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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장. 왕따(2). (913/1,284)

923장. 왕따(2).

“원장님, 머리 아프신 건 어떠세요?”

“하하. 괜찮습니다. 일하기 싫어 엄살을 부린 것뿐입니다.”

“다행입니다. 원장님이 아프시면 저희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아프지 마십시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 가시는 중입니까?”

“네. 며칠 동안 기도를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날이 덥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쌀쌀하게 붑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인자한 표정의 원장은 운전석 창문을 열고 경비 직원과도 소소한 안부가 담긴 대화를 나눴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기도 가시는 원장님 귀한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아닙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고하세요.”

“다녀오십시오.”

“아내 되시는 분이 아프시다고 했죠? 올 때 장생도라지라도 한 뿌리 캐오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매번 신경 써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럼.”

부우우웅.

낡은 봉고차를 운전해 정문을 나서는 원장.

“세상에…… 저런 분이 어딨나. 복 받으실 거야.”

늙은 경비원은 멀어져가는 봉고차를 보며 혼잣말로 원장의 복을 빌었다.

수천 명이 넘는 이곳 시설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남자.

원장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이곳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를 향한 관심은 기를 소모하는 일로, 지속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 와중에도 기도를 쉬는 일도 없었다.

어떤 종교를 따르고 신앙으로 삼고 있는지 다들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저 한민족 역사 이래 대대로 내려오는 특이한 종교 정도로만 알려졌다.

딱히 포교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물론 원생들 모두 각자 원하는 종교를 가졌다.

종교를 뛰어넘은 종교계의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었다.

원장은 이곳의 왕이면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두를 섬기는 자였다.

한 달에 일주일쯤 기도를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분이다.

이번 달에는 아직 시간이 차지 않았는데 기도를 당겨 하는 모양이었다.

원장의 기도 장소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기도를 다녀오는 날이면 각종 산나물을 가져오는 걸로 보니 깊은 산중일 거라 다들 짐작만 했다.

“늙은이가 바빠 죽겠는데 말을 시켜……. 짜증나게.”

본원과 거리가 멀어지자 방금 전까지 인자했던 원장의 표정이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금세 사악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새카맣게 변한 피부 색.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온몸에서 검은 오라가 풍겨 나왔다.

부우우웅.

봉고차는 그렇게 20분 정도를 달리다 어느 산골로 접어드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도로포장은 되어 있지만 주변에는 마을이나 인적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래 전 농사를 지은 듯한 흔적만 남아 있는 주변의 대지.

구불구불 이어지던 포장도로는 곧 끝이 나고 앞쪽 길도 막혔다.

대신 두툼한 철책으로 둘러쳐진 땅이 나왔다.

입구에 사유지라는 푯말과 함께 무단출입 시 처벌한다는 경고 내용이 적혀 있다.

그그그극.

잠시 입구에 봉고차가 멈춰 섰고 안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듯 시간이 지체되더니 이내 자동으로 출입문이 열렸다.

부우우웅.

빠르게 안쪽으로 사라지는 봉고차.

스르릇.

주변에 설치된 최첨단 CCTV와 감시 시스템이 풀가동 됐다.

그렇게 출입문을 통과한 봉고차는 안쪽으로 5분쯤을 더 이동했다.

그 끝에 펼쳐진 거대한 농장.

2층으로 된 규모가 꽤 큰 저택과 한쪽에 말이 뛰어다니는 마사도 보였다.

소와 염소, 닭, 돼지와 같은 가축도 따로 마련된 막사에서 사육 됐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다다닥.

갑자기 사방 건물에서 남녀로 구성된 20여 명의 인물들이 빠르게 나타나 도열했다.

끼이익.

봉고차가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서 멈췄다.

덜컹.

원장이 내렸다.

냉막한 표정.

“주인님 오셨습니까.”

봉고차에서 내린 남자는 원장이 분명했지만 이곳에서는 그를 주인님이라 불렀다.

모두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감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의 눈빛에 깃든 공포와 한량없는 존경심은 어딘가 이율배반적으로 보였다.

저벅저벅.

원장은 오만한 태도로 인사도 받지 않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말없이 뒤를 따라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정장 차림의 중년 남녀.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주의를 집중했다.

끼리릭.

저택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실내 모습.

최고급 이탈리아 대리석이 바닥 전체에 깔려 있다.

중세 유럽풍의 엔틱 스타일로 꾸며진 실내 장식은 감히 누가 함부로 따라할 수 없을 만큼 최고급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면에 걸려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은 모두 진품이었다.

실내 공기는 쾌적했다.

“옷이 준비 됐습니다.”

스스스슷.

소리 없이 다른 공간에서 비단 옷을 들고 나타난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

마치 왕궁의 궁녀들처럼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스윽.

늘 해왔던 일처럼 손을 드는 원장.

여인들이 재빨리 다가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순식간에 속옷까지 다 탈의됐다.

그 어떤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드러내고 보니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더 탄탄한 원장의 몸.

잔 근육들이 보기 좋게 발달해 있었다.

몸에 난 여러 모양의 흉터가 일정한 규칙 속에서 특이한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스스슥.

여인들이 다시 붉은 비단옷을 원장에게 입혔다.

과거 시대 왕들이 입던 곤룡포와 매우 흡사했다.

다만 황금용이 아니라 흉포해 보이는 검은 용이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물러나라.”

새로 입은 의복이 정리되자 여인들을 향해 원장이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 나타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는 여인들.

“그년 뒤에 누가 있더냐?”

원장은 뒤를 따라 들어왔던 중년 남자를 향해 물었다.

“신광이 저주술법을 벌였던 대상은 장주희라고 합니다.”

“장주희?”

“그 계집의 오빠가…… 장태산입니다.”

“뭐라? 장태산?”

남자의 보고에 원장이 크게 놀랐다.

‘하필 그 자식이라니!’

아직 자신도 정확하게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 장태산이다.

물리적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몇 년 사이 자신이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공들여 이룩한 권력을 넘어섰다.

부의 규모도 마찬가지.

일송회와의 관계에서도 원수지간이 됐다.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지금은 휴전 상태가 됐다.

그런 마당에 의외의 일로 사건이 얽히고 말았다.

“흐음.”

원장의 입에서 심란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명령만 내리시면 신광의 복수를 위해…….”

남자가 말을 잇는 순간.

“멍청한 놈!”

원장의 불호령이 터졌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쿠웅!

바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남자.

웅크린 몸을 벌벌 떨었다.

원장은 화가 나면 어떤 벌로 응징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쯧쯧.”

몇 차례 혀를 차는 원장.

평소 보였던 자비로운 모습은 표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광의 뒷처리는?”

“모든 흔적을 지웠습니다.”

“그럼 됐다. 더 이상 관여치 말라.”

“명을 따르옵니다!”

왕처럼 명하는 원장과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는 남자.

한마디 대꾸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신입 훈련은 어떻게 됐나?”

원장이 이번에는 중년 여자에게 물었다.

“이제 기초 교육이 끝났습니다.”

“그래?”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흐흐. 보고 싶군.”

원장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자신만의 왕국.

세상에서는 성자의 모습을 하고 살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잔인한 폭군으로 군림했다.

저벅저벅.

원장의 발걸음이 지하로 이어진 한쪽 계단으로 향했다.

전자 빛이 껌뻑이며 원장을 스캔했다.

그르르릇.

신분 확인이 끝나자 두툼한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안쪽에서 드러나는 광경.

붉은 카펫이 바닥 전체에 깔려 있다.

은은하게 떨어지는 조명도 붉은 빛.

안쪽 공간은 놀랍게도 1층보다 더 넓었다.

그리고 시선 닿는 곳곳에 방이 존재했다.

수많은 방 앞에는 어느새 여인들이 나와 각각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고개를 떨군 채다.

왕을 알현하는 궁의 시녀들처럼 모두 숨을 죽였다.

대략 나이는 20대 중반을 넘지 않아 보였다.

흡족한 미소로 문 앞에 서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는 원장.

마지막 방 앞에서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앞에 소녀 하나가 몸을 벌벌 떨며 잔뜩 웅크리고 서 있다.

원장이 그녀 앞에 바짝 섰다.

그리고.

“하영아.”

다정하게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드는 소녀.

“워, 원장님!”

공포 속에서 발견한 행운처럼 원장을 보며 격하게 반겼다.

“이곳이 마음에 드느냐?”

나지막한 목소리로 원장이 물었다.

“사, 살려 주세요! 원장님. 전 동생들과 같이 있고 싶어요. 여기는 무서워요. 원장님! 제발 절 구원해 주세요!”

하영은 원장의 두 눈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매달렸다.

원장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원장은 평소 아버지와 같이 자상하게 모든 이들을 보살펴줬다.

그런 원장이 눈앞에 있으니 당연히 이곳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쫘아악.

기다렸다는 듯 세차게 뺨을 갈기는 원장.

“아악!”

하영이 힘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자비롭고 친절했던 원장이 하영의 뺨을 날렸다.

“아직도 멀었군.”

“주인님. 죄송합니다! 바로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다 이런 때가 있었지.”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숨죽이고 있는 다른 여인들을 훑으며 살폈다.

흠칫.

상당수가 조용히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반항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그녀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소리 없이 이 자리에서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곳에서 사육하고 있는 가축들 중에는 돼지처럼 잡식성 동물도 많았다.

그렇게 길러진 동물의 고기를 즐겨 먹는 악마 같은 원장.

절대 숨죽이고 그의 명을 따라야만 했다.

“오늘 밤은…… 너로 정했다.”

원장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

몇 년 전 가출했다던 시설의 소녀가 어느새 여인이 되어 두 눈을 질끈 감고 서 있었다.

***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네. 다들 준비 단단히 해둬. 응급의학과 말고 가장 빡센 곳이 외과니까.”

“그래도 난 행복해. 화이트 코트를 입고 활보하는 맛에 산다. 다들 내가 진짜 의사 선생님인 줄 안다니까.”

“그건 그래. 나도 요즘 폼 난다.”

“지난 실습 때 거쳤던 정신과에 비하면 외과는 양반이지.”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날 보며 누나라고 하던 느끼한 할아버지 기억나?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 할아버지도 남자잖아. 연주 널 보고 반한 거지.”

“됐어! 난 정신과는 체질이 아니야.”

“그럼 어떤 과 선택할 건데?”

“피부나 성형.”

가장 전공의 따기 어렵다는 피부와 성형외과.

신연주는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오! 역시 한국대 과 탑이라 자신만만한데.”

“연주라면 당연히 모든 과에서 오케이지!”

“부럽다. 신연주. 이번 외과 폴리클에서도 주목 다 끄는 거 아니겠지?”

“우리는 너만 믿는다.”

한국대 병원 외과 병동.

6명이 한조가 된 3학년 본과생들이 실습을 나왔다.

모여 있는 숫자는 다섯.

72명의 동기들 모두 바쁘게 다른 과들을 차례로 돌며 실습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한국대라는 최고의 타이틀만큼 실습 강도도 다른 학교보다 셌다.

실습 기간에 교수들 눈에 들지 못하면 본교 의대 인턴에서 밀려날 수 있었다.

실력이 탁월하든지 어지간한 뒷배가 존재해야 요즘 잘나가는 성형이나 피부과에 레지던트까지 한 방에 쭉 갈 수 있다.

신연주 주변에 모여 있는 네 명은 미래를 위해 듣기 좋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신연주는 학업 성적도 우수했지만 의대 외과 과장인 신상주 교수의 조카였다.

외과 과장은 병원의 꽃이라 불리는 자리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한국대 의대 외과 과장은 그 파워만 해도 남달랐다.

부원장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필수 요직이었다.

더욱이 남은여생 동안 자리가 보장된 정교수다.

어지간한 과의 과장들이 다들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신연주를 평가해야 할 그들이 도리어 신연주의 눈치를 보는 지경이다.

다만.

“오늘도 주희는 안 나오려나?”

눈치 없이 한 남자 동기가 장주희의 이름을 꺼냈다.

“…….”

웃고 있던 신연주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장주희 이름만 들어도 경기가 날 지경.

그 정도로 장주희는 의대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너도 장주희 팬이야?”

신연주의 눈치를 보던 다른 여자 동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야!”

“그런데 왜!”

“선배들이…… 자꾸 묻잖아.”

“남자들이란…….”

분위기에 곧바로 주눅이 든 남자 동기를 보며 혀를 차는 여자 동기.

“아마 못 나올 걸?”

신연주는 금세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신광 법사가 실패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엄마의 전화를 법사가 받지 않아 걱정은 됐지만 잘됐을 거라 믿었다.

앞서 신광 법사가 저주 기도가 끝나면 며칠 쉬겠다고 미리 전달한 내용도 있었기에 안심했다.

“이제 가자. 교수님 회진 돌 시간이다.”

“오늘도 다들 정신 단단히 붙들어.”

“신상주 교수님 회진이잖아.”

다섯 명은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밖으로 나왔다.

결전의 시간.

매일 아침 반복되는 회진은 주말을 빼고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하늘같은 인턴과 레지던트들도 신나게 깨지는 교수 회진.

병아리 폴리클들은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품은 채 집합 장소로 이동했다.

그 순간.

또각또각.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화사한 한 여인.

자연스럽고 압도적인 미모와 분위기에 근무하던 이들과 환자, 보호자들의 시선이 저절로 여인에게 쏠렸다.

그 모습에 신연주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장주희……. 네가 어떻게……!”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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