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장. 내가 장주희로 보여?
“썅X이! 감히 내 앞에서!”
회진이 끝났다.
한 시간 뒤에 수술이 잡혔다.
위치가 높기에 회진 이후 일반 진료는 없었다.
그사이 과장실로 돌아온 신상주가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다.
한국대 의대 정교수의 품격 같은 것은 없었다.
자신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일개 폴리클한테…….
“오빠를 믿고 까불고 있다 이거냐?”
신상주도 대충 형을 통해 장태산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대단히 유망한 투자자에 여기저기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젊은이라고 했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한국대 법대 재학 중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을 정도의 천재.
그가 투자하고 참여한 대형 인수합병 건은 모두 순탄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이곳은 이해타산을 따져서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가 아닌 국립 의대 병원이다.
돈과 권력을 쥐었다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척 적었다.
이곳에서는 의술이 핵심 권력이다.
그 점에서 신상주는 대한민국 간담췌외과 최고 타이틀을 쥐고 있다.
섣불리 자신을 건들 수 없었다.
한국대 병원에서 그는 뿌리 깊은 나무였다.
“흐흐흐. 내게 걸어오는 싸움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거절한 적이 없지.”
신상주는 은근히 타오르는 분노를 다스렸다.
장주희에 대한 응징은 이미 계획됐다.
아무리 유망한 인재라 해도 봐줄 마음 같은 건 이제 전혀 없었다.
병원에서 가장 잘나가는 외과 과장의 힘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고위 권력자들은 신상주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아파서 병원을 찾게 마련이다.
온갖 질병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케이스는 수술을 앞당겨 치료 받게 되면 거짓말처럼 생명 연장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그 순간에는 실력 있는 의술이 돈과 권력을 묶어 한 세트로 거래됐다.
정부에서도 입김을 보내고 있었다.
영리 병원에 대한 논의가 지난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의사 단체와 기업들에서도 적당한 선에서의 로비를 시작했다.
국민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법률이 통과 될 수도 있었다.
의료계의 흐름은 한 번 뚫리게 되면 막을 수 없다.
자본의 힘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권력자들을 조종하며 국민을 상대로 채찍을 가한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끼릭.
“교수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전공의 4년차.
밑에 두고 있는 이들 중에서 의국을 다스리는 치프 조원식이다.
조원식은 안경 너머로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실력은 그만그만했지만 신상주의 신임을 두둑하게 받았다.
그만큼 눈치가 빨랐다.
동기들을 다 밀어내고 치프 자리를 꿰찼다.
황승재와 비교될 정도로 정치적 감각도 탁월했다.
신상주 교수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다.
“앉아.”
“감사합니다.”
신상주의 부름에 옷깃을 정돈하고 금세 나타났다.
신상주는 권위주의가 넘치는 인물로 의복 상태에 대해서도 무척 예민했다.
“차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간단히 얘기하지.”
어차피 대충 교감이 오간 상태다.
“경청하겠습니다.”
조원식이 신상주를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밟아.”
“넵!”
의외로 지시와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그런 것들은 한국대 병원에 남을 자격이 없어. 생명이 장난인 줄 알아? 감히 교수 말에 토를 달고 대들다니……. 싹수가 노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예의 없는 후배입니다.”
“자네가 봐도 그렇지?”
“네.”
조원식은 신상주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확실하게 답했다.
폴리클들의 평가는 온전히 레지던트들의 몫이다.
치프인 자신이 최종 평가를 내리는 부분이다.
낙제 점수를 준다면 졸업하기도 힘들 것이다.
웬만하면 패스지만 가끔 불성실하다거나 실수 등을 문제 삼게 되면 실습 중에 쫓겨나는 경우도 일어났다.
병원은 그 어떤 곳보다 위험 요소가 많은 또 다른 삶의 전쟁터였다.
“내가 치프에게 기대가 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 내가 부원장 되면 자연스럽게 자리 이동이 있을 거야. 그때 펠로우 한 자리 차지해야지.”
“교수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평생 충정의 마음 아끼지 않겠습니다!”
조원식이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말로 뜨겁게 답했다.
외과의는 개원해도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다.
돈이 되는 큰 수술 같은 건 대형 병원에서나 가능했다.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는 한국대 병원 펠로우 자리.
오늘같이 사적인 부탁이 쌓이고 쌓여 탄탄하게 승리자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예쁘다고 인정 봐주지 마.”
“전 여자에게 관심 없습니다.”
“그래야지. 나도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한눈 안 팔았어. 그리고 내가 좋은 선자리도 추천해 줄 수 있고 말이야.”
신상주가 마음이 좀 풀린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막힌 속이 어느 정도 뚫리는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믿을게. 확실히…… 성과를 보여 봐.”
“넵!”
“하하. 치프는 씩씩해서 좋아.”
호탕한 웃음소리가 과장실에 울렸다.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를 향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
“너희들 똑바로 해. 마음 약하게 굴면…….”
외과 의국 회의실.
시간이 널널한 폴리클 조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인상이 딱딱하게 굳은 신연주가 싸늘한 시선으로 동기들을 쳐다봤다.
특히 장주희와 아는 체하던 남자 동기를 표적으로 삼아 독하게 흘겼다.
“다, 당연하지.”
“오늘 완전 밥맛이었어.”
“내 말이. 어디서 주워들은 것 있어 가지고 잘난 척하기는.”
“사실 그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는 거잖아? 달달 외웠던 교과서 내용과 다를 게 뭐야?”
“인정.”
신연주에게 동기들이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아부성 발언을 날렸다.
질투와 진심이 뒤섞였다.
아무리 알고 있다 해도 그걸 조리 있게 발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곡차곡 머릿속에 정리되어 들어 있어도 교수나 선배들 앞에서 그렇게 줄줄 읊어대는 건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을 장주희가 연출해 냈다.
신연주의 작은아버지인 신상주 교수를 물 먹인 셈이다.
그래서 더 독이 바짝 오른 신연주.
딸깍.
의국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서는 새하얀 가운을 입은 천사.
“나 불렀어?”
장주희가 여전히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들어섰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대놓고 왕따를 당해 막판에는 숨도 못 쉬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리어 자신만만함과 여유가 넘쳤다.
“야! 장주희!”
신연주의 오른팔 격인 여자 동기 오인나가 먼저 나섰다.
얼굴은 평범하다 못해 조금 못생긴 편에 속했다.
입학 성적도 그저 그랬던 오인나.
그래서 더 신연주 곁에 붙어 꼬봉 노릇을 자처했다.
어떻게든 졸업 전까지는 그녀에게 잘 보여 성형이나 피부과 티오를 받고 싶었다.
“야? 오인나……. 너 많이 컸다?”
장주희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받아쳤다.
“뭐라고?”
“전에 네가 먼저 나에게 친구하자고 꼬리치던 거 생각 안 나?”
“내, 내가 언제!”
오인나는 한때 장주희와 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열심히 쫓아다녔다.
하지만 오인나의 성격을 알기라도 한 듯 장주희는 한결같이 거리를 유지했다.
“저 깍쟁이 신연주가 네 미래를 보장해 준대?”
“!!!”
장주희가 오인나의 속내를 훅 치고 들어왔다.
“너 바보지?”
“다, 닥쳐!”
“성형이나 피부과 티오는 지금 다 찼어. 신연주도 겨우 낄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인데 널 넣어줄 것 같아?”
장주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배경도 무시 못 했다.
한국대 성형외과와 피부과 전문의는 그 자체가 명예였다.
어디를 가더라도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사람들 인식에 박혀 있는 뿌리 깊은 학벌에 대한 편견은 시대가 바뀌어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외과는 확실히 박아주겠네. 오인나 너 정도라면 스무 시간 수술도 거뜬하잖아.”
변죽을 올리는 장주희.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오인나를 조롱했다.
“야!!!”
튼튼한 체격 때문에 선배들에게 외과 체질이라는 놀림을 받아왔던 오인나였다.
그걸 확실하게 짚고 발언한 장주희의 공격에 오인나는 그만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
“때리려고?”
뭘 잘못 먹은 듯 계속 히죽거리는 장주희.
“너…… 정말 죽고 싶어!”
오인나가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맷돌로 갈아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물씬 풍겼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장주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오히려 버럭거리는 오인나를 귀엽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널 보니 이런 격언이 떠오른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너, 이 말 무슨 뜻인지 아니?”
장주희의 느닷없는 팩폭 공격까지 이어졌다.
“너…… 너…….”
오인나는 멘붕이 올 지경이 됐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동기간에 주먹을 쓰는 순간 바로 정학 내지 퇴학 처리 된다.
의대는 기본적으로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메스와 같은 위험한 도구를 사용하는 곳이다.
타과보다 더 엄격하게 폭력 행위를 처벌했다.
“장주희.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이번에는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 동기 이재영이 나섰다.
장주희에게 호감을 품고 대시했다가 한 차례 까인 과거가 있었다.
뻥뻥 뚫린 여드름 자국이 이마와 볼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 굵은 안경테를 쓴 이재영.
장주희에게 퇴짜 맞던 순간을 떠올리며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너 아직도 도촬이 취미니?”
“!!!”
예상치 못한 장주희의 한마디에 이재영이 그대로 굳었다.
“그거 안 좋은 버릇이다. 스마트폰은 너 같은 쓰레기들이 그렇게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가 아니야.”
“그, 그게 무슨…….”
이재영은 숨이 턱 막혔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다.
대신 공부를 잘하면 미인을 얻는다는 엄마 말에 학업 성적을 유지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 덕에 한국대 의대에 무난히 들어왔다.
입학 직후 설레는 마음으로 미팅에 나갔다.
하지만 엄마 말과 달리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자신을 보고 얼굴 표정이 바뀌던 여자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래를 계산하고 잠깐 만나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그녀들의 마음 역시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재영도 알았다.
그때부터 인격 장애가 찾아왔다.
표출할 수 없는 분노가 도촬 행동으로 나타났고 도촬이 성공하면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풀렸다.
머리가 좋은 만큼 정교하게 장비를 세팅했다.
지하철이나 도서관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을 골라 노렸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지만 어찌된 일인지 장주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평소처럼 트집을 잡아 갈구며 제대로 왕따를 시키려 했던 오인나는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장주희가 더 독하게 변했다.
더 이상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종 보스가 나서야 할 때였다.
동기들 모두 신연주의 눈치를 살폈다.
“장주희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역시, 신연주가 나섰다.
차갑고 싸늘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중학교 때부터 일진으로 군림해 온 신연주.
폭력만 앞세우는 다른 일진들과 달리 신연주는 공부를 잘했다.
그리고 결코 무리의 앞에 나서지 않았다.
넉넉하게 돈을 풀며 궁한 아이들을 조종했다.
눈에 거슬리는 대상은 따르는 아이들을 조종해 왕따를 시키고 폭력을 가해 괴롭혔다.
설사 학교 폭력 신고가 들어가도 신연주는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치맛바람도 거셌다.
일진 아이들도 신연주가 나름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는 걸 알고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죄를 뒤집어썼다.
도리어 학폭을 신고했던 피해자들이 2차 가해를 당해 전학을 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집안의 기대가 큰 만큼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었던 신연주.
장주희를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신연주……. 너 그거 알아?”
비웃음을 띤 장주희가 신연주를 바라봤다.
“뭐!”
“너 오른쪽 눈꺼풀 흘러내리고 있잖아. 돈도 많은데 성형 할인해서 받았니? 아니면 실력 안 좋은 너희 작은 아빠 솜씬가?”
“뭐라고? 이런 미친!”
쇄애앳.
신연주가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날렸다.
그 순간.
탁!
번개처럼 신연주의 손을 잡아채는 장주희.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느 누구도 똑똑하게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쾌속한 반격이었다.
“아아악!”
손목에 가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신연주가 비명을 질렀다.
“하아……. 이런 젖비린내도 안 가신 것들이…….”
장주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걸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
그 소리를 들은 모두가 크게 눌라며 당황했다.
평소 보아 왔던 장주희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너희들! 아직도 내가 장주희로 보여?”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