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장. 사회적 거리.
“누구라 생각합니까?”
“글쎄…….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야.”
장립의 질문에 트럼프는 난색을 표했다.
잔머리를 굴려봤지만 떠오르는 인물들 리스트에 그녀는 없었다.
낯선 경호원들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트럼프의 시설 경호원들은 임무가 무색하게 찌그러졌다.
권총이 초라하게 기관단총을 들고 나타난 이들.
경호 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듯 눈빛이 살벌했다.
큰 덩치에 비해 겁이 많은 트럼프.
‘도대체 누구지?’
빵빵 터지던 전파도 차단당했다.
오지인 듯 스마트폰은 터지지 않았고 유선 전화마저 막혔다.
이 정도면 대통령 급을 넘어선 경호였다.
딱히 떠오르는 적당한 존재가 없었다.
“마피아 딸은 아니겠죠?”
이번에는 임성철 회장이 물었다.
- 대단한 다니엘 형님! 마피아 딸과의 로맨스라니!
귀신 장립은 임성철 회장의 그럴싸한 말을 듣고 감탄을 했다.
“그건 아니야. 내가 이탈리아 출신 마피아들을 아는데 저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여기는 미국이야. 아무리 마피아라고 해도 저럴 수 없어.”
트럼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결해 보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숨겨진 교황 성하의 딸이라고 해도 믿겠어.”
“농담이시죠?”
“물론이지. 조크네. 조크. 하하하.”
트럼프는 별장으로 돌아온 뒤에야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초대하지 않은 낯선 여인의 방문을 애써 외면했다.
주인이라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니엘……. 조심해야 할 녀석이야.’
이 일로 다니엘에 대한 경각심도 높였다.
대권 행보를 위해서는 다니엘이 꼭 필요하지만 가볍게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능력도 만만치 않은데 오늘 눈앞에서 새로운 면을 또 봤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속을 알 수 없는 다니엘이다.
앞에 보이는 장립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중국에서 사업을 준비하는 이들 모두가 눈앞의 장립을 만나려고 안달했다.
지금 당장 전화 한 통 돌리면 수십 명이 몰려올 것이다.
그전에 좀 더 탄탄하게 다져놓아야 할 립과의 친분 관계.
“동생이 베이다이허에서 대단했다고 들었네. 비결이 뭔지 궁금하군.”
트럼프가 다니엘이 없는 틈을 노려 장립에게 작업을 시작했다.
특유의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와인?”
“몰트위스키를 좋아합니다.”
“하하. 젊음은 역시 달라. 난 술이 약해 와인을 마시겠네.”
골프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별장 테라스에서 트럼프가 직접 접대를 개시했다.
자연스럽게 장립이 되어 임성철 회장도 분위기를 즐겼다.
- 트럼프. 속이 훤히 보이는데 귀엽네요.
장태산과는 와이파이를 껐지만 임성철 회장과는 여전히 공동체인 귀신 장립이 입을 쉬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는 임성철 회장.
또각또각.
“나도 목말라요.”
“시원한 맥주 있어요?”
여배우들이 다시 등장했다.
복장을 바꿔 입어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땀에 절은 골프복을 벗어 던지고 샤워까지 마쳐 개운한 모습이 된 에바와 니나.
얼굴 가득 미소를 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향수 냄새를 풍겼다.
유명 여배우다운 매혹적인 자태가 한껏 돋보였다.
- 오! 나의 여신이여!
넘사벽 로리아나는 진작 포기하고 다시 에바에게 꽂힌 장립 귀신.
여배우들은 둘 다 블랙으로 드레스 코디를 했다.
바스트의 풍만함을 자랑하는 니나 스캇은 아슬아슬하게 어깨끈이 연결된 밀착형 드레스를 입었다.
반면 에바는 수수함 속에서 요부적 향기를 뿜어내는, 아예 끈이 없어 바스트 위의 어깨를 완벽하게 노출시킨 원피스 차림이다.
자칫하다가는 아래로 흘러내릴 것 같아 보였다.
두 여배우의 재등장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트럼프도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여배우들을 살폈다.
하지만 눈빛과 달리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오늘은 오로지 접대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장립의 시선이 여배우들에게 꽂힌 걸 확인하고 상황을 즐겼다.
‘그래. 어서 마음껏 취하라고. 욕망에 최선을 다해. 어린 동양 친구. 흐흐흐.’
미인계의 빠져나갈 수 없는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트럼프였다.
전에도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을 위해 판을 여러 번 깔았다.
자신도 해외에 나가 불시에 미인계에 당하기도 했다.
피가 뜨거운 남자라면 알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수였다.
“에바, 니나. 당신들의 사랑스러움에 속이 더 타들어 가는 것 같아. 하하하.”
트럼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미녀는 언제나 옳다.
돈에 대한 끝없는 욕망도 다 미녀들을 마음껏 만나고 이런 파티를 열기 위해서다.
이런 트럼프는 특히 세네카의 명언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글귀.
‘부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의지박약의 증거이다.’
트럼프는 부를 축적하는 모든 과정이 게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돈을 모으는 게임에 즐겁게 임했다.
“립. 투자자라고 하던데 구체적으로 하는 일이 뭐에요?”
에바가 그제야 립에게 관심을 보였다.
다니엘은 이미 물 건너간 걸 알았다.
에바와 니나도 그 정도 머리는 갖고 있었다.
다니엘은 두 사람이 어떻게 요리해 볼 수 있는 수준의 남자가 아니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다니엘을 내려놓고 나니 립이 눈에 들어왔다.
다니엘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동양인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쪽에 들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봐줄 만했다.
체격도 물론 훌륭했다.
투자자라고 했으니 돈도 많을 게 확실했다.
수천만 달러를 영화계 투자금으로 제시했다.
“나도 궁금했어요.”
니나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립을 응시했다.
- 기회입니다! 회장님 질러요! 난 에바!!!
귀신이 다시 흥분했다.
흥분한 귀신이 물불을 안 가렸다.
끝까지 자기 취향은 확실히 챙겼다.
“이런! 립에 대해 내가 말을 안 했나? 립은 중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그것도 엄청나게 집중 조명 받고 있는 인재야. 시진핑 주석을 비롯해 여러 인맥들과도 친분이 대단해. 립을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 특히 영화 같은 문화적 투자 부분은 더욱 그렇지.”
“!!!”
트럼프의 설명에 에바와 니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야? 이 남자도 대단하잖아!’
‘꽌시!’
에바와 니나가 동시에 립을 다시 뚫어져라 쳐다봤다.
“과찬이십니다.”
임성철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과찬은 무슨. 홍콩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 규모가 수십억 달러가 넘는다고 들었네. 앞으로 성장 가능성도 엄청나고.”
‘수십 억!’
‘아!!!’
두 여배우의 표정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떠오르는 세계 부자들의 순위 중 앞쪽은 요즘 모두 중국인들이 차지했다.
눈앞에 그런 부자를 놔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두 여배우는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제가 채워 줄게요.”
니나가 트럼프의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을 낚아챘다.
또로록.
금세 채워지는 잔.
연한 호박색 위스키가 영롱하게 빛났다.
‘여우같은 계집 같으니라고!’
에바가 질투심을 감추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니나에게는 몸매로 이미 밀렸다.
나이도 몇 살이나 많았다.
서양인들에게는 니나 스타일이 더 먹혔다.
- 회장님! 에바가 슬퍼하잖아요!
상황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립의 애간장은 타들어갔다.
그러나 묵묵히 니나에게 술을 받는 임성철 회장.
- 회장님 나빠요…….
몸뚱이가 없어 슬픈 귀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 순간.
“에바 양도 같이 마시겠습니까?”
임성철 회장이 에바에게 친절한 미소를 날렸다.
“그래도 될까요?”
에바가 활짝 웃었다.
“물론입니다. 제 친구가 말하더군요. 주변에 아는 미녀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은 더 행복해진다고.”
여러 의미가 담긴 임성철 회장의 말.
- 회장님!!! 사랑합니다!!!
립이 격하게 임성철 회장에게 하트를 날렸다.
***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야훼의 신실한 종이 나에게 사랑 고백을 퍼부었다.
눈에 가득한 진심.
거짓 없는 로리아나의 눈빛이 당황스러웠다.
야훼가 어떤 신인가.
자기 자식들을 유난히 편애하는 차별의 대명사가 아닌가.
그런 야훼를 모시는 성녀 로리아나가 지금 격한 심정을 거르지 않고 토해냈다.
괜히 하늘을 슬쩍 올려다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때리면 나라도 쉽게 피할 수 없다.
알다시피 나와 야훼는 레벨이 달랐다.
“…….”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용한 야훼.
하지만 쪼잔하고 편협한 그의 시선이 사방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저기 로리아나……. 사라와는 인연이…….”
사라와 로리아나는 인연의 궤적이 크게 달랐다.
여러 방면으로 인연이 엮인 뜨거운 사이였다.
나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사랑했으며 또 기다렸다.
그런 점에서 로리아나는 썸을 타는 단계마저도 아니다.
물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라는 철벽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야훼의 신실한 딸인 야훼 바트.
또로로록.
그녀가 날 보며 눈물을 흘린다.
“!!!”
이거 상황이 점점 복잡해진다.
로리아나가 이곳까지 날아 온 이유가 온전히 나 때문인 것 같다.
그녀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로리아나는 세계를 경영했다.
그녀의 한마디에 미국도 파산할 수 있었다.
“신을 모셔도 누구나 각자의 마음은 소중한 겁니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죄가 된다면……. 전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안 돼!!!
느낌이 쎄하다.
공기에서 느껴지는 이 싸한 기운.
야훼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감정은 질투!
“로리아나.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호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차마 야훼가 질투쟁이라는 말은 못 꺼냈다.
신의 세계는 로리아나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일이 커지면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까지 위험해진다.
로리아나도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겁이 나시나요?”
로리아나가 슬픈 눈으로 날 봤다.
세상 그 어떤 사슴의 눈동자보다 깨끗한 눈망울을 적시는 로리아나.
가슴이 아렸다.
그녀와 보통 사람들처럼 연인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희망 고문은 결코 옳지 않다.
“겁은…… 아닙니다.”
“그럼요?”
로리아나가 추궁하듯 물었다.
휘리리리링.
불어오는 바람에 맡아지는 그녀만의 독특한 체취.
오늘따라 더 맑고 순수했다.
“당신이 아파하는 모습이…… 두렵습니다.”
진심이다.
호감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커졌다.
달콤함 뒤에 감춰진 사랑의 쓰디쓴 맛을 난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의 회오리에 관해 로리아나는 면역력이 전혀 없다.
자칫 크게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럼 됐어요.”
“???”
로리아나의 입가에 번지는 작은 미소.
위험하다.
그리고 그 순간.
로리아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로리아나, 당신과 나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사라락.
피할 겨를도 없이 내 입술을 덮쳐온 뜨거움.
아!
사정없이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는 로리아나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것.
순식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런 순간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한다면 그건 남자도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의 정신이 필요한 순간이다.
내 손이 로리아나의 가는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아…….”
귓가에 들려오는 짧고 뜨거운 신음.
후끈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때!
우르르르르르르르릉!
분명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장막처럼 몰려들고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로리아나와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
야훼 형님! 뜨겁게 지지십시오!
지금만은 무엇도 두렵지 않은 사랑의 돌덩이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