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3장. 나 홀로 갱스터(5)
“물론입니다. 그 자식은 시체도 비쌉니다!”
그렉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후안 파비오는 그야말로 개자식이었다.
지금껏 놈 때문에 파견 나간 FBI와 마약 단속국 직원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는 그렉의 친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인 그렉을 따라 국가에 헌신했던 남동생.
911사태 이후 해상 마약 수송이 봉쇄되면서 남미 쪽 마약 카르텔이 멕시코를 이용했다.
그사이 시날로아 카르텔이 가장 큰 조직이 됐다.
규모가 커진 만큼 미국에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해를 가했다.
조국에 일신을 바쳐 봉사하겠다고 선언했던 동생은 특수 임무에 자원했다.
일의 특성을 잘 알고 있던 그렉은 한사코 말렸지만 애국심에 한껏 고취돼 있던 동생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결과 동생은 목숨을 잃었다.
멕시코 정부군과 함께 작전에 투입됐지만 정보가 샜다.
치열한 교전 끝에 FBI 요원 세 사람과 마약 단속국 직원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시체도 겨우 머리만 수습할 수 있었다.
현장으로 들어가는 길목, 도시명이 적힌 현판 위 장검에 꽂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건강하던 부모님도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년 뒤 두 분이서 죽음을 선택했다.
피가 끓어 당장 복수하고자 했지만 정부에서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건들면 더 바짝 독이 오르는 방울뱀처럼 행동하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멕시코 정부도 그들을 제압하는 일을 주저했기에 미국 정부도 섣불리 범죄조직과의 전쟁에 뛰어들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전혀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느닷없이 미국에 입국한 다니엘이 후안 파비오의 몸값을 물어온 것이다.
구스만과 거의 동급으로 1억 달러가 걸려있는 후안 파비오.
- 알겠습니다.
“다니엘? 그 자식 잡았나요?
통화를 끝내려는 다니엘을 붙잡고 다급하게 묻는 그렉.
- 친구 손에 잡혀 있습니다.
“……바로 연락 주십시오.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승진 뒤 미국 본토로 돌아온 그렉은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렸다.
뭔지 모르지만 다니엘이라면 자신의 묵혀 있던 복수를 완성해 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후안 파비오를 잡고 있는 친구가 누군지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다니엘이 한국에서 보여줬던 신비한 능력이라면 친구라는 자도 그 정도 수준의 인물은 될 거라는 믿음이 갔다.
FBI 고위직 중심으로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
한국 청년 다니엘 장은 초능력을 사용하는 자라는 것.
미국 정부에도 그와 유사한 초능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예지력을 비롯해 여러 능력을 갖춘 자들이 따로 보호를 받거나 교육 중에 있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다니엘 장은 다른 능력자들처럼 건들 수 없었다.
그가 구축해 놓은 인맥 망이 상상을 초월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정치권 권력과도 무척 가까웠다.
승진의 기회가 멀어지고 있던 그렉에게 그는 동아줄을 던졌다.
- 늦지 않게 연락드리겠습니다.
뚝.
행운을 가져온 통화가 끝났다.
“위치는?”
그렉은 옆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전혀 잡을 수 없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부하.
“이번에도 그렇군.”
스마트폰이 연결되면 자동으로 추적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역시 다니엘의 위치는 잡을 수 없었다.
천하의 FBI도 다니엘의 스마트폰 발신지를 추적하는 게 불가능했다.
“마약 단속국에 연락해. 후안 파비오의 시체를 찾을 것 같다고 전해.”
“넵!”
우렁차게 대답하는 부하.
‘알렉스……. 이제 널 볼 면목이 생겼구나.’
그렉은 환하게 웃어주는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이 차이가 꽤 났던 관계로 마치 아들처럼 돌보며 함께 자란 동생.
이제야 그가 편히 신의 품에서 쉴 수 있도록 보내줄 수 있게 됐다.
***
‘저 자식 정체가 뭐야!’
후안 파비오는 오랜만에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 동양인.
언뜻 보아서는 중국인 같았다.
자신 못지않은 프로 살인자의 냄새가 물씬 났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행동도 거침없고 파격적이다.
방금 통화를 끝낸 상대는 FBI가 확실했다.
자신에게 걸린 몸값까지 바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상대는 고위직이다.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바 마음먹은 것은 바로 해내는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다.
더욱이 피붙이도 하나 없다고 했다.
멕시코인들이 카르텔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가장 핵심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해를 당하게 되는 결과 때문이다.
“왜 쫄려?”
사람의 탈을 쓴 악마 같은 놈이 웃는다.
“네 몸값이 1억 달러라는데 관심 있어?”
도리어 파비오에게 흥정을 걸어왔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파비오.
아무리 카르텔 2인자라지만 그렇게 큰돈은 당장 만들기 힘들었다.
물론 꿍쳐 놓은 돈은 10억 달러가 넘었다.
하지만 그 돈을 다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얼마면 되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슬슬 흥정에 응해야 할 타이밍.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코끼리도 쓰러뜨려 눕힐 수 있는 산탄총을 막아내는 괴물이다.
그런 자와 싸우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
시간도 촉박했다.
정보가 샜으니 FBI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이성을 되찾고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멍청하게 2000만 달러를 제시한 패드로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10억 달러.”
“뭐, 뭐라고!!!”
파비오는 기겁을 하며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그것도 최소야.”
“미친!”
“아깝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 아무리 악인으로서 수호하는 악이 선이라지만…… 그것도 엄연히 기준이라는 게 있는 거야. 넌…… 타고난 살인마였어.”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후안 파비오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도 처음부터 이런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니다.
한때는 찬란하게 꾸었던 꿈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을 곧잘 찼다.
주변에서 칭찬을 들을 때마다 축구 선수가 되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열악했던 빌어먹을 환경이 이 길로 파비오를 내몰았다.
집은 말할 수 없이 가난했고 부모라는 자들은 무지했다.
가깝게 지내던 선배들이 마약 카르텔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감히 근처에도 갈 수 없던 미녀들과 어울렸다.
후안 파비오도 그런 선배들처럼, 또 다른 동무들처럼 그렇듯 서서히 물이 들었을 뿐이다.
살인은 처음이 무척 어려웠지만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이 후안 파비오로 하여금 이 길이 자신의 삶임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하늘이 내어준 길이라고 믿었다.
“내가 굳이 알아야 돼?”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되묻는 놈.
“…….”
후안은 입을 다물었다.
“같은 환경에 처했었던 네 친구들 모두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농부, 외판원, 상인…… 등등. 그들은 왜 너처럼 이런 길을 걷지 않았을까?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한 거야. 그러니 책임도 져야지."
마치 인간의 인생을 심판하는 자처럼 놈이 따지고 들었다.
“닥쳐!”
후안 파비오는 분노가 치솟았다.
조직의 2인자로 앉으면서 누구에게도 듣지 않았던 충고였다.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진실의 말들에 악만 남은 분노가 고개를 들며 발악했다.
“그래. 닥쳐주지. 영원히.”
피이잉!
퍼어어억!
허공에 떠 있던 총알 하나가 그대로 방향을 틀어 후안 파비오의 이마를 꿰뚫었다.
그리고 반대편 벽에 박혀 들었다.
촤아아아앗.
총알이 관통한 파비오의 머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다.
더 이상의 협상은 필요 없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후안 파비오……. 너의 이번 생은 여기까지.”
간결하고 깔끔한 심판자의 선고.
“으으으…….”
패드로 라이언이 멕시코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며 신음을 흘렸다.
주르르르륵.
LA 갱들의 두목도 신랄한 죽음 앞에서는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축축한 무엇인가가 바닥을 흥건히 적혔다.
그리고.
“사, 살려줘.”
쿵!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삶의 심판자에게 자비를 구했다.
“넌…… 그 말을 들어줬나?”
“…….”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두 손으로 빌던 수많은 이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자비를 베푼 적 있나?”
“난…….”
패드로 라이언은 차마 뒷말을 뱉지 못했다.
갱의 삶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마음에 자비라는 걸 담아본 적이 없었다.
악행을 저지르기 위한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모조리 파괴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제거됐다.
이성마저 마비되는 순간이면 칼과 총을 이용해 난도질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악의 길만 걸어오면서 오늘날의 권력과 부를 이루었다.
“네 죄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 거다. 기억하고 싶지 않겠지만 네 영혼은 너의 처음과 마지막을 지켜보는 가장 냉정한 목격자이면서 기록자다.”
“크으…….”
패드로 라이언이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거짓말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편린들.
아름답다고 느껴질 만한 추억은 거의 없었다.
매번 약에 취해 있던 아버지의 가정 폭력, 가출, 그리고 갱스터.
분노로 가득했던 시절을 보상 받기 위해 쾌락에 몰두했다.
순간의 쾌락이 주는 즐거움은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끼게 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걸 던졌다.
“패드로 라이언……. 네 가련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마.”
퍼어어억!
그게 끝이었다.
후안이 난사해 놓은 총알들 중 하나가 다시 공간을 갈랐다.
LA 뒷골목의 대장 SUR-13의 보스 패드로 라이언.
특별히 부탁해 놓은 조용한 밤, 그보다 특별한 습격자에 의해 머리통이 박살났다.
수하로 부리던 다른 갱들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였다.
쿠우웅.
거대한 덩치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눈동자에 담긴 그의 마지막 감정은 후회.
그러나 누구도 그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저 쓰레기처럼 살던 갱단 두목의 처참한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으음…….”
모든 상황을 두 눈으로 똑바로 지켜본 카를로가 신음을 흘렸다.
절대 죽을 것 같지 않던 패드로 라이언이 눈앞에서 쓰러졌다.
한 호흡의 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LA 최고 갱단을 주무르던 두목의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또 그가 이렇게 죽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다.
“왜 너도 쫄려?”
장립이 카를로를 쳐다보며 물었다.
시크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진짜 갱스터……다.’
그것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1인 갱스터.
이다지도 서늘하고 차가운, 그리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죽음은 처음 목격했다.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는 썩어빠진 갱들의 영혼을 일시에 깨우는 장립의 일침.
그간 봐 왔던 갱들의 죽음에 비하면 최고의 죽음이었다.
상대 조직에 붙잡혔다면 온갖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겪다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특히 패드로 라이언은 죽음을 부르는 고문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랬던 패드로에게서 회한의 감정을 끌어낸 장립의 준엄한 목소리.
쿵! 쿵!
카를로는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장립과 마찬가지로 발목을 잡는 가족도 없었다.
다만 이 순간 아쉬운 게 있다면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인생이 억울한 것뿐.
욕망을 좇아 온몸을 불태워도 그 욕구 역시 잠시뿐이었다.
당장 목이 말라 콜라를 마셨지만 그 뒤 더한 갈증이 몰려오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살다가 상대 조직이나 동료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삶.
그러다 머리통에 구멍이 뚫려야 끝나는 인생.
사람으로서 품어야 하는 삶에 대한 진한 욕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왔다.
저들처럼 죽기에는 뭔가 억울했다.
본능적인 욕망만을 좇던 것과 다른 그 이상의 가치를 좇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샘물처럼 솟았다.
그리고.
“보스……. 절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카를로의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졌다.
죄 많은 영혼이 성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듯 목소리에 절박함이 실려 있었다.
눈앞의 장립이라면 자신을 이 구렁텅이에서 끌어내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해 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겼다.
“후훗.”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는 장립.
“…….”
카를로는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더 속이 탔다.
여기서 버림을 받는다면 당장 그는 내일 아침 주검이 될 것이다.
패드로의 나머지 부하들과 다른 갱단이 카를로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카를로.”
장립이 더없이 조용한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네……. 보스.”
“인생의 소중함을 느꼈나?”
진실함이 가득 찬 눈빛과 물음.
끄덕.
카를로는 어린아이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그걸 깨닫는 순간 넌 이미 자유의 몸이 됐다.”
“!!!”
‘자유인’라는 말에 카를로는 그만 울컥했다.
영혼이 그 말의 의미를 먼저 알아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진심어린 말.
“보, 보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수십 년간 모셔왔던 것만 같은 진짜 보스 장립.
세상에 이런 멋진 사내가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협박과 거금에도 흔들지 않고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해내는 진짜 남자.
카를로는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그런데…… 카를로.”
갑자기 심각해진 표정으로 카를로를 부르는 장립.
따로 지시할 일이 있는 듯했다.
“하명하십시오. 보스!”
카를로는 가슴 벅찬 마음으로 보스의 명을 기다렸다.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패드로의 수하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자는 멋진 말을 할 것 같았다.
“……알고 있지?”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듯 전하는 목소리.
“네?”
“패드로 라이언이 달러를 잔뜩 쌓아 놓은…… 금고 말이야.”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