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3장. 참된 것. (903/1,284)

913장. 참된 것.

‘뭐, 뭐지?’

엠마는 크게 당황했다.

사라 요한슨이 등장한 것 이상으로 다니엘의 행동은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사라와 자존심 대결까지 벌였다.

사라와는 가까우면서도 먼 그런 사이였다.

각자의 아버지가 정치적 라이벌로 자주 거론됐다.

지지하는 파벌이 달랐다.

부가 중심인 요한슨 가문과 미국의 안녕과 발전을 목표로 한 피어스 가문.

뜻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니 가끔 의도치 않게 정치적으로 부딪칠 때가 있었다.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가 있어서 그나마 요한슨 가문과 맞설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들의 관계를 보고 자란 엠마는 무의식적으로 다니엘을 사이에 두고 사라에게 도발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고자 의식하는 그녀의 잠재돼 있던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더군다나 대상은 엠마가 진심으로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주고 있는 남자였다.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엠마는 다니엘에게 꽂혔다.

밀림에서 닥친 죽음의 위기에서 아마존을 살피는 신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나타났던 밀림의 전사 다니엘.

눈을 떴을 때 지옥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시 선물 받은 듯했던 인생.

엠마는 다니엘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쳤다 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겼을 정도의 멋있는 남자.

그런 그가 그녀의 생명까지 구해줬다.

막연하게 꿈꿔 왔던 백마 탄 왕자님보다 더 멋졌다.

아빠가 트럼프의 별장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엠마는 개의치 않았다.

다니엘이 트럼프의 별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날아왔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다니엘.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바잉사와 락히트 마린 회장을 교육 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두 업체가 정치권을 비롯해 여기저기 뿌리는 로비스트 자금 규모는 엄청났다.

공화당을 비롯해 민주당 의원들까지 그들의 눈치를 볼 정도다.

아빠 존 피어스 상원의원도 두 업체의 회장을 존중했다.

그런 기업의 리더들을 쩔쩔매게 만들어 버린 다니엘.

다시 한 번 목격한 다니엘의 카리스마에 엠마는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반드시 그와 붉은 와인을 마시겠다고 마음먹고 유혹을 멘트를 던졌다

본래 이런 식으로 대시하는 여성이 아니지만 다니엘 앞에서는 과감하게 치고 나갔다.

그때 등장한 생각지 못한 라이벌.

운명의 장난인 듯 사라 요한슨이 다니엘을 사이에 두고 경쟁자로 등장했다.

다니엘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걸 확인했다.

물론 아빠의 비서를 통해 먼저 알고 있던 일이었다.

사실이 확인됐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공표된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다니엘 주변에는 사라 같은 관계에 있는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두려움보다는 차라리 용기가 샘솟았다.

엠마에게 있어 아마존 밀림에서 겪은 생사 경험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뜨거운 생존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욕구로 변환됐다.

“역시 다니엘답네.”

사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뜻이야?”

아직은 다니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엠마.

“아마도 우리…….”

말을 하려다 멈춘 사라 요한슨.

치리리리리링~♪.

그사이 시작된 바이올린 연주의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

처음부터 음계가 아주 높았다.

따아앙! 따아아아안~♬.

그 뒤를 이어 뒤쫓아 오듯 울리는 피아노 선율.

“크로이처……. 아!”

사라가 탄성을 내뱉었다.

듣자마자 바로 알았다.

“크로이처가 왜?”

답답한 듯 엠마가 재빠르게 물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크로이처는 명곡 중의 명곡이었다.

베토벤이 남긴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엠마도 어린 시절 직접 연주해 봤던 곡이었다.

톨스토이 소설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렬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하지만 이 곡은 엄연히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헌정곡.

베토벤이 좋아했던 연주자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

그러나 정작 헌정 대상이었던 크로이처는 난폭하고 무식하다며 이 곡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클래식계의 아이러니에 부합하는 곡들 중 한 곡인 셈이다.

그런 베토벤 소나타를 택한 다니엘.

“저 곡을 선택한 의미를 모르겠어?”

한심하다는 듯 엠마를 바라보는 사라 요한슨.

“……내가 어떻게 알아.”

“후훗. 그래서 넌 아직 안 돼. 다니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잖아.”

“…….”

엠마는 사라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보다 먼저 인연이 된 사라가 오늘따라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래도 사라의 말처럼 그 이유는 궁금했다.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크로이처를 선택한 다니엘이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넌 뭘 아는데!”

신경질적으로 되묻게 된 엠마.

화가 난 티가 가득했다.

다니엘이 소나타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정말 궁금했다.

찌지지지지지지지지징~♬.

그사이 1악장부터 격하게 치고 올라가는 바이올린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상하좌우 음역대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숨 가쁘게 연주됐다.

따당! 따당!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당~♪.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절제된 박력감으로 바이올린과 결투를 벌이려는 듯한 피아노.

넓은 음역대를 오가며 바이올린 음률은 소리를 높이고 괴성을 지르며 결투를 시작했다.

그런 바이올린 음률을 쿨하게 받아치는 피아노 선율.

시작은 나름 점잖았다.

하지만 격정적인 남녀의 싸움처럼 격앙된 두 악기의 선율은 금세 점잖은 분위기를 집어삼켰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음표를 먹어치우며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속사포처럼 서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동안 쌓였던 불만들이 서로를 향해 한꺼번에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도중에 잠시 이성을 찾은 남녀처럼 소강상태에 접어들기도 했지만 날선 감정들은 부지불식간에 또다시 두 사람을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

“!!!”

무언가 선율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낌으로 알아챈 엠마.

다니엘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와 피아노 연주 소리는 특수한 마이크도 없이 파티장 곳곳을 흘러 다니며 파장을 일으켰고, 세밀한 바늘 끝처럼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왔다.

듣고 있던 이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처절하고 비극적인 남녀의 싸움에서 엿볼 수 있는 감정이 올올이 전달됐다.

오직 세기의 명곡에서만 맛볼 수 있는 리얼한 감정선들이 전부 표현됐다.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 당사자들처럼 연주를 듣는 이들 모두 환상에 젖어들었다.

서로가 마주한 채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내비치듯 가슴을 두들기는 모습, 광분하며 소리치는 장면, 설득과 애원, 그리고 다시 분노.

피치카토 주법으로 마치 여성의 말을 무시하는 듯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남자.

그런 남자를 향해 돌격하는 피아노.

쩌렁쩌렁 탕탕!

격한 화음이 화려한 파티장을 덮쳤다.

모든 시간이 멈춘 듯 주변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선율만이 가득했다.

예술적 감성이 없다 해도 모두를 격하게 빨아들이는 두 거장의 연주.

“하아…….”

엠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가 말한 ‘안 된다’는 말이 이해 됐다.

다니엘은 바이올린 연주를 통해 엠마와 사라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감정싸움에 자신을 끌어 들이면…….

카가가가가가가강~♬.

저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선율처럼 가차 없이 인연을 정리해 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

‘아!’

네루 포고렐리치는 신음을 터트렸다.

차라라라랑 차가가가가강~♪.

베토벤이 작곡했던 원곡 그대로의 해석이 두 귀를 사로잡았다.

사랑하는 연인들 간의 감정싸움이 거친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귀속을 파고들었다.

차자자자자자자자자자장!

포고렐리치의 손가락은 미친 듯 건반 위를 날뛰었다.

굳이 감정을 절제하지 않았다.

전율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영혼의 동반자이며 스승이고 연인인,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의 이유였던 아내가 죽은 이후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포고렐리치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육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친 야생마 같았던 자신을 뜨겁게 품어 주었던 대지의 여신과 같았던 아내.

그녀만이 포고렐리치의 모든 걸 알아주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포고렐리치만의 여정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느꼈던 절망감은 포고렐리치의 모든 걸 무너뜨렸다.

일반인들의 잣대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아내와의 깊은 동지애.

그건 하늘과 땅의 결합과 같은 것이었다.

포고렐리치의 감정에 따라 피아노 선율에 맞춰 그를 달래주던 그녀.

다시는 그 따듯한 감정을 맛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신은 아직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죽은 듯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차갑게 식었던 피가 다시 뜨겁게 끓어올랐다.

잠자던 음악에 대한 정열의 요정이 손가락 끝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모든 정신과 육체가 깨어나며 아우성쳤다.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고!

차자자자자자장!

피아노 건반을 정신없이 누르며 포고렐리치는 베토벤 재림자를 쳐다봤다.

오만하리만큼 당당하게 달랑 바이올린 하나를 들고 청중들을 제압하는 뮤즈의 신.

차라라라라라라라라랑~♬.

그의 바이올린 선율이 은혜의 강물처럼 파티장을 뒤덮고 있었다.

***

창! 창 차자자장!

바이올린 활대에 마지막으로 담겼던 기가 모두 사라졌다.

타앙!

피아노 연주도 마무리.

짧지만 길었던 연주가 끝났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음률들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신계로 날아갔다.

“…….”

어느 누구의 숨소리도 고요를 깨뜨리지 않았다.

베토벤의 광기와 열정이 그대로 느껴졌던 크로이처.

완벽한 합주였다.

내가 원하는 바 그대로 음표를 그려낸 피아니스트 네루 포고렐리치.

파르르르르.

마지막 건반을 누르고 그대로 멈춘 천재.

놀라웠다.

나야 신의 버프를 받아 가능한 연주였지만 인간으로서 이토록 아름다운 경지에 오른 이는 처음 봤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표출됐던 포고렐리치의 세밀하고 뜨거운 감정.

예술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혼이 없다면 결코 해석할 수도 표현될 수도 없었다.

실력은 기본.

거기에 더해 자신만의 길을 완성한 마에스트로의 정신세계까지 결합되어 있었다.

포고렐리치는 완벽했다.

모자란 것도 넘치는 것도 없었다.

씨익.

입가에 더해지는 만족스러운 미소.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

나를 중심에 두고 감정을 낭비하고 있는 엠마와 사라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곡을 선택했다.

잡귀의 말처럼 누구 한 사람을 선택해 진한 밤을 보낼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어떤 누구로 인해 마음에 짐을 만들고 싶지 않다.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상대해야 할 대상들은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국가와 거대 조상신들이다.

시작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나의 마음을 지금처럼 비워 둘 생각이다.

- 이, 이거 뭐죠……. 왜 형님 몸에서 음표들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저 인간은 누굽니까! 그 옆에 서 있는 여인은 또…….

잡귀도 그사이 레벨 업이 된 모양이다.

포고렐리치의 곁에 있는 그의 영원한 연인을 보고 놀랐다.

포고렐리치는 모르고 있다.

육체가 사라졌다고 해서 인간 세상에서의 인연까지 다 끝나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속하는 존재가 될 뿐 사랑하는 이는 그대로 항상 곁에 머문다.

살아남은 이가 끊임없이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에너지를 방출하면 영혼이 찾아와 그를 위로한다.

이승과 저승의 차이는 존재하는 차원과 공간이 다를 뿐 경계가 없다.

특히 포고렐리치와 그 아내는 생전에 교감한 유대감이 엄청났던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인 듯 생생했다.

내 눈에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명확하게 보였다.

지금도 안쓰러운 시선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여인.

피아노 선율이 시작된 순간 포고렐치이와 함께 건반을 눌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아직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음에도 생을 포기하려고 했던 포고렐리치를 되살렸다는 걸 그녀가 알았다.

스윽.

포고렐리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럽의 격조 높은 마피아 같은 인상의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붉게 충혈된 그의 두 눈.

그리고.

덥석.

하아! 이럴 줄 알았다.

- 으아아아! 뜨거워!

귀신이 비명을 토했다.

예술적 감동에 무지한 귀신은 인간이 뿜어내는 예술혼을 감당하지 못했다.

“흐으으으윽.”

품에 안긴 포고렐리치가 어깨를 들썩였다.

주르르륵.

뜨거운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앓아온 우울증과 꾹 눌러두었던 그리움이 한 번의 연주로 모두 승화됐다.

신명나는 살풀이 한판이 벌어진 셈.

포고렐리치는 다시 피아노로 이생의 남겨진 업을 닦아낼 기회를 얻었다.

스윽.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 혀, 형님 설마! 그건……. 아니죠! 전 남자 싫어요! 으아아아아아!

닥쳐! 잡귀.

울고 있는 포고렐리치의 어깨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토닥토닥.

그리고 등을 조용히 다독였다.

엄마가 아이를 달래듯 그런 따스한 손길로.

인간으로 태어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으며 괴로워했을 영혼을 위로했다.

포고렐리치의 아내 대신 내가 그를 품에 안았다.

“크으으윽 흐윽.”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포고렐리치.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앵콜! 앵콜! 앵콜!”

짝짝짝짝짝짝.

감동에 젖어 한껏 고취돼 있던 이들이 화들짝 깨어나며 박수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품격 낮은 트럼프의 손에 의해 열린 파티에서 예고 없이 불어 재낀 고품격 예술혼의 열연.

쾨테의 격언 한마디가 떠올랐다.

- 참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으리라!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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