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장. 몰락의 예언.
“그랬어……. 내가 그를 너무 몰랐어.”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엠마 피어스는 자신을 반성했다.
밀림의 왕자는 그녀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남자였다.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자신의 매력에 뜨겁게 화답할 거라는 소녀의 환상이 무참히 깨졌다.
지금껏 그래왔다.
어린 시절부터 엠마 피어스는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 과거가 대단한 착각이었음이 확인됐다.
많지 않은 연애 경험 스킬은 다니엘에게 통하지 않았다.
미처 예상치 못한 강력한 경쟁자까지 등장했다.
그래도 배포 좋게 밀고 나갔던 엠마 피어스.
두 번째로 차였다.
그것도 말이 아닌 음악으로.
“하아.”
홀로 자리한 비행기 1등석에서 엠마 피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귓가에 아직도 선명하게 들리는 듯한 베토벤 소나타 9번.
피아노의 시인 포고렐리치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내던 베토벤 재림자의 바이올린 연주.
짜릿했다.
냉정한 거절이었지만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감동에 젖어 눈물까지 쏟았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완벽한 듀오는 처음 봤다.
앵콜 연주는 그 뒤로도 몇 곡이 더 이어졌다.
난잡한 트럼프의 파티가 고품격 연주회장이 되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이들까지도 클래식에 매료됐다.
깊은 잠에서 깨듯 꿈에서 깨어났다.
결과는 사라 요한슨과 엠마 피어스 둘 다 다니엘과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다니엘은 그와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였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그 어떤 거절 의사보다 아름다웠다.
사라 요한슨이 했던 말들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다니엘은 마음이 따듯한 남자이지만 또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엠마 피어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지금 혼자였다.
그 상태로 언제까지 갈 수는 없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게 마련이다.
다니엘이 자신에게 아예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반드시 성공할 거야! 내 힘으로 다니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날 성장시키겠어!”
엠마 피어스는 막연했던 미래에 대한 목표를 다시 재정립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사라 요한슨 못지않은 가문의 배경.
그 환경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케네디 가문처럼 미국민 대부분이 좋아할 만한 명문가로 키워낼 것이다.
여론은 여전히 피어스 가문에 우호했다.
평생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아빠의 정치 인생.
가족 구성원 모두 구설에 한 번도 오른 일이 없다.
엠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컸다.
영향력 있는 미국인이 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셈이었다.
“다니엘. 기다려요. 당신 앞에 더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날을 빨리 만들 거예요.”
엠마 피어스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지금 현재도 다니엘의 곁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보태는 조력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 그렇지……. 다니엘이 어떤 남자인데.”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여왕 로리아나가 보고서를 보고 대단히 만족했다.
트럼프의 별장까지 직접 찾아가 조우했던 다니엘,
그와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야훼도 예상치 못한 로리아나의 도발과 다니엘의 자연스러운 반응.
거센 바람과 벼락을 뚫고 로리아나는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하지만 뜨거웠던 키스도 로리아나의 욕망을 식히지는 못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난로에 한 컵의 물을 부은 것만 못했다.
아직도 입술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다니엘의 부드럽고 거친 키스.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다.
트럼프의 파티에 사라가 참석했다는 걸 안다.
뿐만 아니라 뭇 미녀들이 대거 참석하리란 건 당연한 수순.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전해질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얻게 된 트럼프의 별장 파티장 정보.
로리아나는 초조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개운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다니엘을 차지하지 못했다.
엠마 피어스라는 새로운 여인이 다니엘 앞에 나타났지만 헛물만 켜다 돌아갔다.
그리고 입수한 베토벤 소나타 멜로디.
로리아나는 녹음되어 전달된 연주곡을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그녀 귀에는 마치 천사들의 합창처럼 들려왔다.
“다니엘…… 당신은 정말…….”
로리아나는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날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야훼.
로리아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야훼를 잘 알고 있는 그녀.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기도나 해야겠다.”
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숄을 착용했다.
다니엘을 이성으로써 사랑하지만 야훼는 로리아나에게 아가페적인 사랑의 대상이었다.
***
“정말 존경합니다. 보스.”
“뭘 말입니까?”
“바이올린 하나로 좌중을 압도할 수 있는 실력자는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단박에 스타가 되셨습니다.”
“언제는 아니었나요?”
“하하. 보스의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더 대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로버트 라이언과 그의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와이너리로 왔다.
트럼프의 별장 파티는 잘 끝났다.
날 두고 언쟁을 벌이던 두 여인은 가볍게 물렸다.
후회는 없다.
귀신 장립도 연주가 끝난 뒤 입을 다물었다.
네로 포고렐리치와의 생각지 못한 협연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걸 제대로 맛 본 천재 피아니스트.
그에게 고통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가르쳐줬다.
누구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같은 하루가 환희의 순간일 수 있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것.
포고렐리치를 사랑했던 아내는 그에게 꼭 전해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함께했던 피아노 건반과 연주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걸 추억이라 말하지만 난 다르게 말하고 싶다.
순간이 영원이 되어버린 순간이라고 말이다.
“하루에 한 발 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감이 인생의 맛 아니겠습니까.”
“보스는…… 제 참 스승이십니다.”
로버트 라이언의 말은 언제나 진솔했다.
- 이 아저씨가 그렇게 돈이 많아요? 형님보다 더 부자예요? 그런데 왜 보스라고 불러요? 이해를 할 수가 없네.
귀신도 동행해 왔다.
임성철 회장을, 와이너리로 함께 데려왔다.
리장창이나 그 밖의 감시자들에게 장립과 나의 친분이 대단하는 걸 기회가 되는 대로 알려야 했다.
외부로의 정보가 완벽하게 차단되는 내 소유의 와이너리.
의혹과 추측을 대거 생산해 내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
임성철 회장은 와이너리를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잠시 사색의 시간을 갖겠다고 혼자만의 시간을 요청했다.
한국 제일의 부자로 살았지만 이런 문화는 미처 누려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 비행장 딸린 와이너리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
용인의 서킷장은 내 와이너리에 명함도 못 내민다.
나라와 나라를 넘나들며 누리고 사는 삶의 레벨이 달랐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와이너리 비행장에 내릴 때 이미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임성철 회장.
귀신은 멋도 모르고 좋다고 날뛰었다.
모두가 내 사유지라고 밝히지 않았다.
골치 아프던 와이파이의 허점을 찾아냈다.
장립이 아니라 내 쪽에서 선별적으로 정보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적절한 수준의 카르마 비용만 지불하면 신계에서도 안 되는 게 없었다.
신계도 이승의 자본주의와 다를 게 없다.
지금도 장립은 내 의식의 흐름을 다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필터링을 장착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만 전달 됐다.
장립은 아직 눈치 못 챘다.
- 부자가 좋긴 좋네요.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저 아저씨가 미국에서 요즘 가장 잘나가는 부자라던데……. 진짠가 봐요. 비행장 딸린 개인 소유 와이너리라니요. 회장님 충격 받아서 계속 와인만 마셔요.
귀신아. 이거 다 내 거다.
흐흐흐.
귀신이 괜히 건방져질까 봐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립.
- 넵! 형님!
지하에 가봐.
그곳에 가면 네가 좋아할 만한 귀신이 있다.
- 진짜요? 리얼리?
아주 대만족일 거야.
형 한 번 믿어봐.
- 알겠습니다.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귀신이 귀신같이 사라졌다.
지하에 도착한 순간 립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한다.
최소 립보다 레벨이 높은 와이너리 요정.
신이 되었지만 천상보다 이곳을 좋아했다.
카르마 포인트를 사용해 레벨을 살짝 높여줬다.
와인 숙성 관련한 일은 딸기코 요정이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한 와인은 어떤 회사의 와인보다 맛이 좋아졌다.
“보스…….”
로버트 라이언이 날 불렀다.
할 말이 있는 표정.
“참으면 속병 납니다. 하고픈 말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하십시오.”
나 그렇게 꽉 막힌 보스 아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좋은 보스다.
“진짜 트럼프를 밀어주실 생각입니까?”
로버트 라이언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지만 양심에 떳떳하지 못한 듯했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트럼프.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이라면 트럼프가 쥐게 될 미국의 끔찍한 미래가 훤히 보일 것이다.
지금껏 미국이 벌어놓은 유무형의 자산을 모두 까먹게 될 걸출한 인물.
“그렇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예전에도 묻지 않았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트럼프를 선택하는 순간 미국민을 떠나 세상 사람들 모두 괴로워 질 수 있습니다. 애써 구축한 자유 시장 경제주의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똥 맛 수프를 직접 먹어봐야 그 겉멋에 속은 걸 알 테니까요.”
“…….”
로버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국인이다.
지금까지 보인 행보에 의하면 로버트 라이언은 미국을 무척 사랑했다.
“로버트.”
“네……. 보스.”
생각에 잠긴 로버트 라이언.
“욕망을 숭배하지 않으면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
“난 욕망을 좋아합니다. 여러 안전한 사회안전망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개인의 욕구 실현의 장은 없습니다.”
담담하게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개인 욕망 성취를 위해 인간은 열정이라는 에너지를 태워 인생을 움직였다.
“하지만 문제는 욕망을 넘어 탐욕을 부리기 시작하면 탈이 난다는 겁니다.”
로버트가 날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여러 말들이 그를 자극했다.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미국이라는 회사는 앞으로 10년 안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수십 년 동안 시장의 신뢰를 받아 흑자를 유지하던 회사가 있습니다. 매년 흑자를 유지해 주가도 높고 주주들에게도 인식이 좋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견치 못한 사건으로 적자가 발생했습니다. 다들 그 정도야 버티겠지 예견했지만 갑자기 파산을 선언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로버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규모 흑자인 회사가 그렇게 망하게 되는 경우라면……. 횡령이나 배임 문제입니까?”
“일부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탐욕과 관계가 있습니다.”
“탐욕이라…….”
로버트가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가 나보다 살아온 세월이 길지만 시야는 나보다 넓지 않았다.
삶이 힘들어 목숨을 포기하려 했던 것과 누군가를 위해 몸을 던져 죽었던 경험은 엄연히 달랐다.
“바로 주주들의 끝없는 탐욕 때문입니다.”
“주주들요?”
“흑자를 내는 동안에 주주들은 과한 배당을 요구했습니다. 주식만 쌓아두면 언제나 부를 유지할 거라 생각하고 회사에 요구하기만 했습니다. 주주들의 성화에 책임질 대주주가 없는 경영자들은 배당을 남발했습니다. 미래 투자자금이나 위기 시에 버틸 수 있는 저축을 무시했습니다. 어차피 성과금만 받으면 됐기에 미래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년 주주 배당 이익만 극대화하면 돈방석에 앉게 되니까 말입니다.”
“아!”
로버트가 말의 요지를 바로 알아들었다.
“과도한 주주환원과 빚까지 내며 자사주를 매각한 회사가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은 짧고 냉정했다.
“흐음.”
신음을 흘리는 로버트.
“미국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제 사회를 위해 흘린 피 값과 동맹들에 대한 예우로 절대 갑으로 군림했지만 곧 위기가 찾아올 겁니다. 쉽게 돈 버는 법을 알아 일은 하기 싫고 주주환원만을 요구하는 게으름과 탐욕에 젖은 시민들에 의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뽑게 될 겁니다.”
“!!!”
“트럼프는 제가 밀지 않아도 당선됩니다. 로버트 같은 미국을 걱정하는 엘리트들이 판단하지 못하는 미지의 힘이 작용합니다. 미국이 무너지기를 원하는 이들이 공작을 펼칠 겁니다. 그리고 탐욕 가득한 본심을 드러낸 시민들이 힘을 보탤 겁니다.”
단오하게 미국이 직면할 재앙에 대해 언급했다.
상대가 로버트이기에 더 확실하고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신의 땀과 피를 흘리지 않고 타인의 것을 착취하면 어느 날 몇 배로 그 값을 물어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주를 창조한 첫 번째 신이 만들어 놓은 불변의 법칙입니다.”
“신이시여…….”
로버트는 바로 신을 찾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보통의 미국민과 달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챘다.
“미국 시민들은 어리석게 그동안 축적했던 자기자본을 까먹을 겁니다. 세상 모든 이들을 거지로 만들고 자신들만 행복하면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 그 선택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진실로 참혹할 겁니다.”
저주가 아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인과.
트럼프는 방아쇠를 당기는 미국 내의 탐욕스러운 시민들의 트리거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극단으로 미 연방 주주들인 자국 시민들만 위한 이익 봉사는 진실한 자본주의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오만과 독선, 탐욕은 거대한 제국의 몰락을 가져올 겁니다.”
로버트 라이언의 괴로움이 가득한 눈빛을 직시했다.
그리고.
“과거 로마제국처럼 말입니다.”
쿠궁!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로버트 라이언의 눈동자.
굳이 위로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쯤은 맞아야 할 따끔한 회초리.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쾌락과 보장되는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이 차면 결국 기우는 것과 같은 이치.
미국민들이 당면하게 될 고통의 시간은 앞으로 10년이 채 남아있지 않다.
“…….”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그때.
- 형님! 으아아아아아아아! 이곳은 처, 천국이에요! 천국!!!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