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장. 부탁.
“로마제국…….”
황혼이 진하게 물든 창밖을 내다보며 로버트 라이언은 로마제국이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지식인인 로버트 라이언이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모를 리 없었다.
초창기 시절 로마의 시조 가문들이 모여 피로써 국가를 지켰다.
시민들은 기꺼이 자의로 군인이 되어 제국을 수호하고 영토를 넓혔다.
미국도 그랬다.
하지만 다니엘의 말처럼 의무를 팽개치고 권리만 주장하다가는 곧 멸망이 닥쳐올 것이다.
로마를 방어해 주던 용병들은 로마제국의 결속력에 생긴 틈을 보고 배신을 했다.
그리고 터져 버린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뚝.
어떤 식으로든 막을 수 없었다.
로마 시민들은 손에서 방패와 창을 내려놓았다.
비명 속에서 모든 걸 빼앗겼다.
적들이 눈앞에 몰려오는데도 다른 이민족들을 이용해 방어하려다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평화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걸 그들은 망각했다.
그 뒤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아마겟돈.
강자들은 약자들을 짓밟았고 흉포한 이민족들이 사방에서 날뛰었다.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 전까지 위대했던 제국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지금의 미국이 그 꼴이 날 거라고 보스는 예언했다.
독립전쟁을 계기로 남북 전쟁과 세계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각국 국지 분쟁에서 평화 경찰 노릇을 하며 미국 시민들의 피로써 자유를 수호해 왔다.
물론 국가적 이익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펴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공감할 만한 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점점 세계 경찰 노릇에 지쳐가고 있는 미연방 시민들.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피의 대가로 유지돼 왔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엄청난 적자를 보는 미국 국가 경제.
무한으로 발권되는 채권을 신흥국들이 구입해 주었다.
강자에 대한 충성 서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위정자들은 기꺼이 그 대가로 미군을 세계 곳곳에 파병했다.
공산주의와 테러 조직에 맞선 위대한 병사들이 있어 주었기에 누구도 미국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 정도가 미국을 상대로 대항했지만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그들도 파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머릿속에 돈과 여자만 들어 있는 인사였다.
그의 삶에서 인문철학의 부재는 심각했다.
동물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다.
동정심은 쥐꼬리만큼도 없고 사회성도 뒤떨어졌다.
오로지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으며 앞으로 돌진하는 인간이다.
햄버거를 입에 물고 포르노 배우와 뒹굴기를 좋아하는 호색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능력이 대단한 부자 같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물론 부동산 경기를 보는 시각은 탁월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미국의 미래를 보는 거시적 시각은 기대할 수 없다.
대통령이 된다면 수많은 자리를 사고 팔 것이다.
가족과 권력을 나눠 먹을 것이며 인종차별에 기름을 끼얹을 게 뻔했다.
대놓고 백인 시민권자를 위해 살겠다고 천명한 인간이다.
그 말에 환호하던 무지한 백인 유권자들.
“신이시여.”
로버트 라이언은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답이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의 달콤한 언변에 놀아나는 연방 시민들은 미처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식으로 미국의 근본 저력을 갉아먹을 기생충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력한 예방 백신을 맞아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보스께서 말씀하셨다. 파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씨앗을 심으라고.”
로버트는 보스가 남긴 마지막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신과 같은 자신의 보스.
그가 보인 선지자급 예언은 지금까지 대부분 다 맞아떨어졌다.
그는 유일하게 돈과 성공만을 바라지 않았다.
난민들과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부도 엄청나게 했다.
투자 수익의 10%를 사회를 위해 환원토록 조치한 것도 보스였다.
다른 투자자들이었다면 절대 승낙하지 않을 조항이지만 보스는 흔쾌히 결행했다.
누구도 선뜻 따라오지 못할 배짱.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부를 소유했지만, 미국 갑부들처럼 돈 자랑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그 모든 영광과 스포트라이트를 다 받았다.
보스의 진심어린 조언이 전해지자 울컥해진 로버트 라이언.
“당신만이 나의 길이고 진리입니다. 보스……. 당신을 영원히 존경하겠습니다.”
듣는 이도 없지만 허공에 대고 뜨겁게 고백하는 로버트 라이언.
대신 붉게 물 드는 황혼 빛이 그를 따스하게 감쌌다.
***
이, 이게 뭐야!!!
귀신의 광소가 서라운드로 들렸다.
하지만 난 멘붕에 빠지기 일보 직전.
과거 이곳 지하를 홀로 점령하고 있던 다리우스 와이너리의 와인 요정 할배.
- 어! 자네 왔나!
자네?
나를 향해 로버트를 닮은 중년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한껏 여유가 넘쳐 보였다.
“요정님?”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 하하. 내가 좀 변했지?
좀 변한 게 아니라 개천에서 용 났다.
내가 카르마를 쏜 덕분에 신이 된 와인의 요정.
알코올에 절은 딸기코가 아니다.
통통하고 풍채 좋았던 몸도 날렵해졌다.
키도 더 커졌다.
큼지막한 단추가 달린 고풍스러운 턱시도를 입고 있다.
서부 영화에 나오는 동네 유지 스타일.
머리에는 영화에서 보던 큼지막한 신사 중절모를 썼다.
그리고 손에는 와인 잔.
자신의 이름도 까먹고 중언부언하던 와인 요정이 아니다.
눈동자는 초롱초롱하고 맑다.
진짜 귀신과 신은 레벨이 달랐다.
- 형님. 코너 아저씨 스타일 죽이죠? 영화 대부의 주인공 같지 않아요?
벌써 통성명을 마친 장립과 코너 라이언.
편하게 아저씨란다.
장립 친화력 하나는 인정할 만하다.
“인간계에 너무 자주 내려오시는 것 아닙니까?”
코너 라이언을 가볍게 질책했다.
신과 인간계는 엄연히 달랐다.
내가 로버트의 얼굴을 봐서 포인트 듬뿍 쏴가며 신을 만들어 줬건만 이곳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다.
- 레이디들이 날 어찌나 보고 싶어 하던지…….
코너 라이언이 한쪽을 힐끔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흠칫 살이 떨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으스스 한기가 들었다.
- 형님. 죽이죠? 다들 한 미모 합니다. 흐흐흐.
귀신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장립과 코너 라이언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 지금 보이는 장면은…….
유령들이다.
흐릿한 영체들이 공간을 떠다녔다.
생전 여자들이 확실한 듯 체구가 작았다.
포인트가 부족한 듯 실체화된 형상이 거의 없었다.
수는 10여 명이 넘는 것 같다.
- 형님. 저기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 보이세요? 이름이 수잔느라고 해요. 옆집 농장주 막내딸이래요. 올해 나이는 열일곱. 죽이죠?
죽이긴 뭘 죽여!
이미 죽었잖아!
부채는 고사하고 음습한 기 덩어리가 날 보고 웃는다.
소름이 바짝 돋았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장립.
아오! 이거 완전 귀신들 놀이터다.
이걸 파라다이스라고?
선녀급도 아닌 하급 유령들과 판을 벌인 코너 라이언과 장립.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 벌써 가려고? 루시아가 자네 소개시켜 달라고 하던데. 아깝지 않아? 애가 아주 괜찮아. 엉덩이도 튼튼해서 아이들 열 명은 날 수 있어!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애?
덩치 큰 기 덩어리가 날 보고 웃는 것 같다.
온몸의 털들이 바짝바짝 솟았다.
아무리 내가 신급 수준이지만 하급 유령들과의 썸은 사양이다.
- 형님. 오늘 완전 물 좋아요!
야! 너 진짜! 아오…….
파르르 주먹이 울었다.
이곳을 추천한 내가 어리석었다.
장립!
- 넵! 형님!
잘 놀다 와라.
내일 아침 해 뜨기 전에 내 앞에 나타나면 너 천도다!
- 걱정 마십시오! 아직 초대 손님들이 덜 왔답니다! 확실히 수질 확인하고 내일 보고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지하 창고를 나왔다.
유령들만의 파라다이스.
죽어서도 살아생전 습관이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걸 또 확실히 알았다.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대단한 걸 기대했던 내가 문제였다.
“장 회장.”
지상으로 올라오자 임성철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에 고민이 많아 보였다.
“편찮으십니까?”
걱정이 됐다.
트럼프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계속 무리했던 임성철 회장.
여배우 두 명이 임 회장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몸이 강철이라고 해도 버티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임성철 회장이 말끝을 흐렸다.
자꾸 내 눈치를 살폈다.
평소 임성철 회장과 어울리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임성철 회장은 깊은 대화가 필요해 보였다.
“그게…….”
주저하는 모습이 뭔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돈 문제는 아닐 터.
임성철 회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조세 피난처 계좌에 엄청난 금액이 들어 있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저런 표정 처음이다.
“편하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이미 석양의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진 평원의 다리우스 와이너리.
창 밖 가로등 빛이 운치 있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염치없는 부탁을 해야겠네.”
염치?
주저하면서 어렵게 입을 여는 임성철 회장.
심각한 얘기가 확실했다.
임성철 회장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작은 부탁이 아닐 것이다.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떤 부탁입니까?”
날 조용히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그와는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 있는 나였다.
임성철 회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포인트와 바로 연결 됐다.
그만큼 고민 해결은 빠를수록 좋았다.
“장 회장.”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결심한 듯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
“말씀하십시오.”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준형이에게…… 날 데려다 주게.”
“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