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8장. 파트너. (889/1,284)

898장. 파트너.

“하아…….”

에바는 긴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으며 거칠 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폭풍 같은 밤을 보냈다.

창문 너머로 붉은 기운을 담은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온몸이 나른하고 사지에 힘이 들어오지 않았다.

길고 긴 전투를 치른 듯 피곤함이 엄습했다.

성인이 된 후 이성을 상대해 오면서 이렇게 기진맥진하기는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남자친구였던 럭비부 주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 마리의 거친 야수가 밤새 그녀를 괴롭혔다.

수시로 물과 맥주를 번갈아 마시며 수분을 보충해야 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른한 기운과 함께 졸음이 밀려왔다.

쾌락의 높은 파도를 수십 차례나 넘었다.

은근히 동양인이라고 얕잡아 봤던 처음의 마음은 얼마 못 가 사라졌다.

스스슥.

한숨도 자지 않고 밤새 기관차처럼 달리던 남자는 의연히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타났다.

짐승 한 마리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전신을 드러낸 남자의 몸을 에바가 훑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빠졌다.

‘멋져.’

과하지 않은 근육 선이 아름다웠다.

빵처럼 부풀어 오른 서양 남자들의 근육과 많이 달랐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처럼 립은 에바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오르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계획과 달리 마음이 절로 빨려 들어갔다.

하룻밤 사이에 쌓은 인연이 이렇게 진한 행복감을 안겨준 적은 없었다.

타오르던 욕망의 불꽃이 꺼지고 난 뒤면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장립과의 밤은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밝아 오는 아침 해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한숨 자야 하는 거 아닌가? 안 피곤해?”

립이 침대로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함께 맡아졌다.

립은 자상하기까지 했다.

머리에서 흐르는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는 모습까지 완벽했다.

“졸리지만……. 참을래. 당신을 보고 싶어.”

에바는 피곤함에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며 립을 바라봤다.

눈에서는 애정이 듬뿍 담긴 꿀이 뚝뚝 떨어졌다.

지친 몸에 다시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아직 에바는 젊었다.

잠깐의 휴식만으로도 다시 원기가 충전됐다.

“그래? 그럼 커피 한 잔 마시고…….”

뒷말을 잇는 대신 미소를 짓는 립.

“응.”

에바가 침대에서 나왔다.

요가와 필라테스로 관리된 늘씬한 모델 같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미녀의 나신은 남자에게 세상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걸 에바는 잘 알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미모와 지성으로 뭇 남자들로부터 여왕 대접을 받아 왔다.

또로로록.

룸은 특실이라 없는 게 없었다.

좋은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장립.

사락.

자연스럽게 장립의 무릎 위에 에바가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볍게 어깨를 가로질러 두른 팔.

쪽.

보통의 연인들처럼 립이 에바의 팔에 짧게 키스했다.

에바는 립과의 모든 게 기분 좋았다.

매너 역시 흠잡을 데 없었다.

만나본 남자들 상당수가 욕망을 채우고 난 뒤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눈에 띌 만큼 여자에게 소홀했다.

진심이 없는 남자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하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마셔.”

립이 커피를 권했다.

미국에서 밟는 박사 과정은 험난했다.

날을 새워 공부할 때마다 커피로 버티는 에바는 특별히 로스팅 된 원두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카페인이 적당히 들어간 따뜻한 커피는 몸을 나른하게 이완시켰다.

에바는 기분 좋게 커피를 마셨다.

스르르륵.

그사이 허리를 가볍게 감아오는 립의 손길.

‘너무 좋아.’

에바는 어제와 오늘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립에게서 진짜 부자 냄새가 났다.

중국에서 온 졸부가 아닌 제대로 된 남자였다.

목적을 갖고 접근했지만 그와 나누는 대화는 매 순간 만족스러웠다.

명문 대학 출신에 홍콩에서 활동하는 사업가였다.

영어도 능숙했고 세상을 보는 안목도 대단했다.

몸에 밴 자연스런 행동은 순간순간 교양이 넘쳤다.

계획에서는 빗겨가지만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단 하루의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아무리 떠올려 봐도 이만한 남자가 없었다.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야.”

립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그래. 립은…… 좋은 남자야.”

“어떤 점에서?”

“……모두 다.”

밤새 있었던 일이 떠올라 순간 얼굴이 붉어진 에바.

커피를 입안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립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서로가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뜨거운 키스.

향긋한 커피에 취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한껏 음미했다.

번쩍.

립이 에바를 안아 올렸다.

다시 맛보게 될 환락에 에바는 두 팔로 립을 강하게 껴안았다.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립.

출렁.

에바와 함께 몸을 포개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하아.”

눈앞에 닥칠 폭풍을 기꺼이 맞이하려는 듯 에바는 먼저 신음을 뱉었다.

“그런데…… 에바.”

그때 립이 조용히 에바의 귓가에 입술을 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갑작스레 들려오는 립의 차가운 음성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어디 소속이야?”

“!!!”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했다.

뭔가를 알고 물어보는 듯한 립의 물음.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에바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FBI 소속 비밀 요원이지만 그건 순전히 학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공부는 계속 하고 싶었지만 전액 장학금 혜택을 받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다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기도 했다.

그 즈음 FBI에서 접근해 왔다.

비밀을 보장받는 특수 요원으로 활동하면 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조건이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에바는 큰 고민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학비 걱정에서 자유로워지자 학업 성적은 다시 눈에 띄게 올라갔다.

박사 과정을 밟는 데까지 승승장구했다.

교수 자리를 노릴 수 있을 정도의 입지까지 도달했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비밀 요원이다 보니 정부 지원도 꽤 뒤따랐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는 사안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에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소속을 묻는 립.

막 고개를 들던 쾌락의 열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괜찮아. 난 네가 어디 소속인지 중요하지 않아.”

스윽.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파고 들어오는 립의 뜨거운 손길.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한 듯 립은 자연스럽게 에바를 점령해 갔다.

“자, 잠깐.”

도리 없이 정신이 혼미해져 가던 에바가 순간 소리쳤다.

“하나만 명심해. 에바, 네가 날 선택하면……. 더 큰 선물이 주어질 거야.”

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처럼 에바의 귓가에 말을 흘려보냈다.

“아아…….”

에바는 주문에 걸린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아주 천천히 립의 손길에 무너져 내렸다.

***

“다니엘 괜찮아?”

룸서비스로 배달된 달걀 프라이를 아침 대신 먹고 커피를 마시던 사라가 물어왔다.

“어? 괜찮아.”

괜찮기는 개뿔!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에바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연결해 놓은 와이파이가 문제였다.

와이파이를 끊지 말라고 했던 게 실수였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열락의 신음 소리.

밤새 그런 것도 모자라 아침에 또 고문을 시작했다.

임성철 회장은 고단수였다.

상대 여성의 정체를 알아내라고 했더니 물불을 안 가리고 덤볐다.

음소거가 안 돼 밤새 갱년기 여성들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약을 괜히 줬나 후회도 했다.

차라리 수면제를 줬어야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립은 집요했다.

나중에는 와아파이를 내 쪽에서 끊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나와 사라도 이런저런 형태의 대화를 통해 미국 문화를 흠뻑 배웠다.

하지만 립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한숨도 못 잤어?”

“아마도.”

“왜?”

“당신 때문에.”

“그 거짓말 믿어줄게.”

사라는 아침햇살처럼 빛났다.

흡족한 사랑을 받은 여인은 언제나 아름다운 빛이 발산됐다.

안팎으로 온전한 사랑은 아니지만 그녀는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나 역시 아직 누군가를 특정해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바쁜 거 같아?”

“그렇게 느꼈어?”

“응. 생각이 많아 보여.”

하룻밤을 함께한 사랑이 주는 마력은 평범한 대화를 친밀하게 만들었다.

따스한 그녀의 눈빛 속에는 나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비즈니스 문제로 바빠.”

“다니엘의 비즈니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유형인지 난 모르겠어.”

“잘 도와주고 있잖아.”

“빈민 구제 사업?”

“그것도 많은 사업 중 하나지.”

“다니엘은…… 좋은 남자야. 그림 그릴 때도 멋있고 피아도 치는 모습도 황홀해.”

미국 대귀족 가문의 여식인 사라가 봐도 나는 역시 완벽했다.

“사라도 좋은 여자야.”

“그 마음 변치 말기를 신께 기도할게.”

문득 사라에게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 중이야. 투자할 거지?”

“어떤 모델?”

사라의 눈동자가 더 반짝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사업 영역에서는 공과 사를 구별했다.

“인류 구원.”

“……설마 신부님이 될 건 아니지?”

농담도 잘한다.

이 살기 좋은 세상에 신만을 위해 나를 온전히 던질 자신은 없다.

“그런 일은 로리아나가 감당해야지. 사라도 알다시피 난 그쪽으로 좋은 남자는 아니잖아.”

“알고 있었어?”

“응.”

“다행이야.”

“뭐가?”

“양심이 살아있는 나쁜 남자잖아.”

“칭찬으로 들을게.”

밤사이 사라와 많이 친해졌다.

“장립과 친해?”

어라? 사라도 장립을 안다.

“놀랄 필요 없어. 베이다이허 회의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정치 행위야. 어제 다니엘이 장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

“왜?”

“뜨겁잖아.”

“뭐가?”

“장립은 특이한 인물이야.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돼서 나타났어. 죽다 살아나면 다 그러나?”

사라는 장립에 관해 제법 깊은 내막까지 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사후세계의 비밀은 과학이 아니라 신비의 영역이니까.”

“뭘 알고 말하는 것 같아?”

“몰랐어? 나도 죽다 살아났잖아.”

“됐어.”

사라가 나의 말을 농담으로 받고 배시시 웃는다.

아직 그녀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고 있었다.

“립, 소개해 줄게.”

“반대 아니야? 립을 나에게 소개해 줘야지.”

사라는 자신만만했다.

“사라의 이 당당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나도 다니엘의 그런 여유만만한 자세가 마음에 들어.”

이심전심이 통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해가 환히 뜬 시간이지만 지난밤의 여운은 채 가시지 않았다.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눈빛.

사랑하기 딱 좋은 아침이었다.

띠리리리리리리.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를 빼면…….

“아침부터 누구?”

살짝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사라.

“정치 사업 파트너.”

“정치 사업?”

띠릭.

통화버튼을 눌렀다.

- 하하하! 다니엘! 날세!!!

회귀의 전설 2부

삼귀행(三鬼行).

“하, 함께 밤을 보냈다고 했나요?”

“……바트시여.”

우두둑.

평정심을 깨뜨리는 확정적인 보고였다.

그 소리에 나무로 만든 의자 손잡이에 깊은 손자국이 남겨졌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야훼 바트만 보일 수 있는 현상이었다.

“!!!”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던 장로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벌벌 떨었다.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야훼의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아는 제대로 된 야훼 바트였다.

지금 그녀가 분노했다.

고요하게 유지되던 마음에 파란이 일었다는 증거.

평생을 야훼 바트 곁에서 보필해 왔지만,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라 요한슨과 한국 국적의 다니엘 장이 함께 호텔에 묵었다는 사실을 전한 단순한 보고일 뿐이다.

다니엘에 관한 정보는 언제나 최우선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지금도 함께 있나요?”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묻는 야훼 바트.

“아닙니다.”

“그럼 어디로 갔나요?”

“다니엘은 장립이라는 중국계 화교와 함께 트럼프의 별장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별장요?”

“골프장을 비워뒀습니다.”

“사라 요한슨은요?”

“뉴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랬군요.”

어느새 평정심을 다시 찾은 야훼 바트 로리아나.

목소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담담했지만 손에는 아직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이만 물러가도 됩니다. 기도할 시간입니다.”

더 묻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장로가 야훼 바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오늘 같은 분위기에 잘못 걸리면 사달이 날 게 자명했다.

“배신자…….”

장로의 모습이 사라지자 로리아나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평소와 달리 사나운 눈빛을 내비치는 로리아나.

스윽.

스마트폰을 꺼냈다.

티디디디디딕.

그리고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리리.

- 기다리고 있었어.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려오는 사라 요한슨의 태연한 목소리.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난 너를 믿었는데…….”

-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다니엘이 생각보다 거친 남자거든.

으득!

놀리는 듯한 사라의 말에 로리아나가 이를 갈았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 로리아나. 화내면 안 돼. 나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니까.

개운함이 가득한 사라 요한슨의 목소리.

예상치 못했다는 사라의 말이 거짓임은 두 사람 다 잘 알았다.

그래서 로라이나의 심정이 더 상했다.

“다니엘은 언제 떠난다고 했어?”

- 나도 몰라. 비즈니스 문제로 바빠 보였어. 트럼프가 아침부터 눈치 없어 전화를 했지 뭐야! 정말…… 비호감이야.

순간 사라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해졌다.

“사라……. 너도 나에게는 비호감이야.”

로리아나가 진심을 감추지 않고 내뱉었다.

- 호호호. 로리아나 화 풀어. 건강에 안 좋아. 기도 시간일 텐데……. 그럼 안 되지.

승자의 미소를 호기롭게 날리는 사라 요한슨.

로리아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직접 보지 않기에 사라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로리아나의 두 눈에서는 레이저가 발사되고 있었다.

“갈게.”

- 응? 뭐라고?

“지금 미국으로 출발할 거야. 기다려.”

- 지, 진짜 올 거야? 한참 기도 시즌이잖아.

사라가 당황했다.

지금부터 약 한 달간, 야훼 바트의 집중 기도 기간이었다.

그런 상황에 과감하게 미국을 방문하겠다고 말하는 로리아나의 태도가 무서워졌다.

“신께서 허락해 주셨어.

- 야……훼께서?

“응.”

- 왜?

“확인하래.”

- 무엇을?

“그건 비밀이야.”

- 로리아나…….

“이건 내 비즈니스야. 그러니 사라 넌 신경 쓰지 마.”

사라의 질문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로리아나.

- …….

사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잘나가는 방계 차일드 일족이라 해도 직계 여왕의 행차에는 함부로 말을 보탤 수는 없었다.

야훼 바트 로리아나는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위험한 여왕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장 회장 말이 맞았어. FBI가 보낸 비밀 요원이더군.”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학비가 뭔지…….”

와이파이가 연결된 상태에서 에바의 사정을 듣게 됐다.

에바는 예상했던 대로 장립에게 뜨거운 방법으로 항복했다.

미국 교육 기관의 천문학적인 학비 문제로 FBI에 포섭된 여인이었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미안하다고 말하던 에바.

그런 에바를 괜찮다고 또 안아주던…… 짐승.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전에 봤던 노바 형님의 동영상만큼이나 충격이었다.

- 장 회장님. 선견지명에 경의를 표합니다.

귀신의 아부 실력이 나날이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침도 안 바르고 뻐꾸기를 날렸다.

“그런데 학비 보조는 뭡니까?”

“인연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세상이 모르는 내 비밀 계좌에서 지급할 테니까 돈 걱정 말게.”

오정 회장은 역시 배포가 좋다.

눈치를 보아 하니 자식들도 모르는 비자금 주머니가 분명했다.

어제 처음 만난 여자친구에게 주머니 끈을 화끈하게 풀었다.

- 야훼가 당신에게 심심한 위로의 포인트를 지급했습니다.

위로? 왜?

갑자기 들려오는 짠돌이 야훼 신의 포인트 지급 건에 대한 얘기에 어리둥절했다.

야훼와 난 포인트를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다.

포인트도 쥐꼬리만큼 지급할 뿐만 아니라 받고 나면 늘 찝찝했다.

그런 야훼가 위로 포인트를 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꺼림칙하게 걸리는 게 있다면 딱 한 가지.

“장 회장, 무슨 걱정 있나?”

옆에서 임성철 회장이 물었다.

장립의 육신에 완벽하게 적응한 듯 보였지만 나를 부를 때는 역시 올드한 멘트가 튀어나왔다.

- 딱 보니 여자 생각하네요! 어제 그 여자분!

총각귀신 닥쳐!

- 헤에……. 저 이제 총각귀신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

장립이 하룻밤 사이에 돌변했다.

순수하던 영혼 장립은 이제 없다.

하루아침에 상투 틀고 어른이 된 듯 착각하고 있는 장립.

“회장님. 용한 무당 아시죠?”

“무당? 당연히 알지. 만신들 여럿 만나 봤지. 아버님께서 특히 그 쪽 계통을 좋아하셨어.”

“천도재 전문도 있죠?”

“물론이네. 아주 용한 분이 계서. 처녀귀신도 그분 만나면 바로 천도 직행이야.”

“소개해 주십시오.”

“왜?”

“저 잡귀 보내버리게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자네가 참게.”

임성철 회장이 나를 말렸다.

하긴 생각이 짧았다.

임 회장도 공범이었다.

- 저…… 그걸로는 천도 못 합니다.

왜?

한국 무당님들 무시하는 거야!

- 모시는 조상신이 다르잖아요. 알다시피 전 해외파 중국산이라…….

“…….”

장립, 이제 진짜 말도 잘한다.

임 회장의 한국어 능력까지 습득한 상태다 보니 별걸 다 따진다.

“장 회장이 참아.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장립이 형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장 회장이 형 맞아. 어젯밤에야 겨우 총각 딱지 뗀 귀신하고 무슨 얘기를 해.”

“저 회장님…….”

임성철 회장도 참 뻔뻔해졌다.

냉정하게 말해 몸뚱이의 진짜 주인은 임성철 회장이다.

그런데 장립에게 은근히 슬쩍 넘기고 있다.

환상의 사기 캐미를 보는 것 같다.

“이거 다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알지?”

그 틈에도 은밀하게 속삭이는 임 회장.

나도 쪽팔려서 어디 가서 이런 말 못 전한다.

- 그런데 우리 어디 가요? 진짜 트럼프 만나러 가요?

장립의 목소리가 한층 들떴다.

부우우웅.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해변가 트럼프 소유의 별장으로 이동 중이다.

아침부터 전화를 해 한 게임 준비해 뒀다고 트럼프가 설레발을 쳤다.

눈치 참 없는 남자다.

하긴 가까운 미래에도 자기 꼴리는 대로 정치를 한 인물이니 할 말은 없다.

그런 기질 때문에 트럼프를 선택했다.

대한민국도 맛봤던 사기꾼 정치인의 결말을 미국 시민들도 똑똑히 경험해 봐야 민주주의 참맛을 알게 될 것이다.

예의도 도덕도 없는 장사치 대통령이 나라를 어떻게 파멸시켜 가는지 찍어먹어 봐야 알 테니까 말이다.

“나도 기대가 커.”

“회장님도요?”

“몇 번 미국 기업인들이 모이는 회의장에서 본 적 있네. 햄버거를 좋아하는 특이한 부자였어. 옛 우리나라 머슴들처럼 참 복스럽게 먹더군.”

“그런데 기대는…… 무슨 뜻입니까?”

운전을 하며 물었다.

- 흐흐. 전 감이 왔습니다.

립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괜히 느낌이 싸했다.

“무슨 감?”

- 트럼프 하면 유명하잖아요. 흐흐흐흐.

설마! 너 거기 가서도…….

“트럼프가 특히 금발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대해.”

“회장님!”

“장 회장. 참게.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끙.”

신음이 절로 터졌다.

트럼프는 전화로 약속을 잡았다.

사라와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작별했다.

그녀도 월가에 중요한 약속이 잡혀 있다고 했다.

나에게 트럼프 역시 꼭 만나야 할 정치적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오바마와는 결이 다른 트럼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거 유세에 돌입해야 한다.

이런저런 언질을 받은 트럼프는 한껏 들떠있었다.

내가 미국에 왔다는 걸 알고 골프와 파티 약속을 잡았다.

“다 왔군.”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트럼프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바닷가 별장 앞.

- 흐흐흐.

죽은 귀신이 먼저 웃었다.

“흐음…….”

반쯤 죽어가는 준 귀신 임 회장은 작은 감탄사만 내뱉었다.

“하아.”

그리고 죽었다 살아낸 회귀 귀신인 내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구도 못 말리는 삼귀행(三鬼行).

앞으로의 날들이…… 심히 걱정스럽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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