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7장. 이름의 대가(2). (870/1,284)

877장. 이름의 대가(2).

“태산이가 들어왔다고 해요.”

“언제?”

“어제요.”

“젊어서 그런지 나보다 바쁜 것 같다.”

“세계적 투자자잖아요.”

“아빠는 아니고?”

“아시면서~.”

고연지가 활짝 웃었다.

고자룡은 회장실에서 막내딸 고연지의 보고를 받았다.

‘많이 변했어.’

아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엘자 가문의 가풍 때문에 기업 경영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고연지.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자신의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 했던 딸이 이제는 농담도 던졌다.

진심으로 보기 좋았다.

선친의 유훈 때문에 그동안 기업 경영에 제약이 있었던 여식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가풍도 바뀔 때가 됐다.

과거 시대와 달리 집안의 손이 귀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책임경영의 핵심은 핏줄을 중심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었다.

전문 경영인들은 실적에 쫓겨 과감한 미래 경영에 투자하기를 꺼렸다.

오너 리스크가 분명히 존재했지만 여러 교육으로 빈틈을 커버해 유지해 왔다.

이쯤 되니 고자룡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고연지의 일처리는 객관적으로 봐도 깔끔했다.

장태산이 기폭 장치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고연지는 경영 참여 시도도 못 했을 터.

‘그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문득 장태산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오만방자한 태도로 자신을 면전에 두고 엘자그룹의 어두운 미래를 예측했다.

처음에는 극구 부정했지만 녀석의 말은 차차 맞아떨어졌다.

급기야 지금에 와서는 장태산의 손을 잡았다.

스치는 인연일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러모로 인연이 깊어졌다.

과거 부하 직원으로 있던 장대국이 녀석의 아버지였다.

“배터리 공장 증설은 문제가 없는데……. 그보다 중국 정부가 문제에요. 뭔가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거 같아요.”

신사업을 위해 테스크 포스가 구성됐다.

이사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고자룡이 결단을 내렸다.

아들 고광문 전무가 메인을 맡았다.

당연히 방계 쪽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철두철미하게 감췄다.

동시에 중국 쪽에 넌지시 신사업에 관련해 타진했지만 반응이 미지근했다.

도리어 엘자그룹 배터리 사업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만 들어왔다.

중국 정부가 지원하는 전기차 정책에 엘자 배터리를 제외하겠다는 정보.

‘모든 게 그 녀석 말대로야.’

전혀 예기치 못하고 당했다면 뼈아프게 후회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혼란스럽지 않았다.

미리 예상하던 바와 맞닥뜨렸을 때는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대표 경영인도 사람인지라 충격을 받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있다.

그러나 장태산이 놓은 면역 주사를 대차게 맞은 덕에 영향은 크지 않았다.

“자국 산업을 키우고 싶어서다. 한 번 주도권을 빼앗기면 되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중국과 사업한다는 게 이렇게 부담이 될 줄은 몰랐어요. 아빠…… 정말 대단해요.”

“웬일로 칭찬이냐?”

“제가 항상 존경한 거 모르세요?”

고자룡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고연지는 내심 감탄했다.

경영 참여 후 더 듬직하게만 여겨지는 엘자의 주인.

“장태산이 아니라?”

“아빠 질투하세요? 태산이는 멋진 친구고. 아빠는 아빠잖아요.”

“내가 봐도 잘난 녀석이다.”

“그건 인정해요. 문제는 너무 잘났다는 거죠…….”

고연지의 말끝이 흐려졌다.

언뜻 봐도 주변에 넘쳐나는 미녀들이 많았다.

게다가 다들 집안 배경이나 능력 면에서도 대단했다.

또 그 관계들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잘난 남자일수록 주변에 미모의 여성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인연이라면……. 하늘이 맺어 주겠지.’

고자룡은 어떤 때보다 일에 집중하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솔직히 장태산은 누가 봐도 탐나는 녀석임은 분명했다.

문제는 뭇 여성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다는 것.

아무리 엘자그룹 회장이어도 사적인 남녀 관계에는 개입할 수 없었다.

엘자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장태산이다.

마음만 먹으면 엘자그룹 정도는 몇 달 만에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해외 투자 자본이 엘자 주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장태산 라인이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태산이 만날 거냐?”

“네. 어제 말하기를 미국에서 좋은 인연을 만났대요. 중국과 관련된 일은 뭐든 부탁만 하라고 하던데요?”

“그래? 누구를 만났기에…….”

고자룡도 연줄을 대기가 어려운 중국의 꽌시.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는 관계였다.

그렇다고 급하게 단기간에 맺을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엘자그룹 정도의 사업체라면 최소 각 성의 서기나 25인의 정치위원 정도는 줄이 닿아야 했다.

“쉽게 말을 꺼낼 남자가 아니잖아요. 뭔가 있겠죠.”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듯 확신에 찬 말을 내뱉는 고연지.

만남을 약속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허름한 국밥집에서 순댓국에 소주 한잔만 나눠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태산.

고연지의 눈이 기대감으로 촉촉하게 빛났다.

***

자, 장립!!!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측근들과 회의를 하는 중에 낯선 기운을 감지했다.

산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줄 있는 신도 아니었다.

뭐랄까, 귀신과 신들 사이에 있는 어정쩡한 기운 정도?

할 얘기가 많았지만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했다.

여차하면 리처드 강 저승사자를 소환해 처리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장립’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장립은 죽었다.

화교 출신으로 미국에서 갱들의 총에 맞아 죽은 뒤 사막에 묻혔다.

그 정보가 장립에 관련한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런데 그 장립이 나타났다.

- 놀라시는 것 같군요. 님이라면 절 이해해 주실 줄 알았는데.

장립의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음성 변조를 해서 쓰던 나의 목소리가 장립의 목소리와 같았다.

“여기는 어떻게…….”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온갖 신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워낙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는 나의 회귀 인생이지만 이 상황은 전혀 예상 밖이다.

- 장립으로 활동하는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

헐이다.

나만 못 느꼈던 거다.

죽는 순간 바로 신이 될 나조차도 감지 못했던 죽은 장립의 영혼.

- 세상 사람들 모두 절 잊었어요. 가족이었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학창 시절 그렇게 친한 친구도 없었어요. 잊혀진 영혼이 되어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을 때 님이 절 불렀어요. 그래서 이렇게 그림자가 생겼어요.

무슨 공포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장립의 말이 이해되었다.

생전 알고 지내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 사라지는 순간 한 사람의 영혼은 모든 기억을 떠안고 어둠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을 잊는 것이지만 그 영혼은 남은 자들과의 모든 기억을 안고 백만 년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장립도 그 기로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더 이상은 기억해 주지 않는 영혼, 쓸쓸하게 그림자가 지워져 가고 있었다.

“뜻밖이군요.”

아직 그의 모습을 똑바로 대면하지 못했다.

장립의 기운만이 느껴졌다.

- 전 좋아요. 정말 베이다이허에서는 멋졌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다소 흥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말처럼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죽은 장립의 탈을 쓰고 지냈던 시간 동안 진짜 장립이 나와 함께했다.

- 방금 회의 때 그들의 눈빛을 봤어요. 당신을 향해 보이는 신뢰가 대단하더군요. 심리적 안정감도 느껴졌고 비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어요. 그리고 책임의식도 투철해 보였어요. 동기부여가 확실한 팀원들 같아요.

장립은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전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이른 나이에 꽃은 피워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장립.

그도 한때는 잘나가는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의 촉망 받는 인재였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당신은 살아 있었을 때의 나와 달라요. 정말…… 난 어리석었어요. 부모님이 떠나고 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인종차별을 당하며 긴 시간 아픈 시절을 보냈죠. 그러다 보니 성격이 비뚤어졌어요. ……그 흔한 연애도 제대로 한번 못 해보고…….

장립이 생존 당시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았다.

“안타깝군요.”

처음엔 낯설었지만 천천히 괴리감이 걷혔다.

내 귀에 들리는 장립의 목소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성격만 좀 달랐다.

일상이 되어 버린 인종차별로 인해 성격이 기이하게 변한 듯했다.

- 괜찮아요. 전 지금 행복해요.

행복?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장립은 이미 죽은 자다.

게다가 신도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장립을 마주해야 할 타이밍.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눈앞에 진짜 장립이 서 있었다.

베이다이허에서 내가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씨익 웃는 장립.

여러 공산당 고위 공무원들 앞에서 보였던 나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가 머금고 있다.

죽은 자라는 것을 몰랐다면 그는 살아 있는 장립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 비슷해요? 최대한 같아지려고 연습한 건데.

내가 했던 자세를 흉내 내던 장립은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

대신 나는 심각했다.

포인트가 들어오거나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통 이런 식이면 알림음이…….

- 본인이 쌓은 포인트는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 장립은 당신입니다.

- 당신이 곧 장립입니다.

기초 수학 공식도 아니고 너무나 간단하게 풀어 해석해 주는 알림음.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다.

결론은 그거다.

장립의 이름으로 벌어들인 포인트는 장립에게 누적된다.

뒤통수를 탁! 제대로 얻어맞았다.

그러고 보니 장태산 이름으로 적립된다는 알림음은 없었다.

그 포인트 덕에 지워져 가던 그림자 장립이 선명한 그림자를 가지고 부활했다.

- 그렇게 놀라실 필요가 없어요. 전 당신을 해치거나 당신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전 그냥 이게 좋아요.

장립이 웃는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냥 이 순간을 느끼고 만끽하며 즐기고 있었다.

“원하는 게 없습니까?”

- 있어요!

“……뭡니까?”

장립이 이렇게 다시 선명한 그림자로 다시 세상에 존재를 알려야 했던 이유.

- 장립으로 살고 싶어요.

“……그게 무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부득이하게 잠깐 내가 장립으로 살기는 했지만 기본 생의 바탕은 나 장태산이었다.

- 지켜보고만 있을 게요. 당신이 내가 되어 중국 위정자들과 대화할 때 정말 행복했어요. 그리고 여자들 앞에서 보인 강한 남자의 모습도……. 마음에 들어요. 전 그러지 못했거든요.

아! 죽어서도 모태솔로인 장립이여!

그의 한이 어떤 건지 오롯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어차피 장립이라는 가면은 나에게 필요한 캐릭터였다.

나를 통해 포인트 벌어 신이 되는 것도 추천이다.

우연히 내가 탈을 빌려 쓴 사후의 영혼이 좋은 결실을 얻는다면 그 또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네?”

끝난 듯 다시 이어지는 요구.

- 날 묻은 그자들에게 복수해 주세요!

회귀의 전설 2부

이름의 대가(3).

“이거 신선한 거 맞아?”

“한번 먹어봐. 라일락 펍 마담 루시의 싸구려 사랑처럼 순도 100%야.”

“크크. 그럼 믿어도 되겠군.”

어둠이 내려앉은 LA 다운타운의 한 골목.

히스패닉 계열 청년 둘이 히히덕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낮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 순찰을 돌던 경찰차도 사라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밤거리.

한낮에도 빈번하게 총기를 든 강도가 나타나는 곳이 여기였다.

갱들과 안면이 전혀 없는 자들이 저녁에 이 거리를 걷은 것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과 같았다.

길목 이곳저곳에 약물 중독자들이 약에 취한 채 쓰러져 있다.

그들이 토해 놓은 오물이 하수구 냄새와 뒤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갱들과 몸을 상품삼아 살아가는 여인들.

술과 약에 취한 사람들이 어두운 거리를 희미하게 밝힌 네온사인 아래를 점령했다.

오늘따라 날이 꽤 덥다.

이런 날 길을 걷다 어깨를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당장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다.

몸이 드러나 보이는 부분마다 문신을 한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히스패닉 갱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각자 무리를 지어 서로를 노려봤다.

그들 중 누가 돌이라도 하나 던지는 순간 이곳은 순식간에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돌변한다.

마피아가 되지 못하는 길거리 양아치패들인 갱스터들은 무서운 게 없었다.

사회적 구조에서 빈민층에 속했고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받는 일이 일상인 이들이었다.

영주권이 없는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이민자들과 그들이 낳은 자손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규 교육 과정 같은 건 꿈꾸지도 못했다.

덩달아 문맹률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다른 누군가보다 잔혹하고 총을 더 잘 쏠 줄만 알면 됐다.

피와 죽음 따위는 전혀 두려워할 만한 게 되지 않았다.

재수 없게 총에 맞거나 경찰에 붙잡혀 교도소에 갇히면 그곳에서 놀다오면 그만.

미래가 없는 만큼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돈이 걸린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갈취, 강도, 절도, 강간, 살인 청부.

이들에게 수시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갱스터가 됐다.

부서진 농구대에서 시간을 때우고 여기저기 벽을 찾아다니며 그라피티를 그리며 근본으로 해소되지 않는 분노를 삭였다.

그렇게 흘러 다니다 동네 형들을 쫓아 자연스럽게 갱이 됐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 술과 마약에 취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통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이들의 인생.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맞닥뜨리게 되는 이런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목격해 온 죽음이라 크게 낯설지 않았다.

LA의 그런 평범한 8월의 끝자락인 한 밤.

저벅저벅.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왔다.

주위의 시선을 확 끌었다.

히스패닉과 흑인들이 주로 점령하고 있는 빈민가.

흔치 않은 동양인의 등장이었다.

키가 제법 컸다.

말쑥하고 깨끗한 청바지에 푸른색 셔츠 차림이다.

나이는 20대 중반.

질질 바닥을 쓰는 힙합 바지를 걸쳐 입은 동네 청년들과 확실히 구별 됐다.

“휘이~ 저 새끼 뭐야?”

“관광지로 착각한 거 아냐?”

“돈 냄새 물씬 풍기는데…….”

“5분에 10달러.”

“난 3분에 걸겠어.”

거리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갱들이 내기를 걸었다.

주차된 차를 터는 데도 5분이면 바퀴와 멀쩡한 부품을 몇 개나 뜯어냈다.

그런 거리를 겁 없이 걷고 있는 이질적인 인상의 동양인 남자.

딱 봐도 럭셔리해 보이는 선글라스도 착용했다.

그의 몸에서는 산뜻한 돈 냄새가 풀풀 풍겼다.

파바밧.

굶주리다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골목 곳곳에서 유유히 걸으며 다가오는 동양 청년을 유심히 지켜봤다.

겁을 상실한 듯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걷는 동양 청년.

“헤이.”

거리가 가까워지자 한 흑인이 말을 걸었다.

나이는 꽤 어려 보였지만 이미 팔에는 흉터와 문신 자국으로 어지러웠다.

싱싱한 먹잇감을 발견한 들개처럼 군침을 흘렸다.

약빨이 다 떨어진 시간.

그만큼 돈이 절실하게 필요해 대상을 물색 중이었다.

풀려 있는 혼탁한 눈동자로 동양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왜.”

“돈 좀 있어?”

“응.”

“흐흐흐. 그럼 내놔.”

그저 그런 3류 갱 소속인 잭슨이 입가 근육이 풀린 웃음을 흘렸다.

첫 대상부터 물렁물렁한 놈을 만났다.

이 시간에 이렇게 운 좋은 행운이 생길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제한된 일정 구역만 벗어나지 않으면 경찰들도 터치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신이 멀쩡하게 제대로 박힌 이들은 다운타운에 들어올 생각도 안 했다.

“나 알아?”

“내가 널 어떻게 알아. 원숭이 새끼야!”

잭슨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른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피가 간질간질 혈관을 간지럽혔다.

총을 맡기고 마약을 얻었다.

남아 있는 무기라고는 녹슨 잭나이프 하나.

원숭이 한 마리를 잡는 데 나이프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았다.

동양인 치고 키가 좀 크고 체구가 단단해 보이긴 했지만 이곳은 LA 다운타운.

생존 기술로 무장된 갱들에게 일반인은 덩치와 상관없이 걷어차기 좋은 애완견에 불과했다.

“능력 있으면 가져가 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내깔리는 동양 청년.

스윽.

바로 빳빳한 100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보였다.

“휘이~.”

“동양인들은 뭘 몰라. 미친 새끼. 크크크.”

“잭슨 어젯밤 돌아가신 엄마가 꿈에라도 나타났어?”

함께 어울려 있던 갱 친구들이 다가오며 휘파람을 불었다.

지금까지 이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대놓고 미친놈은 처음 본다.

자기가 히어로물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행동하는 동양 청년.

“벌레 같은 새끼. 크크크.”

촤랏.

오랫동안 사용해 손에 익숙한 잭나이프를 바로 꺼내든 잭슨.

이 나이프 하나로 숨통 몇 개 끊고 가죽에 구멍 수십 개를 뚫었다.

요즘 들어 약 기운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현역이다.

스윽.

나이프로 왼팔 피부를 긁었다.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누군가를 해하기 직전 습관처럼 나타나는 버릇이다.

잭슨은 이 동네를 무척 사랑했다.

다들 짐승들이 사는 구역이라며 침을 뱉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 자란 잭슨에게 이곳은 고향이었다.

약에 취해 1년 365일을 몽롱하게 정신을 풀고 살아도 누가 탓하지 않는 파라다이스.

그런 잭슨의 파라다이스를 겁 없이 걷는 동양인.

얻을 게 있다면 피를 보더라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찌르게?”

“닥쳐! 원숭이야!”

쇄애앳.

잭슨이 거침없이 나이프를 뻗으며 복부를 찔러갔다.

가장 확실한 한 방.

뱃가죽에 구멍이 나면 보통 사람은 맥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가죽이 두꺼운 놈들은 간혹 얼마 간 버티기도 했지만 동양인들은 피부와 근육이 좀 더 야들야들했다.

‘저 돈이면…….’

청년의 손에 들려 있는 달러에 잭슨은 이미 눈이 돌아간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질 좋은 마약을 구매하고 여자를 품고도 남는 돈.

벌컥벌컥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막 돌았다.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쾌락의 정점.

잭슨은 나이프를 찌르는 중에도 환상을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턱!

손이 막혔다.

“???”

정신을 차리며 눈앞을 주시한 잭슨.

동양인 놈이 손을 잡아챘다.

강철에 묶인 듯 꼼짝도 않는 오른손.

“크으!”

이를 악물고 힘을 썼다.

그러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정당방위 인정?”

제법 잘생긴 동양 놈이 웃는다.

그리고.

뻐어억.

잭슨은 눈앞에서 번개를 봤다.

이마에 정통으로 가격된 그 무엇.

콰다다당.

잭슨의 거대한 몸집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

순식간에 주변은 침묵에 잠겼다.

겁도 없이 차이나타운도 아닌 다운타운에 홀로 나타난 동양인.

몇 명의 갱들이 보는 앞에서 3류 갱 하나를 바닥에 쓰러뜨려 눕혔다.

촤라랏.

그리고 들고 있던 지폐를 잭슨의 몸뚱이에 던졌다.

“여기 라이언 아는 놈 있나? 어깨에 사자 문신한 패드로 라이언!!!”

화가 잔뜩 난 숫사자처럼 포요하는 동양남자의 목소리.

철컹.

한쪽에서 농구를 하고 있던 잔챙이 아이들이 공을 버리고 사라졌다.

호객 행위를 하던 여성들도 동양인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모습을 감췄다.

짬이 안 되는 갱들은 골목으로 고개를 숨겼다.

“너…… 뭐야.”

그리고 진짜 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하아! 미친놈!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에 할 말을 잃었다.

미국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절대로 벌이지 않았을 사건이 터졌다.

살벌한 다운타운에 멀쩡하게 걸어 들어와 돈 냄새를 풍겼다.

하이에나들이 몰려들며 시비를 거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

- 으흐! 완전 멋져요!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를 관람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장립.

자신의 탈을 쓴 몸으로 벌이는 사건을 즐겼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장립의 과거 사고는 단편적이었다.

온시은이 채집해 전달해 준 정보도 완벽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슈퍼컴퓨터도 믿을 게 못 됐다.

손에 들어온 정보는 갱들의 차에 치어 죽었고, 이후 LA 인근 사막에 묻혔다는 게 전부였다.

살아생전 순진무구하게 살았던 인물이라고 생각한 건 큰 착각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동양인 차별을 심하게 받았던 장립.

멀쩡한 몸뚱이와 얼굴을 하고도 거친 세상을 살아내지 못했다.

문제는 성격이 소심했다.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고자 불량 마법사.

세상에 꿈이…… 갱이었다니.

학교 폭력에 대한 복수심이 갱이 되는 것으로 미화된 것이었다.

갱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에게 복수하는 걸 장립은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대학교 재학 중에도 인종차별은 그대로 이어졌다.

소심한 장립은 예일대학교에서 호구로 통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와칭’이라는 차이나타운이 중심이 된 중국계 폭력 조직에 투항했다.

공부도 잘하고 머리가 좋은 자신을 기꺼이 받아줄 거란 생각에서였다.

갱 미화 영화에서 조직 두목의 대학생 친구가 자신일 거라 여긴 것이다.

처음에는 학벌에 놀라기도 했던 중국갱들.

이력서를 들고 멀쩡히 찾아와 갱이 되겠다고 말하는 장립을 미친 놈 취급했다.

하지만 진심을 알고 얼마 후 두목은 장립을 갱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이것저것 일을 시키기 시작한 두목.

똑똑한 장립은 꽤 쓸 만했다.

다른 갱들과 다른 고등 교육 수료자인 장립은 와칭에서 소문이 자자해졌다.

여러 행정 처리에 쓸모가 많았다.

갱들도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관리가 필요한 집단이 됐다.

구역과 자본 관리자가 꼭 필요했다.

그곳에서 장립은 없어서는 안 될 인재로 대우 받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하이에나와 거친 들짐승들이 가득한 우리에서 장립은 지옥과 맞닥뜨렸다.

자신이 알던 영화 속 갱들과는 전혀 달랐다.

수시로 사람을 죽이고 약한 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몇 대 때리고 돈이나 갈취하던 학교 폭력은 비교조차 되지 못했다.

여자들은 암컷 짐승처럼 취급됐다.

그런 곳에서 장립은 사랑에 빠졌다.

두목의 첩이었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돼 버린 것이다.

그게 장립에게 닥친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영화에서나 벌어질 만한 일들을 장립이 벌였다.

두목의 여자와 함께 도망을 시도했다.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와칭 조직원들이 없는 다운타운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도주는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바로 소문이 돌았고 와칭 두목과 친하던 다운타운 갱 두목이 장립을 알아봤다.

곧장 사막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깊게 파인 구덩이에 산 채로 묻혔다.

사랑 때문에 실행한 도피의 결말은 잔혹 동화처럼 끝났다.

그 결과 현재 장립은 귀신이 됐다.

자신과 도주했던 두목의 여자는 지금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살고 있다.

그 모습에 더 충격을 받았다.

나름 원한이라는 것을 품은 것이다.

장립은 아직 무지도 죄가 된다는 걸 몰랐다.

누구도 귀신이 된 장립을 구원해 주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떠돌며 안개처럼 사라져 가던 장립.

젠장! 나로 인해 부활했다.

그리고 오늘 같은 사건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자신을 죽였던 다운타운의 갱 두목이 바로 패드로 라이언이다.

꼭! 영화 속 히어로처럼 복수해 달라고 단서를 붙였다.

그것도 자신의 모습을 하고.

미친 짓 같지만 그 소원을 들어줬다.

이름을 빌려 쓴 대가가 작지 않았다.

“흐흐흐. 미친 놈.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가 감히 귀한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거야?”

깡다구가 있어 보이는 히스패닉 남자가 살기어린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귀한 건 모르겠고. 그 자식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 나 바쁜 몸이거든.”

빨리 해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립은…… 생각보다 수다쟁이였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날 괴롭힐 것 같았다.

사박사박.

내 주변으로 어느새 몰려든 10여 명의 히스패닉 갱들.

“미친놈이 갈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지.”

나에게 말을 걸었던 갱이 히쭉 웃었다.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장립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못할 LA 다운타운에서의 추억 만들기.

오늘 제대로 히어로물 영화 한 편 찍겠구나 하는 불길함 예감이 들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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