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6장. 이름의 대가. (869/1,284)

876장. 이름의 대가.

“……놈은?”

“미국에서 사라졌습니다.”

“크으.”

이악산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 버렸다.

그런데도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었다.

불에 탄 시신을 부검했을 때 알코올 성분이 다량 검출됐다.

혈중 농도가 변명도 허락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광은 음주운전을 자주 했다.

전문 국가 기관이 투입됐지만 타살점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문제는.

‘장립! 장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악산은 장립이 이광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이광이 장립을 친 정황까지는 파악됐다.

본인 휘하에 있던 쓸 만한 부하들과 함께 움직였으나 모두 사라졌다.

그 수가 무려 다섯씩이나 됐다.

폐 공장에서 그들의 흔적이 분명 확인됐지만 그 밖의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포클레인을 동원해 주변을 샅샅이 파헤치고 10미터 땅 속까지 파내려갔지만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다.

단시간에 그만큼 땅을 파내려 사람을 묻는 일도 어불성설이다.

대규모 조력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불가능했다.

베이다이허 곳곳은 공안이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악산 특유의 직감이 장립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답답한 일이었다.

문제는 끝까지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쓸개즙이 솟구쳐 역류하는 듯 쓴맛이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내는 몸져누워 버렸다.

친척들의 탄식도 이어졌다.

이악산의 뒤를 이어 미래 고위 공산당원이 될 재목이었던 이광.

그의 부재로 인해 여러 가지 타격이 예상됐다.

당장 이악산도 삶의 의욕을 잃은 상황.

모든 게 부질없고 의미를 둘 만한 일이 없었다.

오로지 복수심만이 끊임없이 끓어올랐다.

장립이 진짜 범인이 아니다 해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이광이 그렇게 떠나게 된 이유가 모두 장립에게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홍콩에는 언제 오나?”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기다린다……. 놈이 올 때까지. 그리고 조용히 체포하는 거야……. 내가 직접 한 땀 한 땀 가죽을 벗겨 낼 것이야!”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인 정신 상태였지만 이악산은 조급하게 처신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국 밖에까지 개인적인 원한으로 손을 뻗으면 국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시진핑이나 장택민, 원자바오가 그냥 있지 않을 게 빤했다.

아들 이광의 사고사 소식을 들은 직후 바로 장립을 치고자 했다.

하지만 위에서 바로 제지 명령이 내려졌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천하의 이악산도 주석의 명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입장.

그러나 한번 끓기 시작한 원한의 불씨는 꺼질 줄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립에 대한 분노는 거세졌다.

어차피 아들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 버린 자신의 인생.

‘장립……. 반드시 널 죽이고…… 나도 죽겠다!’

이악산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빛났다.

“고마워. 자네 덕분에 제대로 점수를 땄어.”

“그래요? 그럼 선물 주셔야죠~.”

“그럴까? 흐흐흐.”

천해방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베이다이허에서 재대로 뇌물을 뿌렸다.

구하기 어렵다는 장립의 단약을 손에 쥐었다.

시 주석도 어렵게 얻었다는 단약인데 그것을 다섯 개나 구했다.

모두 주혜의 작품이었다.

매혹적인데다 영리하기까지 했다.

여배우가 꿈이었던 주혜를 스무 살 때 잡았다.

그녀의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게 천해방에게는 기회였다.

주혜에게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넘쳤다.

주혜 덕분에 천해방은 승승장구했다.

동료들보다 빨리 25인 정치국 위원이 된 것만 봐도 설명이 더 필요 없었다.

주혜가 어떤 짓을 해도 믿고 눈감았다.

이번 단약 일도 마찬가지.

장립과 무슨 약속을 하고 단약을 구해 왔는지 천해방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주혜는 조강지처가 아니었다.

후계자가 있는 마당에 첩의 사생활까지 터치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또 주혜보다 어리고 매력적인 여인들은 주변에 충분히 많았다.

이제는 여인으로서가 아닌 정치적 동지와도 같은 관계에 더 가까웠다.

주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천해방을 충분히 이용했다.

“당신을 위해…… 단약을 남겨 놨어요.”

주혜가 천해방의 품에 안겨 뜨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당연하죠. 당신도 이제 몸 관리 해야죠.”

‘여우같은 것.’

천해방은 이런 주혜가 늘 마음에 들었다.

다 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뒤에는 꼭 한 수를 남겨 놨다.

훤히 보이는 주혜의 수도 그리 싫지 않았다.

“더 있는 건 아니고?”

“저 못 믿어요?”

주혜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흐흐. 아니야.”

믿지 않았지만 또 믿었다.

어차피 장립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천해방이다.

주혜의 꽌시.

“장립을 만나면 더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그런데…… 공짜 아닌 거 아시죠?”

주혜가 은근히 말끝을 흐렸다.

“말만 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모두 할 테니까.”

25인의 정치국 위원이 되었지만 상무위원 정도의 끗발을 날리지는 못했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지만 확실한 확답을 받지 못한 입장.

아직도 몇 번은 더 위기를 돌파해야 영광의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런 후에 최종적으로 주석이나 총리에 지명받는다면…….

“그 말 믿을게요.”

“이리와. 내가 확인시켜 줄 테니까.”

“아잉~ 단약부터 드시고요.”

허리를 감아오는 천해방을 향해 콧소리를 흘리는 주혜.

마냥 행복한 듯 웃고 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천해방보다 더 멋지고 쓸 만한 애인들이 몇이나 더 있었다.

그리고.

‘뭐야? 그 녀석이 왜 생각나는 거야?’

거친 수컷 냄새를 풍기면서 동시에 품격 있는 신사처럼 행동하던 장립.

“하아.”

주혜는 자신도 천해방을 끌어안으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응? 왜?

갑자기 들려온 카르마 포인트 획득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나를 초롱초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장단과 중역들.

핵심들만 소집한 회의.

딱히 그룹 형태를 갖추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회장 직분이 됐다.

베이다이허를 다녀온 이후 또 많은 게 달라졌다.

치열한 정치인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공산당 고위급 무리를 만나고 와서인지 전과 달리 또 개안이 됐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

지금 회의장도 조용하면서 묵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변한 내 기세를 못 느꼈을 리 없다.

정치판이나 경제 흐름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욕망의 전차를 타고 생존하기 위해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현재 여기 모인 이들의 왕.

나 한 사람을 중심으로 저들의 미래와 또 휘하에 직원들의 미래가 펼쳐졌다.

알 수 없는 운명이 날 이끌었고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다들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탁자 위에 커피와 차가 함께 놓였다.

유세라 상무는 아직도 직접 차를 준비했다.

그녀의 정성이 담겨 있는 커피는 유난히 맛이 좋았다.

누군가를 향한 정(情)은 똑같은 물질이라 해도 성질을 변화시킨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처럼.

“회장님……. 제 눈 움푹 들어가지 않았나요?”

“전혀요.”

“일거리를 그렇게 많이 던져주고 휴가라니요. 갑자기 미워지려고 합니다.”

분위기 메이커 도도희가 가볍게 툴툴거렸다.

“회장님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하관우 회장은 너스레를 떨며 빙그레 웃었다.

TS그룹은 그가 맡은 후부터 흑자로 전환됐다.

안아그룹이 내수 기반이 되면서 여러 가지 악재를 제거하자 자연스럽게 순항했다.

직원들 복지도 최상이었고 더 이상 노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관우 회장을 위해 자가용 비행기와 최고급 호텔을 내줬다.

휴가를 잘 보냈는지 얼굴이 건강하게 그을렸다.

물론 보너스로 단약을 진작 선물했다.

열심히 일한 이들은 충분히 쉬어야 함이 마땅했다.

“저도 잘 쉬었습니다.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천일건설 황효관 대표도 한마디 거들었다.

건설 사업 파트도 수주가 쑥쑥 올라갔다.

공공기관 발주가 아니더라도 천일은 기본 시공능력이 뛰어난 사업체였다.

러시아 공장도 천일건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유수한 건설 엔지니어들이 대거 합류했다.

“전 직원과 함께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자동차 업계 특성상 패키지 휴가를 다녀왔다는 삼룡의 현동영 대표.

말처럼 푹 쉬었는지 얼굴에서 피로감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 휴가는 겨울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웅조선의 제문환 대표는 여전히 열정이 넘쳤다.

완벽하게 인수가 끝난 대웅조선.

산재해 있던 여러 가지 문제가 하나둘씩 해결됐다.

여기 모인 기업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기업을 이끌고 있었다.

산업 파급 효과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 조선업이 호황기를 누리고 있지만 막상 내실이 부실했다.

앞으로는 양보다 질로 승부를 봐야 하는 조선업의 미래.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한국 해운 산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웅이 힘을 보태야만 했다.

“대웅조선은 이제 준 국영기업이 아닙니다. 노사 모두에게 이 점을 강조해 주십시오. 이익이 나는 곳에 보너스를 지불하겠습니다. 결코 나와 여러분만 잘사는 세상을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넵! 회장님!”

모두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의 눈이 다 탁해지지는 않았다.

이들처럼 아름다운 목표를 세우고 살아간다면 항상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법이다.

“이번 미국 출장길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

“여자는 아니죠?”

도도희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다.

“해외 화교입니다.”

“화교요?”

“홍콩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다들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갑자기 전하게 된 홍콩에서의 일 얘기.

우선 소문이 좀 나야 했다.

여기저기에 정보 빨대를 꽂고 있는 리장창과 중국 정보원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다.

오늘부터 살살 소문을 낼 필요가 있었다.

나와 장립에 대한 스토리는 확장될수록 좋았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지 않지만 놀랍게도 중국의 실세들과 무척 친하다고 하더군요.”

“실세요?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하관우 회장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장택민. 원자바오. 시진핑.”

무심히 언급되는 세 사람의 이름.

“네에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인맥이군요.”

줄줄 나오는 이름들에 다들 경악했다.

아직 한국 기업가들에게 중국 권력자들은 낯선 존재들이었다.

특히 공산당 권력자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만큼 각국 대통령들도 자주 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투자라 하심은…….”

“일대일로.”

“헛!”

“이, 일대일로!”

다들 프로 경영자이다.

세상 돌아가는 뉴스에 그만큼 민감했다.

많은 뉴스거리 중에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사업이 바로 일대일로였다.

“만나봐야 알겠지만 장립은…….”

담담하게 장립과의 썰을 만들어 냈다.

최측근들이지만 오직 하늘만 알아야 할 비밀이 있는 법.

장립과 나는 동 시간에 물리적으로 같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세상에서는 그와 내가 살아서 움직였다.

“……구체적인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짧고 굵직하게 한 방을 남기고 회의를 끝냈다.

“회장님의 격려 감사합니다!”

“모두들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손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산업과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서로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물려 돌아갔다.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태백산 할아버지와 지리산 산왕모의 소중한 자식들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날을 잡아 제대로 회식 시간을 갖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두가 썰물처럼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어제 만나고 헤어지듯 다시 웃으며 악수도 나누었다.

스르륵.

금세 혼자만 남겨진 채 문이 닫혔다.

그리고.

“나오시죠.”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리고.

-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장립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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