 화급하게 문을 밀었다.
바깥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구조였다.
덜컹!
살짝 열리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문.
때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문틈이 살짝 열리자 요란한 소리가 더 거칠게 귀를 파고들었다.
“마, 막혔습니다!”
“뭐라고? 야! 빨리 밀어!”
타다다닥.
그 말에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문을 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문 앞에 쓰러져 있던 덩치 큰 남자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빨리 안 비켜!!!”
곽중섭이 문틈을 내다보며 잡아먹을 듯 악을 썼다.
똥줄이 바짝바짝 탔다.
여기서 불에 타 죽으면 지금껏 일궈 놓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
게다가 이곳은 텐프로 룸살롱.
죽어서도 명예가 곤두박질치고 남은 식솔들도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문이 안 열려!!!”
“야! 빨리 비켜 새끼야!!!”
“아악! 잡아당기지 마! 죽여 버린다 개새끼야!”
다른 룸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지 못해 안에서 난리가 났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지하 공간은 아비규환이 됐다.
방금 전까지 형 동생 하던 이들이 멱살을 잡고 서로 먼저 문밖으로 나가기 위해 야수로 돌변했다.
“놔! 내가 먼저 나갈 거야!”
“비켜 나 국회의원이야!”
“니미 X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오빠! 나 먼저 나갈 거야!”
“저리 꺼져! 이년아!”
“아아악!”
우당탕탕.
공포가 부른 패닉은 순식간에 갑과 을의 서열을 무력화시켰다.
방금 전까지 의원님 검사님 하던 놈들과 웃음을 팔던 여인들이 서로를 잡아당기고 밀치며 난리를 쳤다.
말로만 듣던 아비규환.
그 와중에도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누가 장난한 거야! 빨리 꺼!”
“어떤 새끼야!”
“비켜 돼지들아!”
뒤늦게 나타난 다른 조직원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화재 경보 버튼을 해제했다.
각 룸의 문을 막고 누워 있던 조직원들이 치워지고 경고음이 조용해졌다.
타다다닥.
다급하게 문밖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화재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불길이나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누가 장난으로 누른 것 같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업장 관리자가 쏟아져 나온 사람들을 향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장난?”
“이런 미친!”
옷이 찢기고 머리가 헝클어진 남녀들은 허탈한 표정이 됐다.
안에서 얼마나 서로를 당기고 밀치며 소란을 피웠는지 안 봐도 훤했다.
저열한 인간 본성을 낱낱이 드러냈다.
서로를 다시 보기가 민망한 순간.
“다시 완벽하게 세팅해서…….”
“닥쳐!”
“에이 썅!”
“이런 엿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내가 다시는 여기 오나 봐라!”
“이 새끼들 정신머리하고는…….”
문밖으로 나왔던 이들 대부분이 얼굴을 붉히며 욕을 내뱉었다.
어렵게 쌓아올린 각자의 정치적 이미지가 단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장태산……. 또 너냐?”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 밖으로 나온 손대균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복도 바닥에서 빌빌거리고 있는 조직원들.
단 몇 분 만에 평온했던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장태산의 막장질에 할 말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건드리는 순간 아주 개박살 내버리는 장태산.
신태주를 방어해야 하는 입장인 손대균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내로라하는 그룹들도 가차 없이 박살을 내버리는 무모한 장태산을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들이 들었다.
그게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한 일송회의 회주라 해도 예외일 수 없었다.
***
-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정말 형님은…… 인생을 주인공처럼 살아가는군요.
아유라를 안고 지하 계단을 올라왔다.
“에이! 재수 없으려니까.”
“의원님, 조금 전 실수는…….”
“됐어! 너희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조 비서 차 대기시켜!”
“의원님, 정문에 경찰이 있습니다. 다른 손님들처럼 후문으로 가십시오.”
“경찰은 왜?”
“신고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일단의 남자들이 계단을 오르다 말고 뒤로 다시 들어갔다.
내가 벌인 장난에 호되게 당한 모습들이다.
더 이상 앞을 막는 놈들은 없었다.
2014년 판 보디가드를 찍고 있었다.
늦은 밤에 예기치 않은 장소에 불려갔다가 아유라를 구하게 될지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저 자식입니다!”
“유 상무님. 저 남자 맞습니까?”
“네. 오 경위님. 확실합니다!”
사라진 유 상무가 날 보며 손가락질했다.
그 옆에 서 있는 배가 툭 튀어나온 오 경위라는 경찰관과 앳되어 보이는 여자 순경.
- 제가 말씀드렸던 그 경찰들입니다. 남자 경찰은 인상이 더럽네요.
귀신이 인상이 더럽다고 말할 만큼 오 경위라는 자는 풍기는 기운이 썩 좋지 않았다.
제복이 아니었다면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인상이 험상궂었다.
게다가 눈빛도 탁했다.
“거기 멈추세요!”
나를 향해 강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뚝.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고 오 경위를 바라봤다.
“당신이 강간죄 신고하셨어요?”
말투가 처음부터 삐딱했다.
“네. 제가 신고했습니다.”
“왜요?”
“네?”
“폼을 보아하니 아가씨가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왜 신고하셨냐고요. 그냥 조용히 데리고 좋은 곳으로 가면 될 텐데.”
“…….”
하도 어이가 없어 오 경위를 빤히 쳐다봤다.
좋은 곳?
말하는 뉘앙스가 꽤 거슬렸다.
시민의 지팡이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직접 마주한 강남 경찰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합니까? 약물에 취한 피해자 안 보여요?”
“증거 있어요? 누가 저 아가씨 강간하려고 했습니까? 동영상 있어요? 유 상무님, 신고 내역이 사실입니까?”
다다다 오 경위가 멋대로 떠들어 대며 몰아붙였다.
동시에 유 상무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제대로 된 막장이었다.
“에이. 오 경위님 아시지 않습니다. 우리 가게는 아주 클린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약물에 의한 강간이라니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유 상무가 손사래까지 치며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대신 두 눈은 나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당당하게 스마트폰을 내밀어 신고하라고 했던 그 여유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
주변 공권력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리고 그 여자분 누군지 알아요? 혹시 본인이 약 먹인 거 아니에요?”
뭐라고? 내가?
- 오오오! 이 경찰 패기가 지립니다. 형님한테 지금 뒤집어씌우는 거 맞죠?
오 경위의 행태에 귀신도 놀라 탄성을 터트렸다.
“이 순경, 여자분 깨워봐. 술 냄새 나는지 확인해 보고.”
오 경위의 하는 짓을 낱낱이 지켜봤다.
“그리고 아저씨 신분증 내놔 봐요. 이 순경 뭐 해! 빨리! 지금 한가한 시간 아냐!”
“네? 네!”
이 순경이라는 여자 경찰이 선배 지시를 받고 다가왔다.
딱 봐도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짜인 듯 꽤 긴장하고 있었다.
스윽.
파라다이스 가게 옆에 있는 벤치에 아유라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우드득.
그리고 가볍게 목을 풀었다.
좋은 말로 할 시간이 이미 지났다.
“어디 소속입니까.”
차갑고 냉정하게 물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오 경위가 아직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했다.
“정당한 공무집행에 대한 권한을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민원인이 물을 때 소속과 관등성명은 통보해 줌이 경찰관 직무규칙에 포함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죠? 이 순경님?”
“네? 네…….”
“다시 묻겠습니다. 소속과 관등성명 부탁드립니다.”
과하지 않을 만큼 정중하게 나갔다.
어느새 주변으로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강남대로 옆이라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고가는 이들이 꽤 있었다.
“당신이 뭔데 확인이야! 제복 안 보여? 이거 공무집행 방해 행위야!”
오 경위가 발끈하며 큰소리를 쳤다.
전형적인 꼰대 경찰의 모습이다.
“저기 누워 있는 강간상해죄 피해자의 변호인입니다. 여기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변호사요?”
오 경위는 명함을 받아들고 곁눈질로 유 상무를 힐긋 째려봤다.
주고받는 사인이 아주 웃겼다.
“가짜 아니……죠?”
오 경위의 말투가 살짝 변했다.
막장 경찰이라고 해도 변호사 앞이라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법률 전문가가 꼬투리를 잡으면 오 경위 같은 경찰 하나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어떻게 확인해 드리면 될까……. 서장님 정도는 약한 것 같은데. 서울지방경찰청장? 그것도 아니면 다이렉트로 경찰청장님에게 확인시켜 드려요?”
“!!!”
오 경위의 안색이 확 변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안 듯했다.
“못 믿겠죠? 그럼 직접 확인해 드리죠.”
이럴 때 사용하려고 삼우로펌을 키운 거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리앤장보다 끗발은 떨어졌지만 지방경찰청장 정도는 새벽에라도 직통 연락이 가능했다.
“변호사님. 왜 그러십니까. 절차상 확인 차 그런 거 아닙니까. 노여움 푸시고 사건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오 경위는 눈치가 빨랐다.
바로 치켜들었던 꼬리를 말았다.
“선배님. 술 냄새가 없어요. 병원으로 옮겨 약물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눈치 없는 이 순경이 아유라 상태를 제대로 확인했다.
“그럴 리 없어요! 갑자기 이 사람들이 생사람을 잡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유 상무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한밤중의 소란.
“뭐야? 큰 사건이야?”
“몰라. 강간 사건이라던데?”
“그런데 경찰들 뭐 해?”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며 웅성거렸다.
스마트폰을 꺼내드는 이들도 보였다.
스으윽.
어깨가 찢어진 슈트를 벗어 아유라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그때.
부우우우우우우웅.
끼이이이이이익.
거칠게 달려오는 썬팅 진한 봉고차 두 대가 바로 앞에 도로가에 멈춰 섰다.
그르르르륵.
빠르게 열리는 문.
우르르르.
일단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마치 쓰레기를 쏟아내는 듯했다.
“뭐야! 구경났어? 남의 영업장 망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빨리 가던 길 가쇼.”
한덩치 하는 쓰레기들은 봉고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에 몰린 사람들을 협박했다.
“가, 가자…….”
“깡패들이야.”
겁먹은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나며 멀어졌다.
그리고 아주 반가워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장태산 씨. 여기서 뵙네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