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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장. 장주희입니다! (915/1,284)

925장. 장주희입니다!

‘이게 미쳤나!’

신연주는 제 옆에 서는 장주희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꼬리를 쳤다.

긴장감이 팽팽한 와중에도 남자 선배들의 호의 가득한 눈빛을 싹쓸이하는 장주희였다.

소문이 자자한 한국대 의대의 퀸카.

한국대 의대 역사에서 이만한 미모를 가진 여성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여신급이었다.

남자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대부분 장주희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본격적으로 왕따 시키기 전까지 직속 선배들은 족보를 구해다 바치고 후배들은 누나라 부르며 틈만 나면 수시로 다가와 친근함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게 집안도 꽤 부유했다.

의대생들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안의 자재들이었지만 장주희는 그중에서도 넘사벽이었다.

스포츠카는 기본.

수시로 바뀌는 명품백과 소품들은 보통 상류층에서는 구할 수 없는 한정판 제품들이었다.

그런데도 싸가지 된장녀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가리지 않고 베풀기도 잘 베풀었다.

한마디로 밥 잘 사주는 선배가 장주희였다.

활짝 웃는 얼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곳곳에서 그녀는 인정을 받았다.

그렇게 당당했던 장주희가 예전 모습을 되찾은 듯 신상주 교수 앞에 나섰다.

외과 선배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장주희를 바라봤다.

신상주 교수의 조카가 신연주라는 사실을 다들 알았다.

아무리 장주희가 예쁘고 똑똑하다고 해도 대놓고 밀어 줄 수 없었다.

신상주 교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제 발로 걸려들었군. 흐흐.’

형수에게 앞서 지시를 받은 바가 있던 신상주 교수였다.

사랑하는 조카가 받아야 할 과수석 졸업 타이틀을 채간 핏덩이 본과생.

직접적으로 수업 시간에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모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과정도 성실했다.

점수를 안 줄 수 없을 만큼 수업 태도는 물론 머리도 좋았다.

낯선 해부학 시간에도 시체나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욕심나는 대단한 인재였다.

하지만 신상주 교수에게는 자신의 집안을 위해 희생시켜야 할 장애 요소로 보였다.

신연주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형님과 함께 강남에 대규모 성형외과를 계획 중이다.

피부과와 병행하게 되면 순식간에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다.

신상주는 무엇보다 물욕이 컸다.

지금 이 자리에 앉기 위해 함께 공부했던 동기들과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준 선배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한국대 의대에 입학할 정도면 머리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로 비등했다.

신상주보다 의술 실력이 뛰어난 천재들도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신상주는 특유의 말빨과 잔머리로 그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공부만 잘했지 세상 사는 법을 전혀 모르는 동기들은 신상주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직으로 구성된 모든 곳에는 나름의 정치가 존재했다.

특히 한국대 의대는 국립대인 만큼 정치권의 힘이 잘 먹혔다.

인맥 좋은 동생을 통해 속속 라이벌들을 제거하며 승승장구해 온 신상주.

이번 제거 대상은 고작 본과 3학년 임상수련생이다.

밟아주는 건 일도 아니다.

눈치 빠른 레지던트들이 먼저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전에 살짝 지려 밟아 주려 마음먹었다.

조카가 원하는 대로 조도 편성해줬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 가능했다.

집안 내력이라 조카도 사람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조카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면 길게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물론 주목 받고 있는 인재인 만큼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장주희는 얼굴도 반반했다.

주마다 찾아가는 강남 텐프로의 종사자들보다 수준이 나았다.

후끈 뜨거운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살려 달라고 매달리고 빌면 잠시 어루만져 줄 의향도 있었다.

한국대에 남아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려면 자신의 동의는 필수였다.

지금까지 오면서 그렇게 억눌러 왔던 욕심을 채운 적이 꽤 있었다.

은연 중 소문이 돌아 여자 레지던트들 지원이 많지 않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오! 패기 넘치는 병아리도 있군. 이름이…….”

“장주희입니다.”

장주희를 알면서도 모른 척 이름을 묻는 신상주.

맑게 웃으며 순수한 얼굴로 답하는 장주희.

파밧.

하지만 묘한 불꽃이 튀었다.

“그래 말해 보게. 다음 처치 과정은 어떻게 하면 되나?”

쉽지 않은 판단과 처치 과정이 필요했다.

운 좋게 대답을 한다 해도 교과서적인 답변만 나열하다가는 모두가 깨질 판이다.

임상적 노하우가 결합된 빠른 결정이 필요한 케이스다.

모두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장주희를 바라봤다.

“지금 선배님의 보고 내용을 살펴 보건데 환자는 AP(angina pectoris)로 보입니다.”

장주희의 똑 부러진 음성이 복도에 울렸다.

의국 의사들뿐만 아니라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들의 귀까지 파고들었다.

병원에서의 직장 생활은 의외로 따분할 때가 있었다.

응급실이야 매일같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만 보통의 일반 병실은 계속 반복되는 업무의 연장이었다.

그런 일상에서 어쩌다 터지는 썸이나 사건은 시간 때우기에 최고 메뉴가 됐다.

소문을 생성 확장하는 데 간호사들의 입만 한 것이 없었다.

각종 대화방을 통해 실시간 중계가 되는 건 예사.

지금도 마찬가지.

간호사 중 몇 명이 업무를 보는 척하며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방에 톡을 날렸다.

- 대박! 방금 병아리 한 마리가 신상주 교수님에게 손들고 신환 환자 치료에 대해 입 열었음.

- 정말? 외과 신 교수님 엄청 깐깐한데.

- 으으. 깐깐하기만 해? 완전 성격 진상.

- 가끔 보는 눈이…… 개밥 맛.

- 수술방 들어가면 음담패설 장난 아님.

- 으으. 난 수술대에서 다른 사람 시선 상관없이 여자 환자 가슴 만지는 것도 봤음.

- 진짜?

- 완전 뵨태임!

- 그건 고소해야 하는 거 아냐?

- 부원장에 오른다는 말이 파다함.

- 증거가 없잖아. 샘들이 증언해 줄 것도 아니고.

- 더러워…….

- 그런데 병아리 이름이 뭐야?

- 장주희?

- 아! 장주희!

- 지난번 우리 과에 왔는데 남자 샘들 장난 아니었어.

- 맞아……. 우리 다 오징어 만들었잖아.

- 하늘은 언제나 불공평해. 예쁜데 공부까지 잘하다니…….

- 인성도 좋아요. 과 떠나는 날에 선물도 해주고 매우 친절했어요.

- 맞아. 가식도 없어.

- 피부에 잡티 하나 없어.

- 화장품 뭘 쓰지?

단톡방에 쉴 새 없이 주르륵 대화가 떴다.

회진이 끝난 뒤에야 본격 처방이 내려왔다.

그때까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간호사들이 제대로 손을 털었다.

“AP라…… 확신하는 거야?”

신상주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머릿속에 장주희를 조져 버릴 스토리가 10여 개나 떠올랐다.

“네.”

“네? 인턴도 아닌 폴리클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내가 처음 들어보는군.”

신상주가 어이없는 시선으로 장주희를 훑었다.

“장주희.”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착 깐 목소리로 묵직하게 불렀다.

“네. 교수님.”

“네가 한 말 때문에 지금 환자가 급성으로 죽을 수도 있어. 그런데 확신? 내 앞에서 그런 말 하는 수련의나 전공의는 단 한 명도 없어! 그런 겁도 없고 오만한 판단 때문에 의료사고가 터지는 거야!”

신상주의 강한 추궁이 일견 타당해 보였다.

교수들이나 펠로우들도 함부로 판단을 못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관상동맥과 심장까지 살펴야 하는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더 복잡한 상황이 초래될 때가 허다했다.

그런데 의사 자격증도 없는 폴리클이 겁도 없이 확진을 말했다.

“교수님.”

그때 차분하게 신상주의 말을 끊는 장주희.

“!!!”

지켜보던 모두 화들짝 놀랐다.

이 정도 언성으로 신상주 교수가 말을 했다는 건 당장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말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두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장주희를 바라봤다.

“계속 치료 과정에 대해 얘기해도 될까요?”

“헛!”

“아!”

“음…….”

사방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누가 봐도 엄연한 반기였다.

펠로우도 자리를 걸고 내뱉어야 할 정도의 말대답 수준.

“뭐, 뭐라고?”

당황한 신상주가 말을 더듬었다.

지금까지 흠결 없이 완벽하게 다스려왔던 자신의 왕국에 반역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일개 예비 기사 따위가 반기를 들었다.

“계속 말해봐.”

그때 펠로우 한 명이 나섰다.

신상주 교수 밑에서 실력을 쌓았던 심장외과 전문의 황승재.

신상주가 크게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과도 달랐다.

간담췌외과 스페셜리스트 외과 교수인 신상주였지만 흉부외과전문의를 밑으로 욱여넣어 키웠다.

신상주가 심장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갖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황승재는 필요한 자리에서의 아부나 정치색이 아주 약했다.

음모를 꾸며 꼼수를 써서 자리에 오르지도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술기 실력이 대단했다.

그 부분에서는 인턴과 레지던트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 때문에 한때 신상주는 고민이 많았다.

결이 맞지 않아 계속 데리고 가자면 재미없을 게 빤했다.

또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안 됐다.

다른 과 교수들이 유난히 탐을 내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신상주가 자신 밑에 넣었다.

잘난 펠로우들이 있어야 위에 교수들이 빛났다.

부원장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실적이 필요했다.

크게 문제를 만든 적이 없던 황승재가 장주희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일단 환자가 AP라 의심이 되면 순환기내과에 노티를 넣어 협진을 실시해야 합니다.”

협진이라는 말이 나오자 레지던트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과는 독립된 채 스스로 완벽할 수 없었다.

정확한 병명 확인을 위해서는 다른 과와 환자에 대해 면밀히 논의하는 게 중요했다.

“밤사이 조치는 심전도, 흉부 방사선 사진, 부하검사, 혈액검사, 심초음파까지 검사가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CAG입니다.”

이번에는 펠로우들도 긍정의 눈빛을 보였다.

외과 근무를 이제 시작한 햇병아리치고는 모든 과정을 무난하게 꿰고 있었다.

보통 외과 과장과 함께 도는 회진에서는 인턴은 물론 레지던트들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알고 있는 것도 머릿속에서 엉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해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장주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협심증 의심 시에는 심혈관조영술 또는 관상동맥조영술이 진단과 치료에 있어 기본이었다.

“또.”

황승재가 계속 장주희의 대답을 유도했다.

무심한 표정에는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치료가 필요하면 수술보다는 일단 약물치료나 중재적 시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VS를 비롯해 여러 문진 결과표를 통해 살펴보면 이 환자는 수술이 필요합니다.”

“왜?”

질문은 짧았다.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협진을 통해 보면 정확한 상태를 알겠지만 응급실에 들어올 때 흉부통을 호소했습니다. 심근경색 증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속적인 흉부 중앙의 압박감을 비롯해 불편감이 팔과 등까지 느껴진다 했습니다.”

“그래서?”

문답은 계속 이어졌다.

“…….”

황승재를 제외한 신상주 교수와 주변에 둘러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신상주 교수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들어온 장주희는 이미 찍힌 상태였다.

실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입만 나불거리는 가소로운 영웅심은 병원 조직에서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말이 달랐다.

폴리클이라 해도 가끔 명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때가 있게 마련.

일명 싹수가 보이는 경우가 그랬다.

황승재도 그렇게 컸다.

좋은 머리를 가졌고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무지막지한 체력으로 엄청난 공부 양을 소화했다.

“환자는 어제는 물론 평소에도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 중년 회사원입니다. 갑자기 활동하다 벌어진 것도 아니고 집에서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던 중 흉통 때문에 병원에 내방했습니다.”

“그래서 이형성을 의심하는 건가?”

황승재가 말을 자르고 질문했다.

“네.”

“근거가 아직 빈약한데?”

“환자는 하루에 한 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입니다.”

장주희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부족해.”

“비만입니다.”

“더.”

“늦은 밤에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식사 때 반주로 맥주 두 캔을 마셨습니다.”

“흐음.”

처음으로 입을 다무는 황승재.

“그리고 응급실 레지던트 선생님이 긴급하게 처방한 니트로글리세린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

장주희의 말에 뭘 좀 아는 의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완벽한 이형성 협심증의 증상과 일치했다.

“급성 심낭염, 대동맥 박리 및 출혈, 소화기계, 신경 및 근골격계, 폐질환 및 스트레스성은 아님이 문진표와 기록지를 보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확신해?”

“아침까지 실시한 혈액 검사를 통해 CK-MB와 트로포닌 농도가 점점 상승하고 있습니다. 협심증 증상 및 심근경색까지 진행 될 여지가 보입니다. 빠른 CAG와 CT 촬영. 그리고 카테타 및 스탠스 삽입술 그리고 더 위험할 때는 CABG까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명확한 장주희의 설명에 모두들 벙찐 표정이 됐다.

레지던트 초년차를 뛰어넘는 식견이었다.

물론 지켜보던 신상주 교수의 얼굴도 굳어졌다.

여기서 더 폴리클을 추궁하는 건 진짜 괴롭히겠다고 선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네년을 가만 두지 않겠다!’

신상주가 가볍게 생각했던 제거 대상을 보며 단단히 마음을 굳혔다.

굳어진 신상주의 얼굴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전히 생글거리는 장주희.

“이름이 뭐라고 했지?”

평소 냉혈한으로 불리던 황승재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이름을 물었다.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본과 3학년 외과 임상실습생 장주희입니다!”

듣기 좋은 씩씩한 목소리가 외과 병동에 힘차게 울렸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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