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장. 왕따(3).
“칩거? 장태산이?”
“넵. 이사님.”
아버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슬기롭게 리앤장을 점령한 손대균.
대내외적으로 이사직을 맡고 있지만 실상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다.
리앤장이 자랑하는 정보력도 마찬가지.
손국중에게 전해지던 핵심 정보들이 모두 다 손대균 쪽으로 전달 됐다.
일송회 장로 자리를 꿰차면서 국가 정보도 그전보다 쉽게 획득하게 되었다.
오정의 정보력에 맞먹을 정도다.
일이 많아지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던 손대균에게 여느 날처럼 장태산의 동향이 보고됐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칩거라…… 장태산답지 않은데.’
손대균은 장태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보고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일송회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한순간에 아버지와 아들을 망가트려 버린 장태산.
업보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성과 달리 가끔 치솟는 분노는 손대균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다가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장태산 역시 주도면밀하게 일송회 쪽을 눈여겨 살피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견제구를 분명히 날렸다.
한참 바쁘게 움직이던 차에 들려온 장태산의 칩거.
“한국대 의대생인 장태산의 여동생 장주희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
정보를 물어온 자는 소속 로펌의 변호사가 아니었다.
전직 대검찰청 소속의 공무원으로 베테랑 정보요원이다.
활용할 수 있는 인맥의 폭이 넓은 인물이다.
청와대 민정수석 감찰관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기도 했다.
현재 대검찰청 캐비닛에 들어있는 중요 정보들 대개가 이자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각할 정도로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왕따? 누가?”
손대균은 정보원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재차 물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이 된 대학생들이다.
그것도 한국대 의대 재학생 정도라면 지성인들 중에서도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모교다.
적당한 질투와 시기는 사람이 모이는 자리면 으레 있게 마련이지만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대학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심각할 정도의 왕따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태산이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벌어진 사건임이 확실했다.
적어도 장태산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장주희를 상대로 저런 짓을 벌였을 리 없다.
오정도 박살내 버리고도 남을 장태산.
‘어떤 겁 없는 것들이…… 태산이 가족을 건든 거야?’
손대균은 은근히 흥미가 동했다.
대한민국 안에서는 청와대도 터치 할 수 없을 만큼의 권력자로 부상한 장태산이다.
일송회의 회주도 트러블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다.
그런 장태산의 가족을 감히 누가 건드렸다.
“신연주라는 동기입니다.”
“동기라면…… 질투?”
변호사답게 바로 상황을 유추해 보는 손대균.
“그런 것 같습니다. 장주희가 외모나 학업 성적 면에서 압도한 것 같습니다.”
“애들이란…… 쯧. 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인데?”
“이사님도 아시는 분입니다.”
“내가?”
“신태주 B&S 대표이사입니다.”
“신태주 대표라…….”
손대균은 신태주를 떠올랐다.
미국에서 놀던 실력파 M&A 전문가다.
몇몇 상류층 인사들과 권력자들의 비밀 자금을 이용해 알짜배기 중소기업들을 인수해 되팔아 이윤을 남겼다.
말이 좋아 기업인수합병 전문가지 엄밀히 따지면 금융 사기꾼이나 진배없다.
그럼에도 신태주는 사기꾼으로 거론되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았다.
검찰이나 법원, 금융감독위나 행정부 고위층, 언론사 사주들을 총망라해 연관되어 있었다.
합법을 가장한 도덕적 위법의 대표기업가인 셈이다.
자기 자본은 쥐꼬리만큼 투자해 현금과 기술력 빵빵한 기업을 인수받아 싹 벗겨 먹고 다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리앤장의 중요 고객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경고라도 보낼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정보원.
“오 팀장.”
“넵. 이사님.”
“오지랖 적당히 부려.”
의외의 차가운 경고.
“아, 알겠습니다!”
오 팀장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느 시점부터 분명 손대균은 그전과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자상한 면을 보였던 그가 지금은 냉혈한이 되어 있었다.
사정도 보지 않고 실수를 한 구성원들은 용서치 않았다.
리앤장 소속 변호사들은 매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덕분에 승소율은 더 높아졌다.
“신태주 동생이 한국대 의대 교수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신상주라고 외과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순위를 다투는권위자입니다.”
“그림이 그려지는군. 철부지 딸과 조카의 질투가 불러온 신씨 가문의 참사가……. 안타깝군. 후후훗.”
손대균은 안타깝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직접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마 벼락을 맞은 듯 정신없이 사건이 곧 터질 것이다.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화끈하게 응징해 버릴 장태산의 수법.
‘장태산. 이번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손대균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쉽게 장태산이 택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신태주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사였다.
더욱이 이번 일은 지성인들의 장인 대학에서 발생한 왕따 문제.
돈이나 권력, 법으로 접근해 해결할 만한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제아무리 장태산이라 해도 해결 방법이 쉽지 않을 것이다.
엄연히 성별이 다른 장태산이 여동생 일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마땅치 않았다.
***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신연주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눈을 비비고 바라봤다.
분명 장주희가 맞았다.
왕따를 당하면서 다 시들어가던 장주희가 특유의 밝은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얼마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새하얀 가운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지친 기색도 없이 자세도 꼿꼿했다.
의료계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신광 법사님이 실패했을 리가…….’
신연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좋았던 기분은 이미 천 길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
조원인 동기들이 신연주의 눈치를 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다들 잘 알았다.
은연중에 신연주와 뜻을 같이 한 가해자들.
또각또각.
그때 장주희가 그들 무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
다가오며 풍기는 포스가 어리어리할 정도로 강했다.
입가에 물고 있는 자신만만한 미소.
눈빛에 어려 있는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강렬한 기운은 무리를 저절로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안녕~.”
아무렇지 않게 먼저 인사하는 장주희.
“……안녕.”
그간 주희의 소식을 궁금해했던 남자 조원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고 흔들었다.
파바밧!
곧바로 눈을 흘기며 바라보는 신연주와 여자 동기.
움찔 놀라 들어올렸던 손을 재빨리 내렸다.
“연주야 오늘 화장빨 좋네?”
‘화장빨?’
신연주 이마에 파란 힘줄이 돋았다.
처음과 달리 왕따를 당하면서 최근 들어서는 눈도 잘 못 마주치던 장주희가 돌변했다.
산삼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기가 팔팔했다.
“너…….”
신연주가 발끈하려는 순간.
“너희들 뭐 해! 교수님 올라오시잖아!”
학교 직속 선배인 남자 인턴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실습생들을 꾸짖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됐고! 이것 받아들고 빨리 줄 서. 내일부터는 너희들이 직접 가져가.”
타다닥.
외과 인턴이 밤새 환자 상태 경과를 기록한 문진표와 기록지가 던지듯 건넸다.
“올해 병아리들 간도 크네?”
“너희들 기억해줄게.”
대선배 레지던트들이 까칠하게 반응했다.
차자작.
조용히 종이를 받아드는 임상실습생들.
격앙됐던 감정을 감추고 숨을 죽였다.
선배들 모두 밤새 고생을 한듯 신경이 날카롭고 까칠했다.
수련생들과 달리 당직을 서야 하는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은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떡이 졌고 눈동자는 피곤에 절어 핏발이 섰다.
특히 레지던트들 상태가 더 엉망이다.
인간의 체력 한계치까지 밀어붙이는 레지던트 과정.
온전히 건강해 보이는 레지던트가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이 잘못 배정되면 하루를 꼬박 근무하는 일도 다반사다.
퐁당퐁당 근무가 한 달에 30번이 넘어 갔다.
36시간 연속 근무해야 하는 파트에도 간간이 배정이 된다.
이렇다 보니 주당 100시간이 넘게 업무에 시달리는 건 보통이다.
잠을 자는 시간에도 콜이 들어오면 달려 나가야 함은 기본이다.
자거나 쉬는 시간을 아껴 저널이나 케이스 발표 준비까지 해야만 한다.
가끔 선배나 다른 과 진료 의사들이 대신 당직을 서주기도 하지만 최종 책임자는 주치의다.
운 나쁘게 그런 날 의료사고라도 나면 고생해 왔던 시간도 무의미하게 잘리는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 있는 레지던트와 인턴들 신경을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실습생들은 말없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외과 과장을 선두로 펠로우, 당직 전공의 레지던트 전체, 수련의 인턴뿐만 아니라 PK 수련생까지 모두 모였다.
의국원 전체 인원이 30명 정도 됐다.
다른 병원들은 외과 수련의들이 부족하다지만 한국대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한국대 의대 외과의 힘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저벅저벅.
복도 끝 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신상주 외과 과장을 비롯해 펠로우들이 호기롭게 등장하는 순간.
“…….”
모두 거짓말처럼 숨도 쉬지 않았다.
절대 영주의 등장과 같은 모습이다.
괜히 저들에게 찍혀서 불려가 쪼인트 깨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명과 직결되는 곳인 만큼 실수하는 순간 과거 군대처럼 정강이가 까인다.
여자라고 절대 봐주지도 않았다.
강도는 어느 정도 약할 수 있지만 처벌은 똑같았다.
그래서 중요 외과일수록 여자 수련생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10시간을 넘어가는 장시간 수술을 견뎌낼 여자 외과 전문의는 전무했다.
“다들 좋은 아침이야.”
눈은 작지만 전체적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둥근 인상의 신상주 교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의국 전체 인원이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쉿! 너무 소리가 커. 시대가 변했잖아. 나 전공의 시절에는 목소리 작다고 맞기도 했지만, 요즘은 아니잖아. 다들 긴장들 풀어.”
사람 좋은 모습으로 빙그레 웃는 신상주 교수.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긴장을 풀지는 못했다.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 뒤에 감춰진 신상주의 교수의 까칠함은 악명이 자자했다.
절대 복종과 권위를 가장 중시했다.
다른 대학보다 더 심하게 학벌과 서열을 따지는 곳이 한국대 의대였다.
교수와 전공의들 대부분이 한국대 의대 출신들이다.
다른 병원과 달리 타 대학 출신들을 거의 받아 주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와도 결국 버텨내지 못했다.
적통과 서자 정도로 취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1년에 몇 명씩 전공의로 들어오지만 대부분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그래서 타 대학 출신들은 한국대 전공의 과정을 기피했다.
눈칫밥 먹고 잡일 하다가 뒤늦게 현실을 깨닫는다.
그런 중심에 외과 과장인 신상주 교수가 있었다.
대표적인 권위주의자.
심장외과뿐만 아니라 췌장과 담도암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로 불리지만 실력에 비해 인격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 오늘 아침 보고해 봐.”
회진을 돌기 전 시작되는 신환과 구환 보고.
밤새 새로 들어온 신규 환자와 기존 환자 처치에 대해 레지던트들이 각자 맡은 환자들에 대해 보고하는 시간이었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의학적 견해를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교수나 다른 의사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행위였다.
동시에 교수의 평가를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버벅거렸다가는 바로 깨졌다.
교수가 눈살 한 번 찌푸리면 그 날은 의국에 폭풍우가 불어 닥친다.
펠로우들도 긴장했다.
후배들이 깨지면 자신들에게도 가끔 생각지 못한 불똥이 튀었다.
“3211번 환자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름 이길민. 47세. 어젯밤 11시 50분에 응급실로 KTS 파트 신환으로 들어왔습니다.”
“증상은?”
본격적으로 어제 담당이던 레지던트 3년차가 보고를 시작했다.
“MI와 UA가 의심되어 chest X-ray와 blood lab을 실시했습니다. C.C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의 보고가 계속 복도에 울렸다.
“AN을 실시해야 할 것 같아 aspirin 300mg과 ticagrelor 170mg을 처방했습니다.”
“흉부통은?”
“VS 측정 결과…….”
계속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
인턴과 레지던트 1, 2년차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모든 과정이 살아 있는 공부였다.
언제 어느 틈에 자신들에게 닥칠 상황이 될지 몰랐다.
“좋은 케이스가 왔군. 그래 올해 병아리들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나 볼까?”
그때 질문을 멈추고 신상주 교수가 임상실습생들을 훑었다.
흠칫.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던 외과 폴리클 조원들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신상주 교사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 처치 다음에는 뭘 해야 할까? 용감하게 대답할 병아리 없나?”
갑자기 툭 던져진 신상주 교수의 한마디.
“…….”
폴리클 조원들은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채 얼어붙었다.
의과 수업 시간에 배운 학문적 지식과 현장 상황은 많이 달랐다.
“누구 없어? 다들 공부 안 했어? 선배들이 기본도 안 가르쳐 준 거야?”
폴리클에게 향하던 시선이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들에게 향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복도 전체에 퍼졌다.
신상주 교수만의 병아리 길들이기 수법이라는 걸 다들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랐다.
이대로라면 의국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때.
“제가 답변해도 될까요?”
장주희가 생긋 웃으며 나섰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