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8장. 본질.
‘장립!’
임준형은 깜짝 놀랐다.
그가 누군지 오정의 정보력을 통해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베이다이허를 뒤집었다는 중국 정치권의 새로운 실세였다.
국내는 물론 각국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유럽 화교인 것과 미국에서 수학한 젊은 청년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웃는 얼굴로 임준형을 만나겠다고 나타났다.
‘왜?’
놀랍기도 했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장립과 한 번이라도 연이 닿기 위해 줄을 선 자들이 꽤나 많았다.
중국 공산당 고위층과 꽌시를 맺었다는 장립은 세계 유수 기업들을 경영하는 오너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인맥이 될 수 있었다.
갈수록 중국 시장에 진입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수출 중심에서 서서히 내수 시장으로 방향을 틀며 탈바꿈 중인 중국.
15억 인구의 국내 소비력은 마력 그 자체였다.
오정과 연대를 비롯해 한국의 대기업들도 모두 중국 내수 시장을 노리고 투자했다.
한 번 대박이 나면 안정적 수익을 내는 데 그만한 시장이 없었다.
문제는 과거의 중국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
중국 정부는 물론 인민들의 눈높이가 달라졌다.
다른 선진국과 차별하는 순간 도리어 타깃이 되어 한순간 망해 넘어질 수 있었다.
특히 오정의 스마트폰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애국심과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토종 기업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도저히 그들이 푸는 물량과 가격 단가를 맞출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알게 모르게 자국 기업에 지원되는 중국 정부의 지원금도 엄청 났다.
야금야금 선점해 두었던 시장을 중국 내 기업에 빼앗기고 있었다.
규모면에서 경제를 실현한 중국 기업들이 해외 시장까지 발을 뻗었다.
과거 오정이 전자 시장을 점령하던 방식대로 저가 시장을 공략한 후 고급 시장까지 진출했다.
뼈가 아팠다.
반도체를 빼앗기 위해 중국 정부는 혈안이 됐다.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수성할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적과의 현명한 동침뿐이다.
이곳저곳 꽌시를 이용해 접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막혔다.
대한민국 오정그룹의 부회장인 자신도 가볍게 무시하는 중국 고위 공산당원들이었다.
한때는 서로 모셔 가려 온갖 수를 썼지만 지금에 와서는 덩치가 커지자 본색을 드러냈다.
절대 중국과 일본을 믿지 말라던 조부의 유훈을 임준형은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해지고 있는 중국 시장을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었다.
계륵과 같은 중국 시장.
사업 확장을 위해서는 막강한 인맥이 절실히 필요했다.
눈앞에 제 발로 찾아온 장립 정도 되는 인맥.
무슨 기연인지 그가 거짓말처럼 한국 땅을 밟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찾아왔다.
원자바오의 사위인 류평 총재의 소개였다.
“늦은 밤에 갑자기 자리를 마련한 게 반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임준형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손에 힘을 줘 의지를 표명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갑작스러운 기회가 찾아왔다.
최근 들어 그룹을 현장 경영하다 보니 거목 같았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잦았다.
사소한 결정 하나로 여러 라인의 사업에 파장이 미쳤다.
그 안에 딸려 있는 직원들의 실력과 그들의 미래까지 연관됐다.
신경이 바짝 예민해졌다.
대범한 성격은 아닌 탓에 은연중 몰려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다행입니다.”
장립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나이가 한참 어린데 이 눈빛은 뭐지?’
그와 눈을 맞추며 임준형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분명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인데 풍기는 기운은 마치 노련한 사업가를 마주한 듯했다.
장립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졌다.
“늦은 시간이라 식사는 하셨을 것 같고…… 술 한잔할까요?”
장립이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술이 생각나던 참이었습니다.”
임준형도 흔쾌히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느낌이 좋았다.
장립 역시 자신에 대한 호감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감지했다.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술은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최고급 양주부터 꼬냑과 와인, 맥주까지 빠진 주종이 없었다.
오늘 프라이빗룸에 배정된 바텐더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가는 자리일수록 종종 그랬다.
“스카치 위스키로 마시죠.”
장립이 주종을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접대 자리였다.
임준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30년산 블루를 꺼내 들었다.
일반인들은 평소 접하기 힘든 30년산.
오정의 부회장 신분으로서 접대하는 자리이니만큼 최고급 위스키를 집어들었다.
“오늘은 21년산 블루라벨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장립이 임준형을 지켜보고 있다 확실하게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나이도 젊은 친구가 술맛까지 아는 거야? 아니면 나에 관해 정보를 수집?’
임준형은 다른 기업인들 같지 않게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술이 생각 날 때면 21년산 블루라벨로 골라 마셨다.
왠지 모르지만 그것만 정감이 갔다.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장립이 정확하게 임준형의 취향을 찍어냈다.
드르륵.
스치는 의문 속에 병을 개방했다.
순간 코를 파고드는 향긋한 주향.
갓 따낸 신선한 과일과 벌꿀, 셰리 향이 부드럽게 맡아졌다.
임준형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언더로 드시겠습니까?”
“스트레이트가 좋습니다.”
‘이것도 내 취향과 같네.’
임준형은 얼음을 섞은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 잔을 마시더라도 본래 맛을 느끼는 게 좋았다.
“거친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방에서 태어난 녀석과 파도에 인내의 세월을 보낸 섬에서 제조된 몰트가 만나 탄생한 녀석입니다. 마스터 블렌더의 손길에서 탄생한 진정한 명작이죠. 과하지도 않고 모자람도 없는 중용의 맛이라고나 할까요?”
“!!!”
스카치 위스키에 대해 박식한 장립의 말이 임준형의 귀에 쏙쏙 파고들었다.
특히 ‘중용의 맛’이라는 말은 탁월한 어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말씀…….’
임성철 회장과 가끔 대작할 때 넌지시 던지고는 했던 말이었다.
술은 ‘중용의 맛’이 넘치는 녀석이 좋다는 말을 곧잘 덧붙이셨다.
또 기업가는 사람들을 잘 다스려야 화를 면한다는 말을 꼭 잊지 않고 경고하셨다.
오정에는 여타 기업들에 비해 인재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서 상중하가 나뉘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적절히 품고 가야 기업이 생동감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너무 뛰어난 녀석들은 가끔 주인을 물기도 하기에, 충성으로 부족함을 메꾸는 인재들을 섞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의미였다.
“의미가 깊은 말 같습니다. 제 아버님께서도 종종 중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이 말씀은 은사님이 강조하셨던 교훈입니다.”
“좋은 말들은 어디서든 통하는 법인 것 같습니다.”
임준형은 겸허하게 우연이라 받아들였다.
“건배하시죠.”
먼저 임준형이 건배를 권했다.
장립이 류평의 추천으로 찾아왔다고 밝혔지만 아직은 정확한 의도를 모르는 상황.
오정의 후계자로서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연을 위하여.”
잔은 부딪치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스트레이트 잔을 들어 보이며 건배했다.
꿀꺽.
단숨에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알코올 도수 43%짜리 위스키가 목젖을 타고 짜릿하게 넘어갔다.
“크읍.”
참으려 했지만 목젖을 훑으며 타고 내려가는 강렬한 맛과 주향에 임준형은 작은 신음을 뱉었다.
그에 반해 가볍게 목넘김을 하는 장립.
독주를 즐겨 마시는 중국인답게 별 반응이 없었다.
“맛있군요.”
또로록.
안주도 먹지 않고 바 위에 놓인 병을 다시 잡는 장립.
자연스럽게 빈 잔을 다시 채웠다.
‘뭐지?’
임준형은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술자리라 생각했다.
“한 잔 더?”
“주십시오.”
임준형도 잔을 내밀었다.
말없이 술이 채워졌다.
“궁금하시죠? 갑자기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가?”
“그렇습니다. 보통 약속은 최소 며칠 전에 잡는 게 예의니까요.”
임준형은 매일매일이 정신없이 바빴다.
하루에도 계열사 임원들 보고가 몇 차례나 올라왔다.
국가 기관 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VIP가 크고 작은 국가 행사에 임준형을 시시때때로 초청했다.
막상 참석하면 들러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지만 거절하지 않고 따랐다.
얼굴을 보이고 말 몇 마디라도 던져놓으면 뒤가 편했다.
여성 대통령의 심중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제는 웃는 얼굴로 칭찬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 고위 공무원들을 달달 볶는다는 후문이 여러 번 돌았다.
파밧.
두 사람 사이에 가볍게 불꽃이 튀었다.
남자들만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주도권 싸움이었다.
임준형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정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는 국부와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오정 전자였다.
오정이 무너지면 대한민국 산업 전체가 타격을 입고 나락으로 떨어질 정도다.
“……좋은 눈빛이군요.”
장립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지금 나를 테스트한 거야?’
임준형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이는 막내 여동생과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 장립.
“뭐죠?”
임준형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진출해야 하는 중국 시장도 중요했지만 이런 상황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전 사람의 눈빛을 믿는 편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가 온전히 지금 눈빛에 담겨 있다는 걸 아십니까?”
‘또!’
이 또한 임성철 회장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경영자로서 인재를 채용하거나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때 최종 선택은 눈빛으로 판단하라고 늘 말했다.
처음 마주한 장립은 마치 아버지 임성철 회장처럼 말했다.
아버지와는 연배도 다르고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이다.
또 아버지 임성철 회장은 지금 장태산과 같이 있다.
언론에 가끔 노출시키는 인물은 합성으로 작업한 거짓 자료이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의문은 계속해서 증폭되고 있지만 막상 누구도 감히 확인하려 들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와 두 번씩이나 같은 말을 내뱉은 장립.
임준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전 합격입니까?”
“물론입니다.”
“다행이군요.”
임준형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는 가운데에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다만…….”
그때 장립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임준형은 상대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부회장님은 기업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이런 자리는 은밀한 계약 내용이 오고 감이 상식이었다.
중국인들이 본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임준형이 바쁜 것 정도는 알 만했다.
넌지시 찾아온 목적과 계획에 대해 대략적인 언질이 오고 가야 함에도 전혀 상관없는 ‘기업의 본질’을 언급했다.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최근 들어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상당한 친분이 형성돼 있습니다. 그걸 이용한다면 오정이 처한 문제들은 가볍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신용이 담보로 잡히는 만큼 상대에 대해 여러모로 체크해야 하는 부분은 필수입니다.”
장립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내용을 듣고 임준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누가 갑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의사 표현이었다.
“충고해 주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영어로 대화가 오고 갔지만 두 사람 모두 막힘이 없었다.
글로벌한 경영자로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임성철 회장이 공을 들인 부분이기도 했다.
“오정이 추구하는 기업이념은 무엇입니까?”
미국 기업이라면 당연한 이익의 극대화였을 것이다.
또 독일이나 유럽 선진국들의 기업들은 사회적 가치가 핵심이다.
하지만 오정은…….
“심오한 질문입니다.”
‘사업보국’이 아버지 임성철 회장과 선대의 변함없는 가치였다.
그러나 임준형이 생각하는 가치는 그게 아니었다.
아직은 느낌이 확 오지 않았다.
초격차를 통한 라이벌 회사들을 견제하고 기업을 지켜냄이 현재 임준형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명확하지가 않군요.”
장립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변했다.
뭔가 실망한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속내가 뭐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분위기로 보아 모르는 누가 보면 이 자리는 기업 리더를 위한 맨투맨 강의인 줄 알 정도다.
천하의 오정그룹 황태자를 불러다 놓고 기업이념을 물을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동업의 길을 가는 데 중요한 문제입니까?”
임준형은 장립의 질문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장립의 태도는 어딘가 달랐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치와 이념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법인격을 부여받은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확한 목표 의식이 없다면 항해 중에 나침판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 오정이 그렇다는 겁니까?”
임준형은 장립이 한 말의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장립은 돌려 말하고 있지만 오정의 문제를 짚고 있었다.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는 천년이 되어도 그 곡조를 간직한다고 했습니다. 매화는 일생 동안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으며, 달은 천 번을 기울어져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길가의 버드나무도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를 돋우어 냅니다. 그런데 오정은 어떻습니까?”
쿵!
임준형은 심장이 철렁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숨이 턱 막힐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애써 답을 찾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맥이 잡히지 않은 탓이다.
그럴 때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느라 계열사 사장도 고급 인재라는 비서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홀로 외로운 대그룹의 총수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아직 다 전수받지 못한 보이지 않는 노하우가 절실했다.
그런데 지금 홀연히 나타난 장립이 그 핵심을 짚었다.
그냥 넘길 수 있는 조언이 아니었다.
“본질은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이나 기업이나 성장을 멈추고 후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오정의…… 기업이념은 무엇입니까?”
다시 이어지는 물음.
벌컥.
임준형은 숨을 고르며 벌컥 술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장립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임준형.
“우리 오정의 본질은…….”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