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4장. 같이 보실래요?
‘흠…….’
로버트 라이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만남 자체가 특이했다.
솔직히 로버트는 장립이 누군지 정확히 몰랐다.
유럽 출신 화교라는 것과 홍콩에 사업장이 있다는 게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런 로버트에게 다니엘의 지시가 내려왔다.
홍콩에서 장립이라는 청년이 찾아오면 자신을 대하듯 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의 말처럼 로버트를 찾아온 장립.
성대한 파티에 그를 초대해 만남을 가졌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띌 만큼 반갑게 장립을 환영해 주었다.
은밀히 뒤를 따라다니는 파파라치 정보원들을 통해 사진이 찍혔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 몇 번 통화를 나눈 게 장립과의 있었던 일의 전부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장립이 다니엘을 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전혀 어색하지 않아. 오늘 처음 만났는데…….’
로버트의 의구심은 계속 됐다.
초면이 분명한 장립과 다니엘 사이에 흐르는 온화한 기운.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들처럼 두 사람 사이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립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다니엘은 어제 미국에 도착했다.
예전 같았다면 만나자마자 그간의 안부를 묻고 이곳저곳 몸을 치료해주고 필요한 약도 주었을 텐데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호텔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더니 오늘 아침에야 모습을 보였다.
분명 오랜만에 만나는 다니엘이었지만 반가워하기는커녕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낯선 이질감이 느껴졌다.
반면 립은 몇 번 만나서인지 갈수록 친근감이 들었다.
낯선 얼굴이지만 전해지는 느낌이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
물론 다니엘의 포스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달랐다.
거센 삶의 풍파를 모두 건너본 자에게서 풍겨지는 듯한 묵직한 그 무엇이 겸비됐다.
반면 립은 경쾌하면서도 핵심을 파고드는 매력이 풍겼다.
로버트가 예전부터 알아온 다니엘처럼 말이다.
“룸에 식사 준비했습니다. 올라가실까요?”
“그럴까요?”
‘말투도 변했어?’
립은 젊은 청년다운 면모를 보였지만 왠지 다니엘은 노회한 장인처럼 굴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다니엘의 음성 그대로 젊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유창했던 영어 발음도 서툴고 어눌한 구석까지 보였다.
평소 보였던 다니엘과 분명히 달랐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로버트.”
“네. 보스.”
다니엘이 로버트를 불렀다.
“우리 둘만 있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이상해. 이상해.’
다니엘의 지시하는 태도 역시 과거와 완전히 달랐다.
누가 봐도 권위적인 태도로 변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모습 같지 않게 아주 몸에 흠뻑 배었다.
의문을 가진 채 자리를 비켜 나온 로버트 라이언.
그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말없이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
“회장님, 장태산으로 사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스위트룸.
창밖으로 펼쳐진 LA 시내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흐흐. 이게 은근히 중독돼. 평생 짧은 키로 살다가 위로 쑥 올라오니까 공기 맛이 달라. 거기에 몸도 튼튼하고. 아주 마음에 들어. 만나는 여자들마다 추파를 던지는데 지조 지키느라 혼났어.”
임성철 회장이 능청을 떨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으로 당첨 됐다.
목숨 줄이 내 손에 달려 있는 관계로 배반할 일도 없었다.
미국에 들어오기 전 미리 장태산의 외형으로 탈바꿈시켰다.
세상을 호령하고 명성을 떨치는 한 시대의 기업가도 되찾은 젊은 육체에 정신없이 흠뻑 빠져들었다.
진심으로 나로서의 삶을 즐기고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제 말 잘 들으시면 가끔 빌려드리겠습니다.”
“장 회장이 정중하게 부탁해야 하는 거 아냐? 입장이 그럴 텐데 말이야. 허허허.”
기업인 아니랄까 봐 바로 밀당이 들어왔다.
그러나 어림없다.
“제 대역으로 사용할 존재가 세상에 회장님만 계시다고 착각하십니까? 더구나 회장님 목숨이…….”
말을 줄였다.
대신 손을 가볍게 쥐어 보였다.
“끄응……. 미안해. 그냥 해본 말이야.”
바로 꼬리는 내리는 임성철 회장.
“영어 공부 좀 하셔야겠습니다. 발음이 영 아닙니다.”
“미안해. 내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태어나서 그래. 당시 영어선생님이 모두 일본 교과서로 영어를 배웠잖아.”
“그래도 글로벌 리더 아니셨습니까.”
“통역 쓰지 귀찮게 뭐하러 직접 공부를 해.”
“그래서 안 하시겠다는 겁니까?”
“할게! 나 러시아에서 매일 영어하고 러시아어 공부했어. 내가 살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기는 처음이야!”
손사래를 치면서까지 공부를 하겠다고 열변을 하는 임성철 회장님.
그 모습이 웃겼다.
“풋.”
꾹 눌러 참던 웃음이 터졌다.
“날 놀리니 재밌어?”
“크크. 회장님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놀려봅니까?”
“용서해 줄게. 장 회장 덕분에 새로운 세상 많이 구경하고 있어.”
밖을 내다보는 임성철 회장의 얼굴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도 감지덕지한데 젊디젊은 나의 몸까지 누렸다.
러시아에서 사냥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이제는 지겨워질 타이밍이었다.
임성철 회장은 눈앞의 달라진 세상에 고무되었다.
그 누구도 이미 노인이 되어 버린 인간의 몸을 다시 젊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가능했다.
“며칠 이곳에서 푹 쉬십시오. 물론 행동반경은 호텔에 국한됩니다.”
“어디 가려고?”
“본래 모습으로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돌려줘야겠지?”
“둘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쉽네.”
“오정 팔아서 그 몸 사실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전부 다 주겠네.”
진심인 듯 반짝반짝 빛나는 임성철 회장의 눈동자.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육신은 잠시 빌려 쓰고 사는 탈에 불과하다.
사는 동안 다들 언젠가 벗어야 하는 육신인 줄을 모르고 몸뚱이를 애지중지한다.
그러다 보니 사이비들이 그것을 노리고 들러붙는다.
지금 뒤집어쓴 육신의 몸으로 영생할 수 있다고 꼬드겨 단물을 쪽쪽 빤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니 당연히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영생하는 존재는 없다.
다만 수많은 세월을 거듭해 나고 죽는 윤회만 있을 뿐이다.
때가 되면 늙은 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는 게 이치다.
다만 인간의 몸을 다시 받아 태어나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을 가진 수많은 존재들 전부가 태초의 빛으로부터 태어난 영혼의 파편들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왔을 때 카르마 포인트를 바짝 벌어야 다음 생에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이 우주와 인류에 이로움을 주는 자들만이 다시 사람의 몸을 얻을 수 있다.
죽어 본 나는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안다.
“심심하시면 이거 빌려드려요?”
“응? 뭘 말인가?”
“이거요.”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그래도 돼?”
임성철 회장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인다.
누가 봐도 장립의 탈도 훌륭했다.
키도 크고 또 제법 잘생겼다.
신분 역시 무시 못 할 정도는 됐다.
다만.
“중국어…… 잘하세요?”
“주, 중국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임성철 회장.
“못하면 없던 걸로.”
“할 줄 알아! 그래도 나 글로벌 리더였잖아. 하하하하.”
천하의 오정 주인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공부하세요. 영어,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들을 섭렵하셔야 합니다. 가끔 이렇게 다른 육신을 빌려 쓰시려면 말입니다.”
“…….”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임성철 회장.
말이 쉽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단시간에 습득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면 원래 몸으로 그냥 남은여생 쭉 사시는 것도…….”
채찍을 가했다.
“무슨 소리! 내가 공부하면 한 공부해! 나 머리 좋은 거 몰라?”
금세 활활 타오르는 학구열.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이 은혜…… 죽어서 다 갚을게!”
“죽어서 말고 살아서 갚으십시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씨익.
나도 모르게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아! 참고로 이 몸을 사용하게 되시면 누군가 아는 체를 할 겁니다.”
“???”
“적당히 대꾸해 주고 같이 놀아주면 됩니다.”
“그게 무슨…….”
“직접 경험하시는 게 가장 빨리 알게 되는 방법일 겁니다.”
노바 형님 시리즈를 시청하느라 영혼을 빼놓은 얼빠진 귀신 하나.
임성철 회장님과 붙여 놓으니 뭔가 그림이 확 그려졌다.
***
“이것도 괜찮네.”
임성철 회장은 새로 바꾼 몸이 마음에 들었다.
장태산처럼 키도 컸고 몸도 좋았다.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지만 자신이 본래 사용하던 육체와는 확실히 달랐다.
“마법인가? 도대체 정체가 뭔지.”
장태산의 정체를 낱낱이 알고 싶은 마음은 진작 포기했다.
임성철 회장이 판단하기에 장태산은 신이나 진배없었다.
자신의 목숨줄을 늘려줬을 뿐만 아니라 생각지 못한 새로운 육체도 경험하게 해줬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숨 푹 자고 나면 육신이 바뀌어 있었다.
스으윽.
손바닥으로 탄탄한 몸과 근육, 피부를 만졌다.
평소 눈 뜨면 만져지던 늙은 몸뚱이와 달랐다.
“으음…….”
매끄러운 피부와 단단한 근육에 만족스러운 신음이 절로 나왔다.
변태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몸을 만져보는 기분이 꽤 좋았다.
몇 차례 엄청난 돈을 투자해 미국의 비밀 의료재단에서 시술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는 일로 잠시 회춘을 경험하는 정도뿐이었다.
인간의 노화는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리듬이었다.
- 누구세요?
“허억!!!”
갑자기 귓가에 들려오는 날선 음성에 임성철 회장은 깜짝 놀랐다.
눈을 돌려 사방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헛소리가 다 들리는군……. 허어.”
임성철 회장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리고 알몸을 드러내고 서 있는 자신의 몸을 다시 구석구석 훑었다.
“흐흐흐.”
역시 만족스러웠다.
- 변태세요?
“누, 누구야!!!”
이번에도 진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버럭 호통부터 친 임성철 회장.
- 그러는 아저씨는 누구신데요?
“귀,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모습을 보여라!”
고전적 대사를 내뱉는 임성철 회장.
이미 온몸은 공포로 인해 닭살이 돋은 상태였다.
그만큼 모습을 감춘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 반대죠. 사람이면 물러나고 귀신이면 나타나라고 해야죠.
‘설마!’
임성철 회장은 장태산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이 몸을 사용하면 누군가 아는 체를 할 거라고 말했다.
- 설마는 됐고요. 누구시냐고요!
귀신의 음성이 한층 까칠해졌다.
“나 오정 임성철 회장.”
- 오정요? 그 핸드폰 회사요?
“세계 1위 스마트폰 생산 업체라고 불러.”
이 상황에도 임성철 회장은 꼿꼿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 그건 그렇고. 장태산 그분 어디 갔어요?
“장 회장을 알아?”
임성철 회장이 한결 안심하며 의아한 듯 물었다.
- 물론이죠. 그분에게 중요하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임성철 회장은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다음 편! 다음 편이 필요하다고요!
“그게 무슨?”
다급한 듯한 귀신의 음성에 임성철 회장도 호기심이 생겼다.
- 아직 안 보셨어요?
“무얼 말인가?”
- 흐음……. 그럼 첫 편부터 같이 보실래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