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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장. 저주(3). (910/1,284)

920장. 저주(3).

징징징징징징징징!

가장 뒤쪽 장막 너머에서 검은 징이 계속해서 낮은 소리로 파장을 만들며 울렸다.

새카만 대리석 단 위에는 굵직굵직한 수탉 네 마리가 단단히 묶인 채 목이 따여 피를 뚝뚝 흘렸다.

장막 위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문양의 거대 부적이 굵은 양초 촛불에 반사되어 음산하게 흔들렸다.

새카만 한지 위에 닭 피로 흥건하게 피칠 된 경면주사의 붉음.

향로에서는 새끼손가락만 한 향이 꽂혀 천천히 타들어갔다.

사방의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게 밀폐된 지하의 넓은 공간.

“가라 사달타 아다무카야 삼마 삼다라 카니라…….”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우는 한 남자.

먹빛 무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보통 무당이나 박수들이 정복한 화려한 색의 전통 무복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같은 색의 곤륜관도 썼다.

나이는 어림잡아 30대 중반.

넓은 이마와 큼지막한 코볼과 높은 콧대, 선이 굵은 사각턱.

이목구비에 어울리는 보기 좋은 풍체가 마치 체육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남자의 한쪽 손에 들린 방울.

그 또한 검은색.

딸랑딸랑.

청명함 대신 듣는 이로 하여금 두통을 일으키게 할 만한 방울 소리가 징 소리와 섞이며 지하 공간을 흔들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던 순간.

“헛!”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기도 중에 감지된 낯설고 강한 시퍼런 기운.

파르르르르르.

바람 한 점 들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밀폐된 공간에서 촛불이 심하게 흔들렸다.

파아앗!

나풀거리던 검은 한지의 부적도 붉은 빛을 토했다.

“넌…… 누……구……냐.”

남자 입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은 음색.

사람들에게 신광 법사로 불리는 남자는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신의 일을 하는 동안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살갗을 타고 느껴졌다.

사령을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공포였다.

스무 살 어린 시절 멋도 모르고 태자귀를 몸소 받아들고 그 업으로 천지사방을 헤매었다.

집안이 불우해 일찍부터 방황하던 때 그만 사기꾼 무당에게 걸렸다.

야구에 재능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능력이 뒤를 넉넉하게 봐줄 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창 예민하던 중학교 시절 아버지까지 바람을 피우고 어머니와 이혼까지 해 버렸다.

홀로된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파출부 일에서 온갖 식당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독은 돈을 요구했지만 가져다 줄 돈도 없었고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때마다 모진 매질과 함께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수모가 뒤따랐다.

그 얼마 뒤 자신보다 실력이 한참 뒤떨어진 녀석이 주전이 됐다.

도저히 그 환경에서는 정상적인 운동 스케줄을 소화할 수 없었다.

작심하고 비뚤어졌다.

급기야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서클 아이들과 어울리며 일진 그룹이 됐다.

그러다 어느 날 스트레칭도 없이 훈련하다 인대가 파열돼 버렸다.

이미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체격이 좋다보니 바로 양아치들의 짱이 됐다.

그때부터 인생은 멋대로 흘러갔고 흥청망청 살다가 감옥에도 갔다.

무면허로 음주운전을 했고 어린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가 적용됐다.

그때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전셋집 보증금을 빼 합의금으로 지불했다.

2년을 선고 받았다.

형량이 1년6개월을 넘으면서 군대가 문제 됐다.

군대 가는 셈치고 감옥에서 제대로 못된 놈들과 어울렸다.

사회에 복귀하면 이번에는 제대로 사고를 쳐보자고 결의까지 맺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부터 꿈속에서 계속해 나타나기 시작한 아이의 영혼.

머리가 깨친 아이가 피를 철철 흘리며 자신을 살려내라고 악을 써댔다.

당연히 불면증에 시달렸다.

출소 후 엄마와 함께 용하다는 박수를 찾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신이 왔다면 신내림을 종용했고 더는 버틸 수 없어 마지막 찾아간 곳에서 신을 받았다.

그마저도 결심을 했을 땐 사기꾼 무당에게 걸린 뒤였다.

쌓은 공덕이 없어 조상들이 신이 들고 나는 문의 문지기 역할을 해 줄 터주로 오지 못했다.

화경통은 고사하고 말문통신도 터지지 않았다.

허주들이 빈번히 오가고 자리잡은 신들도 이 집 저 집 귀신들에 무업의 경험이 있었던 귀신이 터주 자리를 차지했다.

죽은 아이 귀신까지 합세해 신광 법사는 처음에는 정신이 거의 다 나가 있는 상태로 지냈다.

어렵게 어렵게 신당을 차렸지만 신점 중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일쑤인 신광 법사를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개점휴업이 됐다.

어머니 또한 그사이 속병을 앓다 약을 먹고 세상을 등졌다.

온전한 정신없이 그렇게 세상을 떠돌았다.

노숙자는 양반일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갔다.

허주가 주인행세를 하면서 본래 정신을 잃은 육신은 온갖 잡귀들의 놀이터가 돼 버렸다.

그렇게 몇 해를 헤매다 어느 날 번득 신광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언론을 통해 몇 차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곳이었다.

사람 꼴이 아닌 채로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복지시설로 보낸 것이다.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으며 따뜻한 음식을 먹게 되자 몸이 빠르게 회복 됐다.

정신도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떠올려 보면 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인연도 없던 이가 병실로 찾아왔다.

그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나타나 신광을 괴롭혔던 허주들이 다 도망쳤다.

처음부터 귀신들도 두려워했던 그.

자연스럽게 신광은 온전한 정신으로 그를 따르게 됐다.

자신을 눈여겨보던 그곳의 주인.

신광을 바라보던 눈빛도 자애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신광을 불렀다.

그 남자의 기도처였다.

일반적으로 기도처로 알고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새카만 어둠의 기운이 똘똘 뭉쳐 있던 동굴.

이상하게 신광은 그 어둠의 동굴에서 거부감 대신 난생 처음 평안함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신광의 주인이 되어 자신을 따르라 주문했다.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말하던 그 남자.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신광은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기꺼이 그를 따르겠다고 혈서까지 썼다.

온전한 육신과 정신으로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내림굿 같은 형식의 신내림이 다시 시작 됐다.

신광은 그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맛보았다.

순수 악이 온몸을 물들이고 정신까지 새카맣게 만들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임을 알았지만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겸비하기 위해 공부도 시작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았던 신광은 그의 지도하에 쭉쭉 성장했다.

새로운 인생의 주인님이 된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림굿 뒤에 머리는 더 좋아졌다.

부적 쓰는 법을 시작으로 관상, 점사, 심리, 굿 하는 방법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그렇게 몇 해를 채우고 어느 날, 그는 때가 되었다며 신광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이미 본래부터 정해져 있던 신광의 길처럼 시나리오는 완성되어 있었다.

과거 길을 헤매던 노숙자가 아닌 계룡산에서 10년 동안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온 신광 법사로 둔갑해 있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강남의 한 큰 상가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찾아오는 이들의 과거는 예사로 척척 맞혔다.

그사이 신통이 생겼다.

미래를 보는 혜안통은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과거를 보는 건 가능했다.

강남 중년 부인들 상당수가 남편의 바람 문제에 민감했다.

돈과 권력이 차고 넘치면 남자들이란 본래 다른 이성에 꽂히는 게 당연한 이치.

특히 강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거주했다.

일단 부적을 써주었다.

그리고 미국 연구소에서 최근 극비에 발견된 무색무취의 정력 감퇴제를 치성 받은 성수라 속여 따로 처방했다.

당연히 정력이 떨어지니 남자들은 으레 여자를 멀리했다.

밖의 여자는 물론 집안의 와이프를 보아도 마찬가지.

하지만 신광의 한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이 멀리하는 그 여인들을 치성 기도와 더불어 신들이 위로해 준다는 명목으로 품에 안았다.

얼마 못 가 뜨거운 사이가 됐다.

원체 몸이 좋았던 신광이었기에 대부분의 여인들이 다 빠져들었다.

철저하게 교육 매뉴얼대로 움직였기에 어떤 누구에게도 마음 한 자락 빼앗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남의 재력 있는 여사들을 한껏 농락하고도 돈은 돈대로 벌었다.

모시는 신주가 워낙 남자들을 싫어한다고 말을 풀어 여자 고객들 위주로 손님을 받았다.

남편 승진 청탁 같은 일이 들어오면 주인님의 힘을 적절하게 써 처리했다.

어차피 강남에 주거지가 있을 정도면 기본 능력은 다들 갖추었다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주인님의 힘은 대단했다.

정치권에도 가닥가닥 연줄이 닿아 있었다.

정치에 욕심 있는 자들에게 거액을 받고 시장, 기초 단체 의원은 물론 국회의원까지 공천을 내줄 정도의 능력이었다.

몇 차례 반복되자 일시에 소문이 쫙 돌았다.

한 번 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찾아오지 못하도록 고객 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조근영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주순자도 한때는 신광을 찾던 열렬한 신도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드나들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주인님께 경계하라는 계시를 받고 당장 내쳤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따지지 않고 주인님의 뜻을 따랐다.

당연히 모든 게 만사형통이었다.

돈은 돈대로 벌고 재미는 재미대로 봤다.

미도산 자락 아래, 가장 좋은 넓은 터에 기도처를 마련했다.

기도처에서 본격적으로 저주술을 펼쳤다.

신광이 직접 배워 익힌 핵심 무업은 저주술.

신내림을 받을 때 신광은 주인님의 주제로 승천하지 못한 사악한 이무기급 구렁이를 사령(蛇靈)으로 받았다.

능력이 가히 대단했다.

구렁이를 조종해 저주 대상을 일시에 나락에 빠트릴 수 있었다.

그만큼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저주굿을 행했다.

신분이 확실하고 자신에게 모든 걸 받칠 수 있는 허점 있는 여인들에게만 이 특혜를 베풀었다.

수억이 호가해도 여인들은 주저 없이 애용했다.

남편의 첩부터 시작해 시댁 식구, 잘난 체하는 이웃이나 친구까지 그 대상이 됐다.

돈이 넘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질투심이 남다르게 심했다.

오늘도 그런 저주 굿판 중 한 건을 진행 중에 있었다.

신광에게 몸을 다 바친 열성 신도들 중 한 명이 딸의 앞길을 방해하는 동기를 치워달라고 굿을 청해왔다.

기꺼이 응했다.

저주굿판이 벌어진 뒤면 더욱 더 신광의 손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가로 몸과 돈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털어갈 것을 그들은 몰랐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탈이 생겼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해꾼.

- 그런…… 넌 어디서 굴러먹던 잡종이냐!!!

귓구멍을 뚫고 울리는 천둥 같은 외침.

“!!!”

신광은 심장이 뚝 떨어져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상대도 영의 세계를 아는 놈이었다.

사령에 빙의된 상태로 놈을 살폈다.

한창 젊은 놈이었다.

뒤쪽에 아둔해 보이지만 기가 맛있어 보이는 젊은 귀신을 달고 다녔다.

저주 당사자의 오빠라고 했다.

정확히 저주 당사자를 모르고 굿판을 벌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름과 생일, 아끼던 물건을 받아 저주했을 뿐이다.

“건……방……진…… 놈!”

신광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귀신을 잡아먹으려다 혀가 잘렸다.

기가 끊긴 것에 불과하지만 고통이 생생하게 전달 됐다.

딸랑딸랑딸랑!

방울을 들고 있는 손에 어둠의 힘과 기가 더해졌다.

징징징징징징!

주인님이 함께 보내준 제자가 징을 더 강하게 두들겼다.

파스스스스슷.

엄청난 탁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공간을 초월해 사령에게 투사 됐다.

크아아!

신광 법사가 입을 쩍 벌렸다.

혀가 뱀처럼 날름거렸다.

그리고 단숨에 상대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힘껏 치고나갔다.

***

- 구렁이가 갑자기 강해졌어요!!!

혼쭐이 난 장립이 호들갑을 떨었다.

저주굿에 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경험한 적도 없다.

남사고나 박유봉 신선이 가지고 있는 짤막한 지식이 전부였다.

저주 당사자의 급살을 목적으로 펼치는 저주를 거는 술법.

선관이나 보살, 도교, 장군, 별상, 대감, 일월 하다못해 시왕이나 사자도 아닌 사악한 악신들을 신내림으로 받은 자들이 그 짓을 펼쳤다.

단골네나 심방, 명두형, 보살과 법사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통해 제대로 악신을 신굿으로 받았다.

본래의 영혼을 보호해 줄 만한 조상신도 없이 선신이 다 포기해 버린 자들에게나 허락됐다.

지금 눈앞의 이무기급 구렁이를 부릴 정도라면 사람 목숨 여럿 죽였을 정도의 악인은 되어야 신내림이 가능했다.

촤랏촤랏!

이빨을 드러내며 날 노려보는 사령.

나의 영혼을 노렸다.

그 와중에도 똬리를 더 단단하게 말아 주희를 옥죄었다.

욕심이 아주 많은 영이었다.

여색을 탐할 때 풍기는 비릿한 노린내도 아주 진하게 났다.

빠른 구제가 필요했다.

그 순간.

- 옵니다!!!

장립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촤라라랏.

공간을 헤이며 정면으로 날아오는 새카만 어둠의 기운.

선한 카르마 포인트를 머리 위를 향해 뿌렸다.

- 최영 장군이 힘을 보탰습니다!

- 별상 장군이 분노의 창을 꺼내들었습니다!

- 벼락대감이 뇌전을 들고 준비 중입니다!

- 오방신장이 강림하였습니다!

- 제멸선관이 당신의 오른팔을 축복하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선신들이 나에게 감응했다.

- 으헛!

사령보다 장립이 먼저 기겁했다.

몇 겹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오른손.

- !!!

공격해 오던 사령의 노란 눈동자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갈!!!”

한 방에 터지는 사자후.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들던 사령의 주둥이를 향해 나의 오른손이 벼락처럼 뻗어나갔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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