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0장. 파티와 여인들. (900/1,284)

910장. 파티와 여인들.

흠칫!

필립 앨런과 이레네 휴슨이 동시에 놀랐다.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다니엘이 풍겨내는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눈빛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경고.

‘미친!’

필립 앨런은 속으로 비명을 토했다.

다니엘과 마주친 두 눈이 순간 타들어 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상하게도 무슨 일인지 다니엘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다니엘을 무시할 만큼 배포가 큰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잉사 회장을 그저 그런 일개 기업가 정도로 치부하는 다니엘의 발언.

입가에 띤 차가운 웃음에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다 알고 있어…….’

이레네 휴슨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주순자를 통해 로비로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내막을 알고 있었다.

‘세부 내용까지는 모를 거야.’

보안문서인 국가 간 전투기 매매계약의 세부 내용.

어떻든 일반인인 다니엘이 그 부분까지 알 턱은 없었다.

“계약서 가지고 장난 칠 거 아니죠?”

하지만 이 또한 착각이었다.

무심히 툭 던진 질문.

“무, 물론이에요.”

휴슨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한국 국민들을 마사지할 만한 달콤한 계약서 내용들 중 핵심은 빠지게 될 터였다.

미국 정부에서 태클을 걸 만한 중요한 기술은 애초 수출이 불가능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IT강대국이 되어 가고 있다.

주사식 레이더를 비롯해 여러 고급 기술에 속하는 것들은 내줄 수 없었다.

물론 위약금 문제가 존재하긴 했지만 기술 값에 비하면 어린아이 사탕 값 수준이다.

그리고 계약은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의 미래 전장은 스텔스기가 좌우하게 된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구매 요구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한국.

안 되면 행정부를 이용해 가볍게 푸시하면 되는 일이다.

일단 싸게 팔고 미사일과 소모품 비용을 높게 받아내는 방법도 존재했다.

계약만 하면 그 뒤로는 일단 모든 게 수월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계약서 건을 다니엘이 언급했다.

“약속은 소중한 겁니다. 지켜보겠습니다.”

“…….”

다니엘은 더 이상 긴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더 무겁게 묵직하게 두 사람의 마음을 짓눌렀다.

친분을 쌓으려다 거리만 더 멀어진 꼴이 됐다.

‘젊은 놈이 만만치 않아.’

필립 앨런은 다니엘을 다시 천천히 살폈다.

애초 무시하던 마음은 싹 사라진 뒤였다.

로버트 라이언과 왜 그렇게 친분을 나누는 동지가 되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빛만으로는 그의 심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젊은 친구가 세상의 깊은 맛을 알고 있는 듯했다.

“물론입니다. 바잉사는 누구와 달리 약속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행스럽게 한국과의 거래에서 락히트 마린과 달리 약속 이행을 충실히 수행했다.

계약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가 만만치 않았다.

‘너구리같은 놈.’

이레네 휴슨은 필립 앨런을 가볍게 흘겨봤다.

어차피 바잉사가 선정되어도 기술 이전은 불가능했다.

화살이 휴슨에게 향했다.

“저희 락히트 마린사는 계약서를 항상 준수하는 준법 기업입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휴슨은 미꾸라지 같았다.

군수기업은 항시 위험을 안고 운영됐다.

비밀리에 전해지는 뒷돈의 정황이 노출되면 큰 문제가 됐다.

이런 불시의 일에 당황하지 않도록 평소 훈련이 돼 있었다.

“후후훗.”

대답 대신 짧게 웃음을 짓는 다니엘.

‘……이 자식 무서운 놈이야.’

이레네 휴슨은 다니엘의 차가운 미소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눈빛과 웃음만으로도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왜?’

이레네 휴슨은 속으로 놀란 동시에 의구심이 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미국 정재계에 보이지 않는 힘을 투사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있어 만나보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꼬였다.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무시하고 자리를 떠도 무리는 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발을 뗄 수가 없다.

이 자리에서 무례한 태도로 벗어났다가는 상상하지 못한 후환과 맞닥뜨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너구리 필립 앨런도 감을 잡고 숨을 죽였다.

“…….”

침묵이 무겁게 사방을 감쌌다.

주변으로는 파티의 흥을 살리는 부드러운 멜로디가 가득하지만 이곳만은 분위기가 달랐다.

죄를 지은 죄인처럼 바잉사와 락히트 마린 사의 두 회장은 다니엘의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때.

“다니엘…….”

***

- 오! 이 여신님은 또 누굽니까!!!

귀신 침 튀기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한 여인이 다가왔다.

아마존 밀림에서 인연이 됐던 미국 유명 정치인의 막내 딸.

“엠마.”

“다니엘……. 미국에 왔으면 연락을 했어야죠.”

엠마 피어스였다.

사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오늘도 유난히 그녀와 잘 어울리는 블랙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날씬한 몸매가 더욱 완벽하게 자태를 뽐냈다.

금발은 정성스럽게 웨이브를 넣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밀림에서 처음 만날 당시 꾀죄죄한 인상은 이미 오래전에 기억에서 지워졌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대접했던 그녀.

활짝 웃으며 날 바라봤다.

철철 넘치는 교양과 무척 잘 어울리는 고상한 미모.

비팔이들을 향하던 싸늘한 시선이 금세 따뜻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설마 이곳까지 날 보러 왔습니까?”

미국이지만 워싱턴과 이곳은 거리가 꽤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니엘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엠마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존 밀림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나였다.

와인 한 잔 마시자는 걸 내가 거절했다.

사라 요한슨과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엠마 양, 반가워요.”

구세주를 발견한 듯 이레네 휴슨이 그녀를 아는 체했다.

은근한 기운으로 정신 교육 중에 있었다.

계약서 가지고 장난치는 미국 방산업자들.

이 또한 조상신들이 허락한 자리이고 만남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한국을 봉이라 여기는 자들이었다.

미국 정부와 협작해서 봉을 씌우고 AS 비용과 무기 값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연결된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약소국의 서러움은 어디 가지 않았다.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러 라인을 통해 협박이 계속 됐다.

방산 기업 로비스트들의 압력은 미국 대통령도 쫄게 만들 정도다.

특히 군산복합 업체들의 로비는 수없이 말해도 상상을 불허했다.

가장 대표적인 업종이 다들 알다시피 총기 제조업자들이다.

사람들이 매일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나도 제재하지 못했다.

오바마가 총기 규제를 시도했다가 제대로 역풍을 맞았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방산 기업체들에 속하는 비팔이들이 나에게 접근해 왔다.

이유야 빤했다.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투자를 받기 위한 것이다.

다들 바지사장들이라 실적을 내야만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투자를 유치하는 것만큼 확실한 실적은 없다.

개인인 나에게 비행기를 팔 것도 아니었다.

“락히트 마린사 회장님이시군요.”

엠마가 미소를 지었다.

엠마 피어스는 가문이 모두 군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 존 피어스가 상원 군사위원회 실권자다.

바잉사와 락히트 마린 사의 군용 비행기 사업의 의회 비준의 핵심 인물.

“필립 앨런입니다. 얼마 전 파티에서 인사를 나눴는데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아빠가 칭찬을 아끼지 않던 애국 기업 바잉사의 회장님이시잖아요.”

엠마의 또 다른 면모가 엿보였다.

밀림에서 죽어가던 연약한 여인이 아니다.

능수능란하게 정치가문의 여식 노릇을 했다.

말하는 데 흔들림이 없다.

대기업 회장들과도 눈높이를 맞췄다.

명문 가문이 그냥 명맥을 유지하는 게 아님을 몸소 증명했다.

“상원의원님이 락히트 마린 사에 대해서는 그런 말씀 안 하셨나요?”

필립이 칭찬 한마디에 입이 찢어지자 이레네 휴슨이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락히트 마린사는 미국을 수호하는 보물이라고 하셨답니다.”

“상원의원님의 신경 써주심에 언제나 락히트 마린사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엠마가 두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니 모두 엠마의 립서비스라는 게 훤히 보였다.

처세술이 수준급이다.

“죄송하지만 다니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두 분 괜찮으세요?”

엠마가 알아서 비팔이들을 정리했다.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대화는 모두 나눴습니다.”

이레네 휴슨이 나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웃고 있었지만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마 엠마가 나타난 뒤로 정신을 차린 듯 날 보는 눈동자에 기운이 돌아왔다.

“부디 제 의견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까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미사일이나 부품에 뻥 튀기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마지막 경고였다.

“락히트 마린사는 다니엘님의 애국심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레네 휴슨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껏 여유로움을 가장했지만 그녀의 등판 드레스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 늙은 여우 아줌마가 혼이 반쯤 나갔네요. 크크.

귀신이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언제 시간 나면 바잉사를 찾아와 주십시오. 이것저것 다니엘님의 투자자로서의 견해를 경청하고 싶습니다.”

필립 앨런은 그나마 나았다.

아직도 투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항공기는 안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 점만 잊지 않으신다면 곧 절 보게 될 겁니다.”

“고견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엠마 양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 너구리 아저씨! 저 말에서 진심은 안 느껴져요.

귀신이 이제 사람 심리도 파악한다.

나도 바로 알 수 있는 형식적 말투.

개인적인 태도에까지 개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세계 제일이라는 오만함이 불러오는 비행기 참사는 인재이자 신들이 주는 경고다.

대주주가 되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여러 방향에서 태클이 들어올 게 빤했다.

주주와 미국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뜨거운 맛을 봐야 기업의 참모습이 어떤 건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귀한 생명.

뒤돌아서 도망치듯 사람들 틈 속으로 섞여드는 필립 앨런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안전이라고 했나요? 바잉사에 무슨 일 있나요?”

엠마가 그들이 사라지자 관심을 보였다.

존 피어스 상원의원이 작고하고 나면 엠마가 후에 미국 정치 거물이 될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도 시간을 거듭하며 쌓은 역사를 기반으로 정치 명문가들이 등장했다.

엠마를 보아하니 싹수가 보였다.

친분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엠마 양은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 그래요?”

엠마의 얼굴이 사르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사라락.

바람을 타고 코끝을 자극해 오는 엠마의 시원한 체취와 향수 향.

가로등 불빛을 받은 아름다운 여인의 매혹적 자태는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 오! 선수 작업 들어가나요!

닥쳐!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귀신이 또 신났다.

지금 난 순수하게 미래 미국 거물 정치인과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는 거야!

- 그런데 심장 박동수가 점점 증가하죠? 피도 뜨거워지는 것 같고…….

이놈의 몹쓸 와이파이!

잡귀야! 나도 남자다!

- 흐흐. 제가 형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잡귀 따위의 이해는 필요 없다.

다만.

“와인 한잔하시겠습니까?”

“네……. 다니엘과 함께라면.”

어어! 엠마. 무슨 상상하는 거야. 얼굴이 왜 더 붉어지지!

난 그냥 순수하게 와인 한 잔만 하자는 거야.

다른 오해는 하면…….

“그 와인…… 저도 함께 마셔도 되나요?”

“!!!” 

회귀의 전설 2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