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장. 각자의 술잔.
또로로록.
밤이 깊어가는 강남.
길가 포차에 한 남자가 앉아 소주를 마셨다.
투두두둑.
갑자기 내리는 비에 운치를 더했다.
탁자 위에 놓인 안주는 어묵탕이 전부.
초라한 술자리였지만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큰 키에 우수에 젖은 눈동자는 우산을 들고 지나가는 여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누가 봐도 눈길이 가는 훈남이다.
주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여인들이 곁눈질로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무리 물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강남이라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스타일의 남자였다.
가볍게 걸친 옷들과 시계 같은 소소한 액세서리 모두 딱 봐도 명품이었다.
허세를 부리기 위한 치장이 아니었다.
여인들을 홀리려는 날라리나 양아치가 아닌 진짜 남자 냄새가 났다.
고독하고 우수에 젖은 남자의 술잔은 연거푸 몇 차례 더 비워졌다.
취하지도 않는 듯 벌써 몇 병째 소주병이 세워지고 있었지만 자세는 처음 그대로 꼿꼿했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벗 삼아 술을 털어 넣었다.
몇 년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기라도 한 듯 남자는 극도로 외로워 보였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장립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임성철 회장.
방금 헤어진 아들을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나름 아버지로서 많이 가르쳤다 자부해 왔지만 전혀 아니었다.
아쉬움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장태산에게 어렵게 부탁해 마련한 자리였다.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누군지 직접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 아들에게 자주 했던 말을 돌려서 전하는 게 고작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임준형.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전달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것만 봐도 과거보다 많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실히 한계가 보였다.
자신이 던진 화두에 어리석은 답을 내놨다.
“뒤로 물러서면 보인다더니……. 안타깝구나.”
임성철 회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녀가 한데 뒤섞인 테이블이 대부분이다.
모두들 술이 적당히 올라 ‘호호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모두가 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임성철 회장이 소유한 부에는 결코 비교될 수 없었지만, 저들이 갖고 있는 젊음과 미래가 그들의 최대 자산임을 너무 잘 알았다.
과거 자신도 몰랐고 현재 아들도 놓치고 있는 부분들.
죽음의 골짜기에 발을 담궈본 임성철 회장은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의 삶이 떠올랐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됐었다.
그 마음이 절실해진 만큼 짧은 생을 보람차게 살기를 바랐지만 아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일견 그럴싸하게 들렸지만 분명 틀렸다.
길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젊은 장립의 육신을 쓰고 경험해 본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가 아니었다.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그 어떤 법칙이 존재했다.
그룹을 경영한다는 미명하에 딸린 식속들을 다 챙기던 시절은 지나갔다.
기업의 나아갈 방향과 본질, 독창적인 문화가 분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자본주의 총아라는 미국식은 표본이 될 수 없다.
대한민국 특유의 의식과 문화가 결합된 방식만이 오정이 살 길이었다.
그 말을 꼭 해주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아들과 자신은 오늘 처음 대면하는 사이였고 또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마음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뒤바뀐 육신이 만들어 낸 아들과 아버지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뒤에는 임준형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때는 더 이상 말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임성철.
꿀꺽.
짧고 굵게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로 나섰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한때는 대한민국 경제계를 다스리는 재왕으로 군림했지만 이제는 포차에 홀로 앉아 소주를 마시는 외로운 한 남자일 뿐이었다.
장태산은 따로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귀신도 장태산을 따라갔다.
누구도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없는 신세.
제대로 몰려오는 고독.
“저기요.”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
임성철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
청바지와 스프라이트 셔츠가 시원하게 잘 어울리는 묘령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
살짝 비에 젖은 긴 머리칼.
아름다웠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아담한 스타일이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저요?”
“네.”
“저를 아십니까?”
“아니요.”
“그런데…….”
임성철 회장 인생에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합석해도 될까요?”
“네???”
“그쪽도 차인 거 같은데 아닌가요?”
“…….”
임성철 회장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아들에게 차인 건 맞다.
털썩.
양해를 다 구했다고 여겼는지 여자가 앞에 앉았다.
“저도 차였어요. 아니 찼어요. 나쁜놈……. 어떻게 내 친구와 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수 있죠? 남자는 원래 다 그래요? 그게 가능해요?”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여자가 다다다 입을 열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그건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각자의 성향 문제라 생각합니다.”
고지식한 임성철 회장다운 답변.
“그렇죠? 남자라고 다 발정난 개 같을 수는 없겠죠.”
스윽.
말과 함께 여자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한 잔 줘요. 그쪽처럼 용감하게 혼자 술 마실 자신이 없네요.”
독특한 아가씨의 말에 임성철 회장이 병을 들었다.
뭔지 모르지만 아가씨의 돌발 행동이 위안이 되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말이 확인시켜 주는 인생의 맛.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진짜 인생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다.
“술값 걱정은 말아요. 더치페이할 테니까.”
여자는 당당했다.
또로록.
잔이 채워졌다.
“이것도 인연인데 건배하죠.”
“그러죠.”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가까운 곳에 직장을 다니고 있는 어엿한 사회인이에요. 꽃뱀 같은 거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수처럼 보이지만 백수 아닙니다.”
“크크. 잘생기고 분위기 있는 백수는 환영이에요. 제가 보기보다 능력이 좋아요.”
여자는 유쾌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수지만 먹고살 돈은 있습니다.”
“정말요? 말로만 듣던 갓물주?”
오정이 아직 임성철 회장 거다.
감춰놓은 비자금은 건물주와 비교 요건 자체가 될 수 없었다.
“왜 관심 있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남자가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잖아요. 돈이 넘치는 인성 쓰레기들이 문제인 거지.”
“한때 저도 그랬습니다.”
“정말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지금은 새사람 됐습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양다리만 아니면 돼요. 그건 남녀를 떠나 정말 개 쓰레기 같은 짓 같아요.”
씁쓸한 여인의 독백.
“마시죠. 그러다 보면 내일의 해가 뜨지 않을까요?”
“해 뜰 때까지 마시자는 거죠? 좋아요!”
여자가 활짝 웃었다.
빗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같은 그녀.
임성철 회장의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아들은 아직 모르는 인생의 진짜 맛.
‘준형아……. 뜨거운 맛을 보거라. 그래야 깨달을 수 있다.’
임성철 회장은 아픈 마음을 애써 떨쳐냈다.
임준형이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해도 그 뒤에는 한 녀석이 버티고 있다.
임성철 회장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장립이라고 합니다.”
“립? 외자예요? 뭔가 분위기 있어요.”
“그쪽은?”
“강아람.”
“좋은 이름입니다.”
“그쵸? 와아! 우리 뭔가 통하는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
팅.
두 사람의 소주잔이 부딪쳤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마시는 청춘남녀의 우연한 술자리.
따뜻하고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에서 모락모락 피어났다.
***
‘이거 내가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조윤태는 장태산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그의 허락 없이 동석할 손님을 초대했다.
엄밀히 말하면 상대 쪽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셈이다.
장태산과 함께할 수 있게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손대균의 부탁.
세 사람 모두 한국대와 연수원 선후배 관계다.
과거보다는 학연이 많이 약해졌지만 아주 연관이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알게 모르게 학연으로 처리되는 법조계 일이 상당했다.
장태산과 손대균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손대균의 부친 손국중 회장 사건 이후부터다.
그 일에 장태산이 연관되어 있었다.
장태산의 위치가 과거와 많이 달라진 만큼 리앤장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손대균이 다시 리앤장에 합류한 만큼 장태산과 관련된 일에 있어 다른 형태로 완벽을 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쌓아 올린 리앤장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삼우 로펌이 장태산 덕분에 이 만큼 성장한 건 분명했지만 냉정하게 리앤장에는 한참 못 미쳤다.
더욱이 삼우는 불법적인 일에서 손을 거의 다 뗐다.
본래 돈 되는 일은 모두 불법을 합법으로 만드는 작업에 있었다.
실력 있는 변호사들일수록 삼우의 일을 꺼렸다.
승소해도 떨어지는 성과급이 작았다.
적법한 일은 보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돈을 벌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장태산이 뒤에서 도움을 주고 있지만, 전관예우로 한판 땡기려는 자들의 욕망을 다 채워줄 수도 없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조윤태는 손대균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술이 한잔하고 싶었던 순간에 두 사람에게서 각각 연락이 왔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상황.
그럼에도 장태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장태산의 가진 바 힘을 잘 알고 있는 입장.
조윤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장태산은 거대한 산이었다.
개인을 두고 보면 지금 막 룸에 들어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손대균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태산아 미안하다. 내가 부를 때 대균이도 같이 연락이 와서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먼저 부탁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들과 같이 마시면 좋죠.”
장태산은 쿨하게 이 자리를 받아들였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아주 괴물이야.’
조윤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장태산은 감투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진짜 회장이 됐다.
“오 마담에게 전화로 에이스들 부탁했는데…… 선배 부를까요?”
손대균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태산이는 어때?”
“셋이서 그냥 마시죠. 보아하니 손 선배님이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장태산이 거절했다.
대충 예상은 했다.
어차피 장태산 주변에는 이곳 에이스들보다 아름답고 대단한 여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조윤태도 접대 때문에 간간이 이용했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들의 욕망을 먹거리로 삼는 이들이 화류계 여인들이었다.
“그럼 거하게 술 한 잔 말아보자!”
가장 연장자인 조윤태가 분위기를 띄웠다.
여전히 장태산의 눈치를 살피며.
“선배님들 폭탄주 제조는 저에게 맡기시고 정신 꽉 붙들어 매십시오! 오늘 끝까지 달리는 겁니다!”
“콜!”
“나도 콜!”
손대균도 활짝 웃으며 분위기를 탔다.
“그럼 갑니다!”
뻥!
시원하게 뚜껑이 열리는 맥주.
치이이잇.
장태산이 빈 잔에 맥주를 기가 막히게 시원한 소리를 연출하며 채웠다.
거기에 양주가 더해지고 휙휙 잔이 돌았다.
“오! 후배님, 이건 또 어디서 배웠어?”
접대 자리에서 각종 기예를 경험했던 조윤태와 손대균도 처음 보는 신기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술이 큰 잔 안에서 한차례 회오리치며 돌았지만 한 방울도 컵 밖으로 튀지 않았다.
맥주 거품조차 흘러넘치지 않는다.
어떤 힘에 의한 듯 컵 안에서만 회오리치는 양주와 맥주.
“첫잔은…… 아시죠?”
“마시고 죽자!”
“죽자!!!”
신이 난 세 남자.
시원하게 한 모금에 폭탄주를 들이켰다.
각자의 시선에 다른 의미의 눈빛을 차갑게 담은 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