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1장. 질문과 답. (931/1,284)

941장. 질문과 답.

“으윽……. 나 더 이상은 힘들다. 우욱.”

조윤태가 목구멍을 역류해 넘어오려는 술을 다시 입을 틀어막아 삼키며 인상을 썼다.

무지막지한 술자리였다.

폭탄주가 쉼 없이 연거푸 돌았다.

학교와 연수원, 로펌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간간이 정치 문제가 언급됐지만 대부분 신변잡기 문제로 말을 나눴다.

여성 종업원도 없는 자리여서 세 사람 사이에 술잔이 빠르게 돌았다.

장태산은 조윤태와 손대균에 비해 두 배는 더 술을 마셨지만 어디 한 곳 흐트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왜 이렇게 세?’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윤태는 애써 정신을 붙들었다.

그냥 술도 아니고 폭탄주를 빠른 속도로 마셔대다 보니 취기도 그만큼 빨리 올라왔다.

검사 시절부터 배워왔던 정신력과 깡으로도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눈앞의 사물이 두 개로 보일 만큼 만취 상태가 됐다.

반면 장태산은 이제 술자리를 시작한 사람처럼 말짱했다.

손대균도 나름 애써 버티고 있었다.

“이사님 한 잔 더 마실 수 있겠습니까?”

장태산이 웃으며 또 술을 권했다.

“날 죽여……. 죽여!”

조윤태가 더는 마시지 못하겠다는 듯 치를 떨었다.

이런 무식한 술자리는 검사 재직 시절에나 몇 차례 벌어졌던 일이다.

선배들이 후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먼저 취하면 본인들 구두에 술을 채워 마시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꼭지까지 돈 뒤에도 오바이트를 하면 다시 처음처럼 마셔야 했다.

조폭과 다를 바 없었던 검찰 음주 문화.

그 과정 중에 스폰이 붙고 성희롱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요즘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잘못 대물림된 문화는 아직도 그 뿌리가 건재했다.

범죄자들을 상대하면서 암암리에 범죄자들의 기운에 함께 오염됐다.

여검사들이 속속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성적 문제가 불거졌다.

검사로서 자존심이 쎈 여검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위에서는 그런 사건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고 무마시켰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검사 내부의 일은 밖으로 속속 흘러나갔고 그에 대한 국민 여론이 실시간으로 증폭됐다.

아직 세상 변한 걸 모르는 몇몇 후배들이 검사 놀이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판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각자가 헌법기관인 판사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깊게 퍼져 있다.

하지만 검사집단은 생리적으로 답이 없었다.

그런 검사 시절에 겪었던 술자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벌어졌다.

장태산이 작정하고 판을 벌였다.

‘설마?’

취기가 만땅인 와중에도 조윤태는 장태산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 속을 꿰뚫은 듯 자신을 향해 씩 웃는 장태산.

“!!!”

맞았다.

허락 없이 자리를 만든 것에 대한 벌이었다.

장태산의 뒤끝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사님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이래서 큰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장태산의 음성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부르르.

일순간 한기가 돌며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도망쳐야 해!’

조윤태는 속으로 오늘 잘못하다가는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서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 무시로~ 무시로~♫.

그때 기적처럼 조윤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평소라면 못 들은 척했을 이름이 화면에 보였다.

“여보!”

조윤태는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 어디에요?

아내의 까칠하고 피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접대 중이야.”

- 접대요? 누구를요?

평소에도 아내와의 통화에서 시시콜콜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으레 상대에 대해 물어오는 아내.

“장태산 회장하고 손대균 이사.”

- 그래요? 중요한 자리네요. 그럼 더 있다가 천천히…….

“바로 갈게! 지금 갈 거야! 사랑해!”

띠릭.

대답을 더 듣지도 않고 조윤태는 통화를 끝내 버렸다.

그리고.

“후배님들 나 먼저 갑니다. 집사람이 요즘 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야단이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흔들리는 몸을 일으키며 조윤태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연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정신을 꽉 붙들었다.

하늘이 주신 탈출 기회였다.

“그래요? 그럼 가셔야죠. 집안의 평화를 위한 길인데.”

장태산이 뭘 알기라도 하는 듯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다시 너와 술을 마시면 조윤태가 아니라 개윤태다!’

조윤태는 장태산의 눈을 보며 치를 떨었다.

“손 이사. 나 먼저 간다.”

“선배님 이렇게 배신을 때리시면…….”

혀가 살짝 꼬인 손대균이 조윤태를 붙들었다.

“그건 나중에 갚아줄게. 나 간다!”

조윤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틈에도 눈에 보이는 전투의 흔적.

탁자 위에 쌓여 있는 고급 양주 빈 병이 다섯 개가 넘었다.

폭탄주 제조용 맥주병도 수십 병이 쌓여 있었다.

치사량에 가까웠다.

‘장태산……. 독한 놈!’

조윤태도 사실 오늘 자리를 만든 목적이 있었다.

손대균과의 관계 회복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로펌을 확장하기 위해서 장태산에게 거액의 투자금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당분간 조심해야 할 분위기다.

‘그런데…… 두 사람만 놔둬도 될까?’

뭔지 모르지만 술자리임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지됐다.

문을 닫고 룸에서 멀어지는 동안에도 안에서 느껴지는 진한 감정의 기운.

‘나도 모르겠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조윤태는 정신을 붙들며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이를 먹다보니 저절로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빡빡하게 살지 않고 대충 세월 따라 흘러가도 인생은 생각보다 잘만 굴러갔다.

***

또로로록.

맥주잔에 양주를 채웠다.

‘발’씨 가문의 오래된 역사의 값나가는 비싼 양주다.

꿀꺽.

단숨에 잔을 배워냈다.

손대균과 단 둘이 남았다.

예상했던 대로 어색함이 밑밥처럼 깔렸다.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색이 다른 이질감이 존재했다.

손대균은 다른 말이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

조윤태 이사가 빠진 직후부터 침묵이 깔렸다.

서로 간에 유쾌할 수만은 없었다.

손대균 가문과 장씨 집안은 원수와 같은 상황.

과거라면 바로 칼을 뽑아들고 서로 죽이겠다고 달려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관계였다.

- 형님! 죽입니다! 세상에……. 미녀들이 얼마나 잘 노는 줄 아십니까? 아오! 탁자 위에 지폐 다발이 수북하게 깔리고 그 위에서 막 옷을……. 어? 이 어색한 분위기는 뭡니까?

다른 룸에 원정을 다녀온 귀신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떠들다 깜짝 놀랐다.

수시로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상황 보고를 하던 귀신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손대균 이사와 나 사이에 흘렀다.

“신태주 칠 거냐?”

먼저 침묵을 깨고 손대균이 물었다.

“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리 스페셜 고객이다.”

“고객을 잃겠군요.”

“여전히 자신만만하구나.”

“그게 제가 가진 힘입니다.”

주고받는 대화는 누가 봐도 사무적이었다.

불과 얼마 전처럼 서로가 협력하고 웃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특히 오늘은 그럴 분위기도 아니다.

손대균의 눈빛이 돌연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눈빛이 이렇지 않았다.

아픔과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눈에 반짝이는 빛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몹시 무겁고 침중했다.

눈빛이 변했다는 건 성정이 변했다는 의미였다.

이런 손대균과 허심탄회하게 속 얘기를 터놓고 대화할 수는 없었다.

“쉽지 않을 거다.”

“다칠 겁니다.”

“반대는 생각 안 해?”

“전 패배를 모릅니다.”

파바바밧.

만만치 않은 기와 기가 부딪쳤다.

리앤장의 스페셜 고객이라면 물주라는 의미다.

장한수 실장에게 들었던 것처럼 고위 권력층들이 신태주의 뒷배인 게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 쓸어버려야 할 쓰레기 더미들이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분리수거를 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동생 일 하나로 사건을 확장시키지 마. 신태주는 회에서 관리하는 인물이다.”

일송회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말.

어쩐지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기분이 꽤 나빴다.

“잘됐네요.”

“장태산!!!”

손대균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 뭡니까? 형님 선배라는 분……. 지금 한판 하자는 겁니까?

귀신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변했다.

손대균이 드러내는 적개심이 그만큼 대단했다.

“네.”

“너 그러면 안 돼!”

“뭐가 말입니까?”

“진짜 위험해질 수 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은 더 강해! 그걸 왜 못 참아!”

“먼저 제 가족을 건드렸습니다.”

“우연히 만들어낸 실수야. 신태주 딸이 알고도 그랬겠어? 이건 단순히 사회생활 하다 보면 겪게 될…….”

“악연입니다.”

“뭐라고?”

“전생부터 예정된 악연이 발현됐을 뿐입니다. 그러니 싹을 제거해야죠. 더 커져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정리해 주는 게 제 일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인과와 권선징악의 관계를 설명한다 해도 이 자리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내 생각은 언제나 단순했다.

선하게 살고 있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위해를 가한 자들은 악인으로 명명하고 징벌을 가할 뿐이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힘과 인연법이 엄연히 존재했다.

“내가 신태주에게 말해 보마. 딸에게 사과하라고 할 테니까 이번 일은 이쯤에서 끝내.”

“권고입니까? 충고입니까?”

“둘 다.”

“싫습니다.”

대화는 계획되지 않은 방향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넌 이기적인 놈이다.”

손대균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와 엮여서 겪게 된 뜨거운 맛에 대한 총평이나 진배없었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이기적으로.”

나쁜 의미는 아니다.

성자가 아닌 이상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최선을 다할 거다.”

“건투를 빕니다.”

“농담 아니야.”

“리앤장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마.”

벌컥.

대답과 함께 들고 있던 잔을 마저 비우는 손대균.

술자리는 파장 분위기를 맞고 있었다.

신태주와 신연주 집안일로 나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더 이상 주고받을 대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일송회와 썩어빠진 권력자들의 돈벌이 수단인 신태주를 박살내는 일에 열의가 치솟았다.

좀 더 성의 있게 조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은 이만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손대균은 말이 없었다.

또로록.

다시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애써 참는 게 보였다.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을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정 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스르르릇.

버튼을 누르자 룸의 두툼한 문이 열렸다.

그때.

“어떻게 할 거냐?”

막 나가려는 등 뒤에서 들려온 주어가 생략된 물음.

“뭘 말입니까?”

등을 돌리지 않고 선 채 물었다.

“유리…….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잖아!”

“!!!”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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