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장. 선택.
“립. 당신 친구 분은 도대체 뭐 하는 남자죠?”
“내 친구라…….”
에바의 물음에 임성철 회장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장태산을 바라봤다.
임성철 회장도 오정의 항공사업으로 얽혀 익히 알고 있는 바잉사와 락히트 마린 회장. 그런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태산.
관심 없는 듯 와인을 마시며 미녀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장태산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다.
기업가로서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정 임성철 회장도 한 발 물러서야 할 정도로 높은 미국 항공업계 회장들이 마치 장태산의 아랫사람인 듯 그의 앞에서 기를 못 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리였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상황을 읽어내기에 충분했다.
기업가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승부사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과 능력이 그들을 둘러싼 아우라가 되어 승패를 결정지었고, 갑과 을의 계급 체계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지금 장태산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숨은 자산을 기반으로 장장한 두 회장을 찍어 눌렀다.
저들 사이에 섞여 있었더라면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오간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귀신 장립은 장태산에게 딱 달라붙어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던 에바 잭스에게 눈길도 안 줬다.
사람보다 더 마음 변화가 심한 귀신.
자신이 귀신이라 해도 장태산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끊임없이 장태산 주변에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모두 흥미진진한 상황만 벌어졌다.
“다가가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뱀파이어 영화를 찍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탄 니나 스캇이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계획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정체 모를 여인이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난 순간 바로 포기했다.
자신이 상대해 볼 만한 레벨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인간들 상위에 포진하고 있는 신들 레벨 정도 돼 보였다.
트럼프는 그에 비하면 발바닥의 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그래.”
임성철 회장이 니나 스캇 말에 동조했다.
요즘처럼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적이 없었지만 아직도 장태산에 대해 아는 바가 미미했다.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주변 인맥과 일 처리 방식.
임성철 회장이 습득한 지식과 경험, 상상을 모두 뛰어넘었다.
“엠마 피어스가 왔네요.”
에바가 다니엘과 대화를 나누는 무리를 향해 다가가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아! 맞아 엠마 피어스!”
니나 스캇도 엠마를 알아봤다.
알게 모르게 사교계에 은근히 알려져 있는 엠마 피어스라는 이름.
탁월한 미모와 지성, 집안의 배경 정도는 미국민들 중 상당수가 알 정도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자체발광 하는 엠마 피어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유혹적인 몸짓으로 다니엘의 옆에 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엠마 피어스가 호감을 표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 만큼 확실했다.
“우리가 경쟁해서 쟁취할 만한 상대는 애초 아니었네요.”
에바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빠른 태세전환으로 장립을 택한 두 여배우.
“왜 나로는 부족한가?”
임성철 회장이 농담처럼 한마디 던졌다.
“무슨 소리에요. 난…… 당신이 좋아요.”
에바가 임성철 회장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도 기대가 커요.”
니나 스캇도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모두 어린애가 아니었다.
대가 없는 투자는 세상에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지금껏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겪었던 끔찍한 경험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다니엘은 넘볼 수 없는 다른 세상 친구야.”
“그런 것 같아요.”
“알고 있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게 바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속성이지. 능력보다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무지한 욕심.”
“가끔 립은 나이도 어린데 현자 같은 말을 뱉어요. 우리 아빠처럼.”
에바가 웃으며 말했다.
임성철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겉모습만 건실한 청년이지 정신 상태는 오정의 노회한 임성철 회장이었다.
“나도 만만치 않은 인생을 살아서 말이야.”
“인생? 그것도 웃긴 말 같은데. 후훗.”
니나가 와인잔을 들고 웃음을 흘렸다.
“어! 저 여자는…….”
“이런! 정체는 모르지만 엠마에게 엄청난 경쟁자가 등장했군요.”
대화를 나누고 있던 다니엘과 엠마를 향해 다가가는 미모의 여인.
일반인은 소화하기 힘든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마치 여신이 강림한 듯 보였다.
“사라 요한슨.”
임성철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맞아요. 사라 요한슨!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의 외동딸…….”
“에바, 네가 아는 여자였어?”
“하아. 우리는 저 여자들에 비하면 발에 치이는 돌멩이에 불과해요.”
에바가 탄식을 터트렸다.
도저히 어떻게 비벼볼 수 없는 다니엘 주변의 미모의 여성 인맥.
‘진짜 빛난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컸다.
잠깐 골프를 함께 쳤을 뿐임에도 빠져들고 말았던 무한 매력.
“에바. 그런 눈빛은 립에게 실례야.”
니나가 에바를 깨웠다.
“괜찮아. 어차피 저 친구는 내 경쟁상대가 아니니까.”
임성철 회장은 아예 마음을 내지도 않았다.
장태산 덕분에 얻게 된 두 번째 인생.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만으로도 고마움은 차고 넘쳤다.
여기서 더 뭔가를 원한다면 그건…… 욕망에 미친 들개나 진배없었다.
“어! 그런데 뭐죠? 다니엘이…… 어디로 가는 거죠?”
두 여인과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몸을 틀어 걸음을 옮기는 다니엘.
“바이올린?”
***
- 뭐 하시는 겁니까! 결론을 내려야죠!!!
귀신이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연애기술 초보라는 걸 그대로 드러냈다.
이런 상황 한두 번 겪은 거 아니다.
그때마다 누군가 한 명을 선택한다면 분명 남은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이럴 때는.
- 튀는 겁니까?
아우! 1차원적 사고에 갇힌 귀신과 얘기하는 내가 머저리가 된 것 같다.
- 그럼 뭡니까? 저기 꽃다운 두 미녀가 어서 자신들을 선택해 달라 애원하지 않습니까! 남자라면 응당 이런 상황에서는 칼을 뽑아 들어야지요! 참고로 전…… 엠마 양이 마음에 듭니다!
닥쳐! 음란마귀 변태 귀신아!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사중주 연주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잠시 휴식 타임인 듯 연주자들은 쉬고 있었다.
“잠시 바이올린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오래되어 정성의 광택이 묻어 있는 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바이올린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앞에서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누구…… 아!”
의아한 듯 나를 보던 바이올리니스트가 순간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베토벤 재림자!”
“오! 세상에!!!”
“신이시여!”
사중주 연주자들이 하나 둘 날 알아보고 감탄했다.
- 베토벤 재림자? 그게 뭐죠? 형님. 악기도 다룹니까?
나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게 없는 잡귀가 묻고 또 물었다.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귀찮게 구구절절 대답하는 그것보다 이럴 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
“실례일까요?”
“아니에요! 영광입니다! 재림자시여!”
이십대 후반의 귀여운 인상을 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넸다.
“누구?”
“베토벤 재림자래…….”
“오! 신이시여! 진짜 베토벤 재림자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 중에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들도 섞여 있을 게 빤했다.
또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도 많을 터.
파티 참석자들 중 상당수가 상류층인 만큼 베토벤 재림자에 대한 소문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직접 대면한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과거 몇몇 파티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져 버린 신비한 베토벤 재림자.
내가 직접 연주한 바이올린 선율을 듣게 되면 그 자리에서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조용히 퍼진 얘기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와 연주자들이 있는 단 가까이로 다가왔다.
내가 서 있는 단은 다른 연주석보다 높이가 좀 더 있었다.
멀리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단에 선 내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 와아아……. 이 분위기 뭐죠? 형님을 왜 베토벤 재림자라고 부르는 겁니까?
예술적 교양이 눈곱만큼도 없는 무지한 귀신.
그러니 멀쩡한 명문대학생으로서 품은 꿈이 갱이었겠지.
인문 교양서적을 즐겨 읽었다면 갱 따위에 영혼을 팔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 먹고 살기 어려워서 책 볼 시간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 인문 교양 학점 모두 A+입니다. 무시하지 마십시오.
교양을 학점으로 취득한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머리가 아닌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의 하모니로 완성되는 인문학의 맛을 모르는 자의 우매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혹시 피아노를 연주해 주실 피아니스트 계십니까?”
오늘은 독주보다는 듀오 소나타를 들려주고 싶었다.
단상 위에는 겉멋용으로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트럼프가 이런 보여주기 식에 돈을 아낌없이 썼다.
“…….”
모여든 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부족하지만 제가 파트너가 되겠습니다.”
용감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네루 포고렐리치!!!”
“피아노의 시인!”
“세상에 이런 영광이……. 베토벤 재림자와 포고렐리치라니…….”
포고렐리치?
나도 깜짝 놀랐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두상의 반절을 뒤덮은 대머리 스타일의 눈빛이 깊은 중년 남자.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네루 포고렐리치였다.
***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들일수록 감동했다.
한 번 보기도 힘든 두 천재의 등장.
베토벤의 재림자는 세상에 가끔 나타나는 천재이고 네루 포고렐리치는 실재하는 천재였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 방법으로 비평가들의 극찬과 악평을 동시에 받았다.
1980년대 초반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이 점쳐졌지만 격식을 따지는 심사위원들에 의해 예선 탈락을 맞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피아노 여제가 결과를 놓고 말도 안 되는 비열한 짓이라며 단상을 걷어차기도 했다.
그 이후로 유명세를 얻게 된 네루 포고렐리치.
콩쿠르 우승자로서의 명성보다 세상에서 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기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주변의 반대에도 스무 살이 훌쩍 넘는 여자 스승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시작으로 빈과 베를린, 런던 필하모닉 등과 협연을 가지며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하지만 연인이자 스승이었던 아내의 죽음이 있은 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생활에 들어가 버렸던 네루 포고렐리치.
별 연관도 없는 트럼프의 별장에 모습을 보인 건 놀라운 일이었다.
“영광입니다.”
다니엘이 고개를 숙여 천재에 대한 예를 표했다.
“재림자를 이곳에서 볼 수 있게 되다니 가슴이 벅찹니다.”
네루 포고렐리치도 고개를 숙여 보이며 천재를 영접했다.
모든 게 우연이었다.
아내를 잃은 후 세상의 무상함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네루 포고렐리치.
자살로 아내의 뒤를 따르려 했던 적도 있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바이올린 연주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베토벤이 진짜 재림한 것처럼 그의 영혼이 느껴졌다.
텅 빈 공허함을 베토벤의 선율이 촘촘히 매웠다.
순례자처럼 그를 찾아 나섰지만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정보에 한국이라는 나라까지 가봤다.
그러나 베토벤 재림자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았다.
클래식 업계에서 나타나자마자 전설이 되어버린 베토벤 재림자.
그가 트럼프의 별장에 손님으로 참석한다는 소식을 LA에서 듣게 됐다.
친구였던 필하모닉 지휘자를 졸라 트럼프의 초청권을 받았다.
그렇게 오매불망 뒤를 쫓다 마주하게 된 베토벤 재림자.
쿵! 쿵!
차갑게 식어버린 네루 포고렐리치의 심장이 오랜만에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격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를 마주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동양청년 베토벤 재림자는 진짜배기였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