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장. 갈 때 가더라도.
‘대기 번호표?’
주혜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장립을 빤히 쳐다봤다.
장립이 마음에 들었다.
보는 순간부터 끌렸던 시원한 마스크와 절제된 행동.
꼬리가 몇 개씩이나 달린 고위 관료들의 첩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기본적으로 기가 약한 남자는 이 틈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장립의 태도는 태연했다.
여러 여인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고도 의연했다.
이곳에 모인 여우들의 수장이라 할 만한 주혜를 상대로 대기 번호표를 운운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컷을 만난 듯했다.
‘시 주석과 장 주석, 원자바오급은 되어야 한다 이거지?’
장립의 태도에서 그의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 모인 여인들 정도로는 부족했다.
자신의 제안을 에둘러 거절하는 장립.
흥정이 필요했다.
“우리 서로 도울 게 많은 것 같은데. 아닌가?”
주혜는 장립이 이 자리에 온 목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눈치로 보아 홍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홍린은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만남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장립은 주혜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미리 미스트를 챙겨왔을 만큼 자신의 목적에 대해 준비가 철저했다.
효과는 보나마나 확실할 것이다.
장립의 단약은 이미 베이다이허에서 전설이 됐다.
효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오늘 아침 이미 파다하게 돌았다.
직접 사용해 본 경험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뒤를 이었다.
“난 자기 도와주고 싶은데.”
주혜가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대놓고 특혜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
다른 여우들이 놀라고 당황했다.
천해방은 시진핑의 보이지 않는 후계자다.
차기 황제를 모시게 될 주혜의 지금 발언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바로 상황 판단을 해낸 장립.
“모두 잠시 물러가 있을래?”
“네? 네…….”
스윽.
여자들이 주혜의 한마디에 썰물처럼 물러났다.
“…….”
잠시 찾아온 침묵.
주혜는 좀 전과 달리 장립을 뜨겁게 바라봤다.
그리고.
“일단 단약 10개.”
생긴 것처럼 파격적으로 나갔다.
천해방을 확실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단약 10개 정도는 필히 필요했다.
지금 한참 단약의 주가가 뛰어오르고 있었다.
현재 베이다이허에서는 장립의 단약 자체가 바로 명예의 상징과 같았다.
“흠.”
짧은 신음과 함께 얼굴에 미소를 띠는 장립.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대가는…….”
주혜는 미소 짓는 장립을 보고 안심하며 가볍게 싱긋 웃었다.
“당신이 꿈꾸는 모든 것.”
그리고 그가 거부할 수 없는 확실한 카드를 던졌다.
***
“이것으로 원만하게 처리된 걸로 알겠습니다. 두 분 선배 대인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주석 시진핑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베이다이허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2주간 치열하게 맞붙었던 수 싸움.
명분과 협박, 읍소와 뇌물로 전철된 베이다이허 회의.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부터 각자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간다.
약속은 거의 모든 면에서 위반되지 않고 지켜졌다.
만약 누군가 기본 틀을 무너뜨린다면 그 뒤에는 당연히 전쟁을 치르는 일밖에 없었다.
시진핑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장택민과 원자바오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진핑을 물어뜯어 중상을 입힐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는 시 주석께 찬사를 보내오.”
적당한 선에서 상해방 식구들을 배려한 시진핑의 태도에 만족한 장택민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주석님.”
시진핑도 웃으며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상해방을 배려하긴 했지만 태자당이 훨씬 남는 장사다.
“올 한해도 마무리 잘해보도록 하죠. 시 주석 어깨가 무겁겠어요.”
원자바오도 불만은 없었다.
공청단 몫은 조금씩 늘어났다.
여차하면 상해방과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태자당에서 보이지 않게 배려했다.
넓은 땅과 엄청난 돈이 흘러 다니는 중국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먹을 수 있는 파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적절하게 권력이 분배되면 서로 싸울 일이 없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 잔을 들도록 하지.”
장택민이 호기를 부렸다.
과거 시진핑과 원자바오 두 사람이 장택민 아래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이렇게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장택민이었다.
“그전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진핑이 장택민의 말을 끊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나요?”
원자바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랫사람들이 최종 승낙한 배분표를 거둬 가져갔다.
더 이상 나올 만한 주제가 딱히 없었다.
“장립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진핑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음…….”
장립이라는 말에 장택민과 원자바오도 입을 다물었다.
베이다이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존재감조차 거의 없던 장립이 이제는 가장 큰 무게감으로 작용했다.
장립만 소유하고 있다는 단약을 떠나 한 개인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이 높이 평가됐다.
모두가 욕심을 낼만 한 인재인 셈이다.
맹수들이 득실대는 중국 정치판에서 단시간에 이목을 끌어낼 수 있는 인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베이다이허 곳곳에서 장립에 대한 사실에 기인한 소문과 전혀 상관없는 억측들이 뿌려졌다.
절반은 사실과 달랐다.
시진핑과 장택민, 원자바오 세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교차로 파악했다.
장립은 중국 정보부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인물이다.
그렇다고 상관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멀리 할 수도 없는 노릇.
이미 베이다이허 권력 중심에 깊숙이 연관 됐다.
생각지 못한 독특한 방식이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인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장립은 양날의 칼 같은 존재입니다. 매력이 넘치지만 위험한 자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시진핑의 정확하고 객관적인 장립에 대한 평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세 세력 중 특정 세력에 속하지 않고도 살아남았다.
“여러 의견들이 올라왔습니다. 제거하자는 의견도 있고 함께 가야 한다는 지지도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에서 시진핑의 고뇌가 묻어났다.
냉정하게 장립에 대해 평가하고 있었다.
“시 주석의 의견은 어떠하오?”
먼저 장택민이 조심스럽게 의중을 물었다.
그는 장립이 꼭 필요했다.
손에 들어온 단약을 진선에게 보냈다.
돌아온 말은 반드시 장립과 함께 하라는 명이었다.
‘시 주석이 만약 제거하려 한다면…….’
지금의 관계는 파괴되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진선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며칠 고심해서 내린 결론은 ‘지켜보자’입니다.”
시진핑이 선택한 결론.
“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장립은 양파 같아요. 까면 깔수록 뭔가 더 나올 것 같은 재미난 맛이 나요.”
원자바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년 눈치 생활로 살아남은 원자바오도 장립에 대해 쉽게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유가 차고 넘쳤다.
장립의 단약을 복용하고 얻게 된 회춘의 기적.
이게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몸에 크게 이롭지 않은 양약들과 많이 달랐다.
청년 시절처럼 원기가 넘치는 경험은 다시 원자바오를 욕망에 눈뜨게 만들었다.
시진핑의 말에 원자바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하. 당연히 그래야지요. 장립은 다들 알다시피 좋은 청년이라오.”
장택민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서 두 분께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탁?”
“그게 뭔가요?”
“장립을…… 소속 없이 그냥 두었으면 합니다.”
시진핑이 감추고 있던 속내를 드러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하면 타인도 소유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원자바오가 장택민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서 장립과 가장 가깝게 연줄이 닿아 있는 인물이 바로 장택민이었다.
“적극 동조하는 바이오.”
의외로 장택민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장 주석이 그러시다면 저도 그래야지요.”
원자바오도 빙그레 웃으며 넘어갔다.
“두 분 대인들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시진핑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계륵보다 더 가치가 많은 장립.
‘어차피 기회는 많아. 좀 더 이용하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장립에 대해 알게 된 날이 길지 않았다.
좀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은 시진핑.
“장 주석께서 후배들을 위해 금과옥조 같은 말씀을 내려주십시오.”
시진핑이 잔을 들었다.
진정한 베이다이허의 마지막 만찬.
“그럼 부족한 제가…….”
장택민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가 만족한 2014년 베이다이허 회의.
편안한 분위기 속에 술이 돌았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베이다이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욕망의 만찬.
앞으로 다가 올 미래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모두들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불태웠다.
차디 찬 시선 하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
제법 길었던 베이다이허의 시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주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찾아오는 여인들은 없었다.
첩들의 왕이 바로 주혜인 듯했다.
주석들도 선뜻 제안하지 못했던 단약 10개의 딜.
쿨하게 받아들였다.
본래 윗선보다 실무 라인에서 오가는 것들이 더 많은 법이다.
천해방은 중경 서기일 뿐만 아니라 중국 경제 정책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인물이다.
진심으로 그의 성공을 기원했다.
단약에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주혜 누님이 제안한 걸 모두 받아들이고 약속했다.
남자의 심리를 아주 잘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장립, 보기와 달리 그렇게 약한 남자 절대 아니다.
탈만 장립이지 그 안에 장태산이 산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을 맺었다.
그 자리에서 단약 10개를 넘겼다.
그리고 수중에 넣게 된 그녀의 비밀 직통 전화번호.
거래는 신속하고 완벽하게 끝났다.
“시간 참 빨라.”
베이다이허 끝물, 한가해진 틈을 이용해 장택민 주석과 원자바오, 시진핑을 만났다.
다른 때보다 더 조용히 나를 부른 세 사람.
그들의 속내를 빤히 알고 있기에 단약 하나씩을 챙겨다 건넸다.
단약 하나로 모든 게 무사통과.
감히 아랫사람들은 날 부르지도 못했다.
자칫 나를 건드렸다가 입만 뻥긋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눈치 하나는 다들 귀신이었다.
철썩…… 철썩.
일정을 정리하고 바닷가에 나왔다.
바닷가에서 바라본 별장들은 군데군데 불이 꺼져 있었다.
권력에서 퇴출당한 자들이 방을 뺐다는 의미였다.
냉정한 권력 민심.
내년쯤이면 이곳에 내 소유의 별장도 생길 것 같다.
양소려에게 넌지시 내 바람을 내비치자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베이다이허에서 휴가를 보내기에는 늦은 듯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벌써 차가웠다.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차박차박차박.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세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보아하니 남자들이다.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손에 들린 물건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총과 칼.
“장립.”
다가오는 자들 중 한 명이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짧게 대답했다.
“따라와.”
“왜.”
다시 들려온 말에 짧게 물었다.
“널 기다리는 분이 있다.”
그들이 누구의 사람들인지 바로 짐작이 갔다.
한동안 조용하던 쥐새끼가 이상하다 여기던 참이었다.
편안한 시간을 깨뜨리는 불청객.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무식할 정도로 엄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갈 때 가더라도…… 청소는 확실히 끝내야 내일 뒤탈이 없을 거다.’
이곳 베이다이허에서도 스승님의 가르침은 여지없이 통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