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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장. 수술실에서(5). (922/1,284)

932장. 수술실에서(5).

“으아아아아아아!”

갑자기 피가 튀자 고승윤이 비명을 질렀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참아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실패했다.

초고조에 달한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황승재 교수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름 효과도 있었다.

질문에 답변하다보면 긴장이 많이 해소됐다.

하지만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피에 대한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수술 중에 가운과 얼굴에 피가 튀기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특히 동맥 관련한 수술에서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수술에 투입된 고승윤은 레지던트임에도 피를 극도로 무서워했다.

의과대학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입학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대부분이 현재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외과 전문의.

분당에 대형 병원도 운영 중에 있다.

문제는 고승윤이 피에 대해서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

남들은 공포스러워하는 해부학은 오히려 괜찮았다.

하지만 인간의 뜨거운 피를 마주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인턴 과정에 접어들어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던 중 깨닫게 된 트라우마.

고쳐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정신과 상담도 받았다.

이후 가족들에게 외과는 절대 갈 수 없다고 고백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실망이 대단했다.

피를 무서워하는 의사는 의사도 아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차차 나아질 거라며 결국 강제로 외과 레지던트 시험을 치르게 했다.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고승윤은 어른들의 뜻을 따랐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우욱!”

진한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빨리 꺼져! 개XX야!”

평소에 자상하기만 하던 우남우의 호통이 터졌다.

수술실에서 토할 수는 없었다.

수술실이 오염되면 문제는 더 커졌다.

타다닥.

도망치듯 급히 걸음을 옮기는 고승윤.

스르릇.

두꺼운 수술실 문이 열렸다.

“우웩!”

수술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새벽에 먹었던 라면 건더기를 폭포수처럼 뿜었다.

“크으으으으.”

고승윤은 입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짐승처럼 신음을 뱉으며 눈물을 흘렸다.

죽고 싶은 생각이 엄습했다.

의사고시에 합격했고 정식 의사가 분명했지만 현실은 어린애처럼 피를 무서워했다.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지장이 없지만 수술방에만 들어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피가 튀기라도 하면 지금처럼 혼이 나갔다.

벌써 몇 번째.

오늘은 대형 사고를 친 셈이다.

앞으로 수술실 출입이 아예 금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 수술 집도의의 정신을 흐트러뜨려 일이라도 벌어지면 의료사고로 이어졌다.

“엄마……. 엄마.”

고승윤은 난데없이 엄마를 찾았다.

오래 전에 죽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같이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 조수석에 동승했던 고승윤.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끝까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

기억에서 지워보려 수없이 애썼지만 이런 순간에 직면할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머릿속을 꽉 채웠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뜨겁고 진한 피 냄새.

“저…… 이제 자신 없어요. 엄마…….”

고승윤은 누구보다 진짜 의사가 되고 싶었다.

가끔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엄마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기억 속에 각인된 붉은 피의 기억이 무서웠지만 매번 용기를 냈다.

엄마와 같은 위중한 환자를 멋지게 살려내는 게 평생소원이 됐다.

하지만 목적지와 다른 끝에 다다랐다.

희망과 용기만으로 만용을 부리기에는 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크게 작용했다.

주루루룩.

또 다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

털썩.

고승윤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술실에서 벌어질 참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긴급하게 다른 의사를 투입한다 해도 그때까진 시간이 지체될 것이다.

베테랑 간호사가 보조를 한다 해도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니었다.

써드 위치였지만 중요한 순간이었다.

손 하나가 빠지면 상황은 급격히 나빠질 게 빤했다.

심장이 그 모습을 다 드러낸 상황이었다.

추출한 동맥이나 정맥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나빠진다.

더군다나 동맥에 이식하려는 중요한 순간.

당장 달려 들어가 실수를 만회해야지만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크으으으윽.”

토사물이 가득한 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고승윤.

모든 걸 포기해 버린 모습이었다.

***

‘미친 새끼!’

황승재는 당황했다.

그나마 심외막 고정기를 장착했다지만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도관 삽입시 튀었던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필 고승윤에게 가장 많은 양의 핏물이 쏟아졌다.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비명을 지르며 팀 라인을 이탈해 버린 고승윤.

그가 잡고 있던 견인기가 사라지자 개흉 부위가 닫히며 전혀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다.

고정기가 위태로웠다.

핏물이 튀면서 심장 부근도 오염됐다.

그 상황에서 구토까지 하려던 고승윤을 당장 쫒아냈다.

정신이 아득해진 순간이었다.

그때 퍼뜩 떠오른 장주희.

급히 그녀를 호출해 고승윤 자리를 채웠다.

띳띳!

바이탈 위험 신호가 급격하게 울렸다.

“혈압이 떨어집니다! Vasopressor 투입합니다!”

마취과 의사가 바로 긴급 조치에 들어갔다.

동맥이 잡히지 않자 바로 혈압이 떨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심장 동맥이다.

잠깐이라도 피가 돌지 않으면 허혈성 괴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커졌다.

치이잇.

그 틈에도 연신 피가 솟구쳤다.

나름 준비하고 있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터진 사건이었다.

황승재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당황한 상태.

아무리 노련한 의사도 이런 상황을 마주할 경우의 수는 많지 않았다.

타닥.

그때 누군가 곁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스윽.

자연스럽게 써드 자리에 서서 견인기를 잡아 당겼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강약 조절이 완벽했다.

너무 약하거나 강하면 아니 도와준 것만도 못 한 게 견인기였다.

“모스키토 겸자 주세요.”

이어 들려오는 장주희의 침착한 목소리.

“네? 네!”

수술 조력 간호사가 황승재 교수에게 모스키토 겸자를 건넸다.

우선 동맥을 지혈시켜야 했다.

“!!!”

정신을 차린 황승재는 바로 겸자를 이용해 동맥 지혈을 시도했다.

손은 눈보다 빨랐다.

경험이 위기를 돌파하는 키가 됐다.

‘오케이!’

동맥이 바로 잡혔다.

“잡았습니다!”

세컨에 서 있던 우남우가 소리쳤다.

“혈압 잡혔습니다!”

바로 마취과 의사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한시름을 놓았다.

“혈액 1팩 투입합니다.”

수술실의 선장은 마취과 의사였다.

집도의가 키를 잡고 있지만 전체적인 조율은 마취과 의사에 의해 조율됐다.

띠이 띠이.

바이탈이 안정적으로 잡히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렸다.

“바로 연결 가실 거죠?”

“어? 그, 그래야지.”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집도의보다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폴리클.

“…….”

마취과 의사부터 시작해 모두들 놀란 눈으로 장주희를 힐끔거렸다.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일이고, 연출될 수 없는 없는 의료 현장이었다.

인턴도 아니고 본과 실습생이 관상동맥 우회술 써드 자리에 서는 일.

오늘 수술이 끝나면 적어도 큰 파란이 일 게 분명했다.

한국대 병원 역사상 처음 벌어지는 대사건.

“슈니트.”

어느새 수술실은 평온을 되찾았다.

황승재 교수의 말에 바로 전달되는 도구들.

사각 사각.

동맥은 부드럽게 연결이 됐고 바이탈은 안정이 됐고 수술은 무사히 마무리돼 갔다.

‘장주희……. 도대체 얘는 뭐야?’

모두의 의문 속에 장주희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똑똑히 박혔다.

***

-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승사자 오난향이 울먹였다.

난처한 표정이 가득하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우리 황 선생님이야. 마지막까지 깔끔한 것 보소.”

“주 선생도 수고했어.”

“흐흐. 그럼 끝나고 소주?”

“봐서.”

“오케이! 긴급 없으면 오늘 한잔하는 거야.”

친한 사이인 주상규와 황승재는 술 약속을 잡았다.

“장주희 수고했다.”

“아니에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황승재 교수가 날 보며 진심어린 칭찬을 날렸다.

“진짜 병아리 맞아요? 제가 보기에는 어지간한 레지던트 샘들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우 샘도 그렇게 생각하죠?”

도구를 정리하며 수술실 간호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수술은 완벽하게 끝났다.

환자의 누런 기름 덩어리기 낀 것 같은 관상동맥은 싱싱한 동맥과 정맥으로 대체됐다.

앞으로 관리만 잘한다면 10년 이상 끄떡없이 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럴 겁니다.”

레지던트 우남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가 아니라 그런 거다. 인정할 건 해야지. 주희 덕분에 수술이 편했다. 손발 수십 번 맞춰본 것처럼 말이야.”

“선생님은 못 보셨죠?”

“뭘 말인가요?”

“장 병아리 샘이 선생님 손보다 먼저 움직였다는 걸요?”

“네?”

“자리만 바꿔 바로 수술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데……. 주희 샘 아닌가요?”

간호사가 날 샘이라 호칭했다.

여자의 눈은 무서웠다.

머릿속에 저장된 외과 의사는 황승재 교수보다 더 실력이 좋았다.

간호사 말대로 황승재 교수보다 먼저 다음 파트로 넘어갔다.

그래서 수술이 더 완벽하게 진행됐다.

모든 걸 알고 지배하는 외과의에게 이 정도 수술은 일도 아니다.

내가 집도했다면 10분 정도 더 일찍 수술이 끝났을 것이다.

“아니에요. 제가 뭘 아나요.”

겸손을 떨었다.

사실 마법을 펼쳤다면 이런 건 수술 축에도 끼지 못했다.

환자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년 남자.

회사 일로 스트레스에 찌들고 운동 대신 매일 야식을 즐기다 심장과 온 몸뚱이에 누런 기름이 꼈다.

한의학에서 지방은 곧 염증을 의미했다.

혈액과 함께 움직이는 기의 순환을 방해하고 결국에는 심장병, 각종 뇌질환 및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대충 훑어본 환자의 평소 생활습관과 근육 하나 없는 지방덩어리 몸이 모든 걸 증명했다.

이런 환자는 강제로 효소 디톡스를 시키고 운동 병행, 침과 뜸으로 한 달만 다스리면 모든 병이 사라진다.

아직 퇴행성관절염 같은 뼈와 관련된 병은 오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그것도 귀찮으면 이계 귀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수 마시고 성수 샤워를 하면 싹 병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입장이 입장인 만큼 섣불리 내가 나설 수 없었다.

앞으로 주희가 살아가야 할 삶이었다.

- 진선님! 대답 좀 해 주세요! 이건 분명한 월권이에요!

오난향 차사가 강하게 나왔다.

그녀 심정도 이해가 갔다.

저승사자의 일은 영혼을 거둬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미션은 실패했다.

- 허어! 미스 오! 형님께서 하신 일에 일개 차사 따위가 그렇게 심하게 반발하면 쓰나?

- 닥쳐! 잡귀야!

- 자, 잡귀! 이렇게 건실한 귀신에게 또 잡귀라니!

- 잘됐다. 저 영혼 대신 너라도 데리고 가야겠다!

- 허억!

좋은 생각이다.

천도재 지낼 것도 없이 공짜로 잡귀를 떼어 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오 차사, 그 의견에 강력히 동의하네!

- 형님!!!

- 농담 아니에요. 진선님, 자꾸 인간 일에 개입하시면 안 됩니다. 하늘이 정한 인과에 의해 수명이 정해지는 겁니다. 진선님께서 강하신 줄 알지만 이렇게 나오시면 윗선에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오난향이 윗선을 들먹였다.

상관없다.

어차피 난 특채 신선으로 예약 된 몸이다.

그리고 한 번 죽었던 몸이기도 하다.

카르마 포인트 법칙을 알고 있는 나에게 이런 가벼운 협박은 먹히지 않는다.

오 차사.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 네. 진선님.

까!

단 한마디를 던졌다.

- 까요? 뭘 까요?

내 포인트.

- 아!

- 명부 개입 비용으로 포인트가 지불 됐습니다.

- 업장이 사라졌습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리고.

- 이씨 조상들이 후손의 목숨 연장 비용으로 듬뿍 포인트를 지불했습니다.

- 차감하고도 포인트가 훌쩍 남습니다.

흐흐흐.

난 손해나는 장사 안 한다.

수술대 위의 환자가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건 수술하면서 알았다.

그의 피 냄새에서 맡아졌던 고단함.

자식들을 양육하기 위해 진액을 다 바쳐 살아온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비록 지방이 많이 꼈지만 악의 냄새는 담겨 있지 않았다.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가정을 유지하던 사람이니 조상들의 공덕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오 차사가 당황했다.

- 우리 형님 이런 분이야. 앞으로 볼 때마다 깍듯하게 모셔.

잡귀가 어깨를 폈다.

가끔 내 힘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지만 괘씸하지는 않았다.

나와 지박령 비슷하게 연결되어 자유로이 도망도 못 갔다.

이제 세상맛을 알아가는 철없는 동생 같다고나 할까.

다만.

“장주희.”

황승재 교수가 날 부른다.

“넵! 교수님.”

“내일 수술도 부탁한다.”

“네? 내일 또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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