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7장. 회고록. (907/1,284)

917장. 회고록.

- 트럼프. 이번 파티 아주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 이대로라면 내년이 기대되는군요.

“저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넉넉하게 지원하겠습니다. 파티에 불러만 주십시오.

“초청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그때도 로버트가 오나요?

“글쎄요. 그건 확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가 날 확실히 지원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 그거면 됐습니다. 베토벤 재림자의 연주도 아주 훌륭했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어 다들 놀라고 있습니다.

“저에게 저도 놀랐습니다.”

- 하하하. 그 말도 재밌군요.

‘재밌어? 흐흐흐. 그래. 너희들이 날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아도 된다. 난 내 욕망만 채우면 그뿐이다.’

트럼프는 이런 일이 아니고도 바빴다.

파티가 끝났음에도 여운은 계속 됐다.

생각지 못한 이곳저곳에서 그에게 연락이 왔다.

참석한 자들은 고마움을 표했고 오지 못한 자들은 아쉬움을 전했다.

트럼프는 단박에 미국 사교계의 중심이 됐다.

앞으로 약빨이 다할 때까지 그의 파티는 매번 대성황을 이룰 것이다.

대권으로 가는 길이 크고 넓어졌다.

이 모든 게 다니엘 덕분.

“닉. 오늘 전화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 그래요, 트럼프. 당신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통화가 끝났다.

“오늘따라 콜라가 달콤하군. 흐흐흐.”

와인이나 술 종류는 평소 즐겨 마시지 않는 트럼프.

얼음이 듬뿍 담겨 있는 빅 사이즈 컵 콜라를 들이켰다.

식탁 위에는 큼지막한 패티와 치즈 몇 장이 들어있는 햄버거가 놓여 있다.

간단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트럼프의 저녁 식사.

격식을 따지며 몇 시간씩 식사하는 걸 트럼프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간이 부와 행복을 가져오는 열쇠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절약해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욕망에 투영할 때 보람과 만족감을 배가 됐다.

봉사와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내기보다 자신을 위해 온전히 사용할 때 그 만족도가 더 컸다.

개들과 놀아주는 것보다 미녀들과 뜨거운 밤을 보내고 농담 따먹기를 더 즐겼다.

TV에 나오는 미녀들과 연락해 함께하는 사회적 작용에서 더한 만족감을 느꼈다.

자기를 위해 사용되는 모든 시간 속에서 트럼프는 행복했다.

풍경을 보고 경외감을 느끼는 것보다 돈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부동산을 보면 흥분 지수가 더 올라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가용 비행기도 주문했다.

사람들이 허세라 손가락질했지만 시간의 법칙을 깨우친 트럼프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하고 싶은 욕망만큼 시간도 돈만큼 신중하게 사랑으로 대했다.

“다니엘……. 널 위해. 건배!”

콜라 잔을 들고 트럼프는 허공을 향해 건배를 외쳤다.

모든 단물을 다 빨아 마실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사방에 광고를 해 두었기에 민주당 쪽은 다니엘과 접촉을 꺼릴 게 확실하다.

생각보다 냉정한 미국 정치계.

영국의 오래된 정치 파벌만큼이나 서로를 향한 증오는 켜켜이 쌓여있다.

트럼프도 다니엘과 로버트 라이언을 세트로 묶어 정치 시장에 내놓고 홍보했다.

계획이 제대로 먹혔다.

알아서 정치 자금을 바치겠다는 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트럼프~ 뭐가 그렇게 즐겁나요?”

그때 샤워실에서 촉촉하게 젖은 모습으로 반라를 드러낸 여인이 나오며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여배우.

뉴욕에 버젓이 아내가 있지만 트럼프는 다른 여성을 품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 나의 비너스. 당신을 기다리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오.”

아무렇지 않게 느끼한 멘트를 남발하며 트럼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망에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

“그 지루함……. 제가 확실히 날려드리죠.”

여배우는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왔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타월.

꿀꺽.

트럼프가 촉촉하게 젖은 침을 삼켰다.

***

파르르르.

임성철 회장이 몸을 떨었다.

부탁하는 하는 입장이 돼 보니 이렇게 떨어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 내에서 절대 우위로 군림하게 됐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장태산을 만난 뒤 점점 을의 입장이 됐다.

급기야 이제는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목숨까지 장태산 손에 달려 있었다.

이 가볍게 편한 몸뚱이도 언제 걷어갈지 모르는 입장.

그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천하의 오정 주인이라는 간판도 장태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하기 어려운 부탁을 해 놓은 상황.

“흐음.”

확답 대신 짧은 신음을 흘리는 장태산.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는 부탁이다.

인터넷 뉴스로 보니 아들은 비상 경영체제를 잘 꾸려가고 있었다.

오정에 인재들이 넘치니 큰 실수가 아니면 느린 걸음으로라도 전진할 것이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오정 같은 거대 조직은 한 번 노선을 잘못 잡으면 본래의 속도로 되돌아오는 게 어렵다.

과거 자동차 사업을 정리할 때처럼 팔다리를 잘라야 어느 정도 정속 회복이 가능했다.

“아직도 미련이 많으십니다.”

담담한 장태산의 목소리.

가벼운 힐책이 담겨 있었다.

“미안하네…….”

임성철 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게 부질없음을 깨달았지만 다시 건강한 육체를 입자 오정의 현실이 눈에 밟혔다.

선친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 처음과 끝이 오정인 임성철 회장.

심사숙고할 만한 시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지금 느끼는 이 깨달음을 어떤 식으로든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와인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고맙네.”

와이너리답게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바가 곳곳에 마련돼 있었다.

“2011년 산 레드 어떻습니까?”

“그 녀석이 맛있더군.”

“요정님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요정?”

“모르셨어요? 이 와이너리는 와인의 요정님이 술을 만듭니다. 로버트 라이언의 조상님이시죠.”

“…….”

가끔 가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장태산을 이제는 어지간히 믿었다.

장립 귀신과 소통하게 되면서 그런 귀신이 처처에 있다는 걸 알았다.

“립은…….”

“지금 미국 유령 아가씨들과 지하 저장고에서 파티 중입니다. 기 빨리지 않으시려면 절대 내려가시면 안 됩니다.”

“고, 고맙네.”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드십시오.”

장태산이 와인이 듬뿍 담긴 잔을 내밀었다.

묵묵히 받아드는 임성철 회장.

“계약 위반이신 거 아시죠?”

“미안하네.”

“죄송한 말씀이지만 회장님은 이제 산 사람이 아닙니다. 장립의 육신을 사용하고 있지만 죽은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산자들의 일에 개입하면 안 됩니다.”

장태산은 더욱 냉정하게 말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임성철 회장은 죄인이 된 듯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욕심이 과한 부탁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 목전에 있을 때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내심 부끄러웠다.

그러나 장태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장태산의 진지한 물음.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네.”

“뭘 말입니까?”

“돈보다 시간이 귀하고, 성장보다 성숙이 아름다운 인생의 결말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네.”

“흐으음…….”

장태산은 잔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임성철 회장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르침이라…….”

혼잣말을 되뇌는 장태산.

그의 시선이 임성철 회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

오정의 거인이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아무리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황제라 해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는 순간 일반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직접 경험은 줄게 마련이다.

아래에서 위로 전해는 보고서에 익숙해진 만큼 폭넓었던 시야는 좁아지는 수가 있었다.

모든 시간들이 계획적으로 절약되고 세분화된 만큼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적어진다.

지금처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야 알게 되는 인생의 참맛.

나도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한 후 얻게 된 회귀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내되 마음의 여유는 잃지 말아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근본 이유는 웰빙이다.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고 타인들과 만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습득하는 것이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신들이 허락한 인간 여행기다.

그런 점에서 임성철 회장의 깨달음은 늦은 감이 있었다.

지금의 깨달음을 기반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해 남은 인생을 꾸릴 수 없는 처지다.

나로 인해 모든 게 얽매어 있었다.

생명 연장의 기회를 얻고 남은 인생을 저당 잡혔다.

그의 얼굴에서 고뇌가 엿보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부탁을 들어 줄 수 없었다.

섣불리 부탁을 받아줄 수 없는 중요한 계약이었다.

나조차도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몰랐다.

임성철 회장 개인에 그치지 않고 나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게 자명했다.

“무얼 전달하고 싶으십니까?”

중요하게 짚어 보아야 할 문제였다.

누가 들어도 인정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하늘도 동의할 수 있는.

“난 장 회장이 보여주기 전까지 몰랐네. 내가 진짜로 원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말일세.”

“이제는 깨달으셨습니까?”

“조금.”

“설명해 주십시오.”

억지로 유도하지 않았다.

임성철 회장이 느꼈을 깨달음은 작지 않을 터였다.

나도 배움을 위한 귀를 활짝 열었다.

“많은 건 아니네. 장 회장 자네도 알 것이야.”

“경청하겠습니다.”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살아 있는 어떤 시간도……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네.”

“…….”

심오했다.

단순히 짧은 말 한마디가 아닌 깊이 생각해야 할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렵나?”

“쉽게 표현해 주시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의미네.”

“아!”

이해가 팍 왔다.

“사는 게 즐거움이지만 동시에 고통이었네. 성장하라는 족쇄와 주문에 걸려, 나의 세월을 미친 듯 살아왔네. 오정을 키우기 위해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네. 그게 불의여도 말일세.”

짧은 회고록을 듣는 듯했다.

대부분 인간들은 임성철 회장만큼도 살지 못한다.

도전해 보기도 전에 겁먹고 포기하는 자들이 태반이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무조건 세상을 원망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 어느 날 수명이 다해 우주 먼지로 돌아간다.

무겁고 축축하게 가라앉으며.

“그 깨달음의…… 경위가 어떻게 됩니까?”

“장 회장 자네 덕분이네.”

“???”

“부러워.”

짧은 대답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날 보는 눈동자가 뜨겁게 이글거렸다.

“그래서 더욱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단 말일세.”

임성철 회장의 목소리에서 뜨거운 열의가 느껴졌다.

“부를 축적한다는 건 노동을 팔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의미하네. 그게 다들 행복인 줄 착각하지. 하지만 장 회장을 보면서 확실하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네.”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주변에 믿을 만한 친구와 절세 미녀들이 넘치잖나! 비행장 딸린 이 와이너리도 장 회장 거지? 전에 샀다던.”

회장님!!!

임성철 회장의 심오한 깨달음을 듣고 싶었는데 얘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아들 녀석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똑똑한 놈들에게 아웃소싱 주고 멋지게 살라고 말이야! 먹고 살만큼 벌었잖아. 그러니까 더 늙기 전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느껴보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네! 장 회장 자네처럼!”

“아니 저 회장님…….”

덥석 손을 붙잡는 장회장.

뜨겁다! 미친!

“장 회장, 정말 부럽네! 다시 태어나면 립이 말한 것처럼 나도 장 회장처럼 살 거야!”

“…….”

임성철 회장의 돌발 행동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 노인네 도대체 뭘 깨달은 거야!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처럼 변한 임준형 부회장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그건 아닌 듯했다

“저 회장님…….”

띠리리리리리리.

그때 스마트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씨큐리티의 한진웅 대표.

이 어이없는 상황만큼 강한 불길함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띠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 회장님. 일이 생겼습니다. 급히 한국으로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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