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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장. 주걸. (879/1,284)

888장. 주걸.

‘죽여 버리겠어!’

진봉은 뼛속까지 분노했다.

눈앞에 버젓이 다시 나타난 장립.

키만 크고 허우대만 멀쩡했을 뿐 남자로서의 매력은 하나도 없던 놈이었다.

명문대 출신이라고 조직에서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하는 짓은 갱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여자 하나도 지켜내지 못한 패배자였다.

여여는 진봉에게 목숨 이상의 여인이었다.

남자로 살아오면서 난생 처음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였다.

여여는 진봉이 만났던 길거리의 흔한 여자들과 달랐다.

처음 보스가 소개했던 날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처음 여여를 마주한 진봉은 충격을 받았다.

수줍게 웃던 미소.

보스의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약과 술에 전혀 취해 있지 않은 맑은 눈동자.

방금 전까지 초원을 달리던 사슴 같았다.

베푸는 마음도 고왔다.

경호원인 자신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건네며 수시로 챙겨주었다.

호위 도중 몸을 다치는 일이 있으면 직접 약상자를 꺼내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몇 차례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진봉은 여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상대는 보스의 여자.

미국에서 다른 조직 갱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목숨을 구해주었던 보스.

평생 보스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그렇기에 여여에 대한 마음을 숨겨야 했다.

진봉은 어린 시절부터 피나는 무공 수련을 해왔다.

사람 간에 나누는 정을 몰랐던 그에게 손을 먼저 건넨 보스는 하늘이었다.

그런 보스를 따라 갱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 내 다른 조직의 갱들과 달리 마약을 취급하지 않는 와칭.

차이나타운의 상권을 보호하는 게 주 임무였다.

양심을 속일 필요도 없이 원칙만 따르면 됐다.

보스는 진봉에게 지저분한 쓰레기 처리 같은 일은 맡기지 않았다.

진봉에게 여여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고 아픈 사랑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보스가 아닌 다른 남자.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놈에게 여여가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하고 있던 여여의 경호원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 변화를 더 빨리 알아챘다.

진봉은 이해할 수 없는 실없는 농담에도 두 사람은 죽이 맞아 깔깔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지식이 없는 그림과 역사, 사회 전반에 관한 문화적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여여의 향수가 바뀌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독한 장미향을 쓰기 시작했다.

센스도 없고 유행도 모르는 얼치기 장립이 선물한 향수였다.

그 일 또한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당시 장립은 조직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보스도 그를 신뢰했다.

점점 미소를 잃고 어두워져 가던 여여의 얼굴에 웃음기가 띠고 행복해 했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장립, 멍청한 얼간이 놈이 여여와 도망을 쳤다.

하필 진봉이 쉬는 날 벌어진 사건.

생각지 못한 돌발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을 응원했다.

험악한 사냥개 갱들의 세상에서 장립이 여여를 구출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장립은 끝까지 멍청했다.

주먹도 안 되는 놈이 머리도 둔했다.

여여를 데리고 도망친 곳이 고작 LA 갱들 지역, 그곳에 숨어 있다 발각된 것이다.

갱들 조직은 서로를 이용하는 일이 많아 나름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일은 순식간에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장립이 사막에 묻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여도 보스에게 돌아왔다.

그날 이후 더 엉망이 되고 망가져 버린 여여.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했다.

미소 역시 잃었다.

매번 멍한 눈으로 담배를 입에 문 채 하늘만 바라보던 여여.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봉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여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저러다 세상을 등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보스는 그런 여여를 그냥 놔뒀다.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는 컬렉션이나 트로피 정도로 여겼다.

진봉은 다짐했다.

여여가 저대로 바닥까지 추락하다 죽기라도 하면 자신도 미련 없이 생을 놓겠다고 말이다.

여여의 상황이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던 때 죽었다던 장립이 나타났다.

여여가 장립에게 안기는 모습에 눈이 돌아갔다.

살아오면서 몇 번 겪지 않은 강력한 살기가 동했다.

여여를 가질 수는 없지만 또 다시 멍청한 놈에게 빼앗기는 건 싫었다.

여여는 진봉만이 섬길 수 있는 여신이었다.

“네가 먼저 들어와.”

장립이 손끝으로 진봉을 불렀다.

으드득.

이를 바드득 가는 진봉.

‘이 자리에서 널 죽여…… 내 사랑을 증명하겠다!’

진봉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휘이익.

태극권의 공격 자세를 잡았다.

지금은 건강 체조로 더 많이 알려진 태극권이지만 진정한 뿌리는 무당파 무공이다.

부드럽지만 일격은 강력했다.

맞는 순간 내장이 터져나가기 일쑤.

보스 주걸도 인정한 진봉의 무공 실력.

“짝퉁이네.”

그 순간 장립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기의 흐름을 흐트러뜨리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헛소리 집어치워!!!”

진봉의 가문은 대대로 정통 진가 태극권을 수련해 왔다.

무당파에서 파생됐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더 적통에 가까웠다.

“태극권은 말이야…… 이렇게 하는 거야.”

휘이이익.

난데없이 장립이 자세를 잡았다.

왼손을 뒤로 살짝 돌리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원을 그리는 장립.

“!!!”

진봉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립!’

여여는 깜짝 놀랐지만 내심 감탄했다.

그녀가 알던 장립은 무공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다른 갱들처럼 총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었다.

와칭에서 문학과 예술을 더 자주 말하던 유일한 사람.

따뜻한 눈빛을 갖고 있었고 언제나 부끄럼을 많이 탔다.

다른 갱들과 달랐던 그에게 여여는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팔려오다시피 주걸의 수중에 들어왔던 여여.

미국 이민자였던 부모님은 차례로 병을 얻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먹고 살기 바빴던 부모님은 비싼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

암에 걸린 엄마와 엄마를 간병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버린 아빠.

엄청난 의료비에 당연한 수순처럼 집안은 파산했다.

부모님이 무너지자 하버드에 재학 중이던 여여에게 바로 타격이 왔다.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사회학을 전공해 교수가 되고 싶었던 여여.

큰돈을 준다는 말에 이끌려 고급 콜걸이 됐다.

그리고 출근 첫날 주걸을 만났다.

한눈에 여여에게 반한 주걸이 그녀를 첩으로 삼았다.

그는 말없이 집안의 빚을 모두 정리해 줬다.

부모님도 큰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게 해줬다.

처음에는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의 여자가 됐지만 주걸은 남자 구실을 못 했다.

그가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주고 원하는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처음에는 그와의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던 주걸.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잔혹한 면모를 목도한 뒤 그 생각은 산산이 깨졌다.

조직을 배신한 한 조직원을 붙잡아 사지를 찢어 죽였다.

그의 가족도 찾아내 잔혹하게 살해한 주걸.

그의 진짜 모습을 확인한 여여는 그날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궜다.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부모님도 결국 병이 깊어져 더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더 이상 주걸 옆에 있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작은 바람에도 거세게 흔들리던 그때 장립을 만났다.

무엇보다 대화가 통했다.

그는 주로 주걸의 집에서 근무를 했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았다.

예기치 못하게 여여는 진짜 사랑에 빠졌다.

장립은 누구보다 순수했다.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도망을 계획했고 곧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세계에 대해 너무 몰랐다.

주걸의 영역을 벗어난 지 이틀 만에 붙잡혔다.

여여의 눈앞에서 흠씬 폭행을 당하고 팔다리가 부러진 채로 장립은 끌려갔다.

그때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주걸이 있었다.

장립이 죽었다는 소식도 그때 들었다.

더 이상 하늘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고 모든 걸 포기하고만 싶었다.

매일 여여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에 전념했다.

술에 취하고 담배를 피웠다.

농담처럼 나눈 얘기였지만 과거 장립과 약속한 대로 마약은 하지 않았다.

주걸은 처참하게 망가져 가는 여여를 모른 척했다.

대신 곁에 두고 인형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하루하루를 죽기 위해 버티던 그 때 장립이 다시 나타났다.

꿈에서도 그리던 장립.

“타앗!”

진봉이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다.

한 주먹에 장립을 때려죽일 것 같은 기세다.

여여는 두 눈을 감았다.

장립이 다치는 걸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장립은 진봉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퍼어엉!

가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크아아악!”

찢어질 듯 터져 나온 비명.

와장창창.

무언가 거대한 게 떨어져 탁자를 부서뜨리는 굉음이 들렸다.

‘립……. 이번에는 꼭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또로록 볼을 따라 흐르는 뜨거운 눈물.

여여는 이제는 확신했다.

자신의 인생에 장립이 없다면 이번 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여여…….”

그때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들려오는 장립의 목소리.

여여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장립의 담백한 얼굴.

그 너머로 진봉이 엉망이 된 탁자와 함께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나 예전의 장립이 아니야.”

‘변했다. 이 남자.’

여여도 알 수 있었다.

외모는 과거의 장립과 똑같았지만 눈빛 속에 담겨 있는 강함은 낯설었다.

마치 타인처럼.

스슥.

장립이 여여의 머리칼을 쓸었다.

느낌이 묘하게 달랐다.

과거에는 한없이 부드러웠던 손길이지만, 지금은 무언가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장립!!!”

그때 일단의 와칭 조직원들이 나타났다.

인상을 잔뜩 쓴 그들의 손에는 이미 총이 들려 있다.

차이나타운의 지배자들이 이 시간까지 지금 사태를 몰랐을 리 없다.

“보스를 만나고 올게.”

“립…….”

여여는 목이 메었다.

죽음을 경험한 립이 저렇게 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했다.

사락.

담담한 얼굴로 가볍게 안아주는 장립.

“여기서 기다려.”

몸을 떼어내고 여여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기다릴게. 당신이 올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여여가 립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면 장립이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진봉과의 주먹 대결은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나서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총을 쏠 것 같은 분위기의 와칭 조직원들.

쪽.

험악한 분위기와 달리 여유 있는 모습으로 여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는 장립.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저벅저벅.

와칭 조직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가자. 보스에게.”

아무리 봐도 끌려가는 게 아니라 먼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미친…….”

“허.”

총을 든 와칭 조직원들이 그런 장립의 태도에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큰 소란 없이 그들도 장립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갔다.

“아…….”

긴장이 풀리자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여여.

“앉아요.”

누군가 다가와 여여를 부축했다.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다.

여여보다 먼저 장립을 좋아했던 설영.

그녀가 식당 문을 벗어나는 장립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

끼이익.

저택 문이 열렸다.

차이나타운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골목길을 끼고 앉은 중국식 건물.

머릿속에 이곳 지리가 훤히 그려졌다.

장립의 의식과 동기화가 많이 진행된 듯했다.

- 꿀꺽.

영혼 장립이 많이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쫄리냐?

- 주걸은 대단한 자입니다.

주걸이라는 자는 죽은 장립을 다시 한 번 겁먹게 했다.

“뭐 해! 어서 들어가.”

10여 명의 와칭 조직원들이 나의 뒤를 따라왔다.

저택 주변 역시 감시가 삼엄했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현관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그그극.

이중으로 된 지하실 문이 열렸다.

웬만한 무기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두꺼운 철문과 방탄유리문.

담담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르르륵.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혔다.

따라 들어온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채 부드러운 연검을 들고 서 있는 사내.

- 보, 보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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