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장. 대기 번호표
“태양보신단이라……. 훗.”
시진핑은 단약을 쳐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제 손에 들어온 붉은색 단약은 처음 보는 놈이었다.
중국을 다스리는 황제이다 보니 최신 의료 혜택을 받고 몸에 좋은 것들은 수시로 복용했다.
장백산과 북한에서 채취한 수백 년 묵은 산삼도 한 달에 한 번씩 먹었다.
주치의들도 모두 다 최고 수준의 인력들.
아쉬울 것 없던 시진핑도 단약에는 마음이 동했다.
보이는 모습만으로도 자신의 현재 건강 상태를 파악해 낸 장립.
말로만 듣던 신의(神醫)였다.
진맥도 없이 평소 시진핑의 지병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가 건넨 단약도 진짜였다.
평소 좋은 약을 많이 먹어 본 자들은 냄새만으로도 약성의 진위 여부를 안다.
장립이 단약을 꺼냈을 때 바로 맡았던 맑고 시원한 향.
폐부가 단숨에 깨끗해졌다.
정신도 명료해졌다.
받아 든 자리에서 그대로 복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지금 순간까지 그 욕구를 꾹 참았다.
“독특한 놈이야.”
장립에 대한 인상을 다시 떠올렸다.
양광의 별장 식사 자리에서 수십 병의 술이 비워졌다.
장립이 속속 만들어 내놓은 요리는 입맛에 딱딱 맞았다.
안주가 떨어질 즈음 되면 바뀐 분위기에 맞게 다른 안주를 만들어 냈다.
모두 다 ‘하오’를 연창했다.
술자리는 내내 기분 좋게 흘러갔다.
단약으로 모두의 마음이 훈훈해진 것도 있었다.
골치 아픈 정치 문제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과거 부모 세대 때의 고생했던 시절 얘기들이 주를 이뤘다.
시진핑도 오랜만에 사는 얘기에 마음을 열었다.
장택민과 원자바오는 자신의 오늘이 있도록 만들어 준 은인이었다.
지금은 물과 기름 같은 권력 배분 문제로 인해 본의 아니게 적이 됐지만 확실히 도움은 받았다.
장립이 섞이지 못했던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
집주인 양광은 장소만 제공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모를 살펴 분위기를 끌고 간 건 장립이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꼭 필요한 타이밍에 대화에 참여했다.
마음 같아서는 작심하고 한번 키워보고 싶은 인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해외 화교인데다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좀 걸리긴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눈빛이 익었어.”
시진핑은 장립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상무위원인 왕정, 원자바오의 사위인 류평, 천지회 단주 리장창, 중앙군사위 부주석 조평 상장.
그들 모두가 장립 한 사람에게 밀렸다.
장택민과 원자바오, 그리고 시진핑 자신과 눈빛이 맞았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해 본 자만이 내비칠 수 있는 분위기.
젊은 친구임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대일로 사업 이권에 숟가락을 들이미는 자세가 훌륭했다.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타협 기술도 대단했다.
“장택민과도 크게 친분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천하의 장택민이 장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리장창이 말한 바와 같이 확인한 결과 장립은 중립자가 분명했다.
원자바오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가장 까다로운 정치적 성향을 가진 원자바오도 장립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 이유가 단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장립과 함께한다면 어떤 이득이 따를 거란 사실을 다들 확신했다.
몸담은 곳도 주 세력도 없는 장립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절묘한 줄타기로 자신의 안위를 지켜냈다.
과거의 시진핑 자신처럼.
“더 만나보면 알겠지……. 후훗.”
시진핑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리장창의 말을 듣고 곧바로 만남을 가진 장립은 기대 이상의 수확을 안겼다.
그리고.
“한 번 먹어볼까.”
산삼을 비롯해 해구신처럼 좋은 것들만 챙겨 먹고 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나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장택민이 장립의 단약을 신뢰하는 모습에 마음을 굳혔다.
단약 이름도 듣기 좋은 ‘태양보신단’.
스윽.
입에 단약을 넣는 시진핑.
아작.
가볍게 이로 물자 단약이 부드럽게 깨졌다.
그 순간.
“!!!”
시진핑은 화들짝 놀랐다.
말로 형연할 수 없는 향기로움이 입안에 퍼지더니 코로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스스륵 녹아버리는 단약.
꿀꺽.
입안에 고인 침에 녹은 단약은 자연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아…….”
탄성이 절로 터졌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든 단약의 기운이 바로 뜨거운 온몸에 전해졌다.
기이한 열기가 위장을 통해 사지백해로 쭉쭉 뻗어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른해지는 몸뚱이.
시진핑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체할 수 없는 강한 힘을 느낀 시진핑의 얼굴이 화끈 달라 올랐다.
‘가화만사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된 약효.
“장립……. 오래 두고 만나자꾸나!”
***
“고마워.”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립이 베이다이허에서 가장 핫한 유명 인사잖아. 귀한 시간 이렇게 내준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
홍린을 만났다.
말투가 불과 얼마 전과 달리 공손해졌다.
베이다이허에서 시간도 벌써 며칠 째가 됐다.
그사이 유명인사가 됐다.
시진핑과 장택민, 원자바오와 함께 술을 마신 해외 화교 장립!
다음 날부터 당장 이곳저곳에서의 초대가 이어졌다.
몸값이 오른 만큼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다.
이미지 소모가 적은 만큼 값이 오르는 법이다.
잘나가는 연예인들만 봐도 간간이 광고만 찍고도 먹고 산다.
지금 눈앞에 홍린도 나를 무척 조심스럽게 대했다.
홍콩에서 허물없이 던지던 말투가 아니다.
“누가…… 초대했습니까?”
“립도 좋아할 거야.”
홍린의 차를 타고 이동 중이다.
단약 하나 더 얻어먹은 양소려는 폐관에 들어갔다.
내기가 넘치는 상황에서 자칫 함부로 사용하다가는 단전과 혈도가 망가진다.
주화입마에 빠지기 전에 스스로를 다스렸다.
양광은 홍콩에 바쁜 일이 있다며 떠났다.
별장 주변으로 시시각각 여러 사람이 오갔다.
경호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윗선 지시가 있었던 듯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찾아온 홍린.
귀한 사람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기대가 됐다.
베이다이허의 낮을 책임지고 있다는 여인들의 모임에 초대됐다는 걸 직감했다.
“다 왔어.”
베이다이허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이 바다 뷰였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별장은 그 위용만으로 소유자의 권력을 대변했다.
수백 명이 넘는 권력자들 중 약 100여 명만이 그 호사를 누렸다.
지금 도착한 장소도 그중 한 곳.
스포츠카를 비롯해 슈퍼카들이 주차장에 즐비했다.
중국 고관대작 부인들이 주로 타는 차와 종류가 달랐다.
고가의 차가 분명하지만 왠지 싼티가 난다고나 할까?
“오늘 그분들 다 모였나 봅니다.”
“……알았어?”
“너무 티 나잖아요.”
주차장 차들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이해해줘. 저들에게는 저게 전부야.”
“이해가 왜 필요합니까. 인생 자체가 각자 사는 방식이 다른데.”
솔직히 나는 다른 인생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와 연관된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핵심이 누굽니까.”
“주혜. 모시는 권력자 이름은 천해방. 중경 서기이자 차기 주석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25인 정치국 위원이야.”
“!”
‘천해방’이라는 말에 살짝 놀랐다.
앞으로 몇 년 뒤에 상무위원이 되는 중국 내 실력자였다.
2020년까지 주석에는 못 오르지만 중국 권력 중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 천해방의 첩이 주관하는 자리였다.
가볍게 둘러보고 갈 자리가 아니었다.
나를 향한 또 다른 테스트임이 분명했다.
저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물 속에서 부지런히 발버둥치고 있는 백조나 다름없었다.
돈과 권력을 쥔 남자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 쓸 수밖에 없을 터.
딸깍.
차에서 내렸다.
“이쪽이야.”
홍린이 앞장서며 안내했다.
개축한 지 얼마 안 되는 듯한 최신형 별장.
스르릇.
현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 몇몇이 사방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파바밧.
날 향해 꽂히는 여러 사람의 눈동자.
대부분의 미녀들은 꽃무늬가 수놓아진 화려하고 가벼운 치파오와 원피스를 입었다.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미모를 지녔다.
중국 권력자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는 여인들.
“괜찮은데?”
“어머……. 소문보다 멋진데?”
“홍린! 고마워~.”
딱 봐도 기가 셌다.
조신한 척 내숭을 떨거나 하지 않았다.
나를 보는 순간부터 여러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여인들.
부드러운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베이다이허에서 확인하게 된 중국 권력의 숨겨진 실체들.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지는 않았다.
단약에 홀딱 빠져 버린 실세들과 그들의 뒤에 있는 저 여인들.
“반가워요. 주혜라고 해요.”
소파 상석 중앙에 앉아 있던 키가 큰 30대 초반의 여인이 모임의 주동자였다.
“장립이라고 합니다.”
“소문보다 더 미남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앉아요. 목마를 텐데 음료? 아니면 술?”
대낮부터 술이 한 바퀴 돈 듯했다.
와인과 시원해 보이는 맥주가 이미 탁자 위에 차려져 있었다.
그만큼 의식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여인들이었다.
피식.
실소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날 시험하고 있을 여인들.
시진핑과 장택민이 함께했던 나를 자신들의 판으로 끌어들여 보려는 수작이었다.
털썩.
주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지켜보던 이들 모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칫 무례하다고 생각될 만큼 주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원하는 게 뭡니까.”
대가를 바탕으로 주고받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다.
입술을 꽉 깨무는 주혜.
“단약?”
각자가 매달려 기생하고 있는 숙주인 남편들의 권력을 위해 그녀들이 필요한 건 빤했다.
단약!
스윽.
어깨에 메고 온 가방을 벗어 열었다.
딸깍.
탁자 위에 유리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선물로 하나씩 드리죠.”
“???”
“특별히 제조한 미스트입니다. 한 번 뿌리고 나면 얼굴에 나타난 웬만한 트러블은 모두 사라지고 바로 피부가 재생되죠.”
기대하지 못했을 선물 보따리를 먼저 풀었다.
성수에 물 좀 탔다.
성수 한 병이면 100명에게 풀 수 있는 짝퉁 성수를 만들 수 있다.
짝퉁이긴 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다.
내친 김에 과감하게 풀었다.
천해방은 중국 경제를 책임지는 자다.
그와 연결된다면 앞으로 중국에 심게 될 지뢰 작업이 수월해진다.
지금은 장태산이 아닌 장립의 신분.
거침없이 행동했다.
“……호홋.”
주혜가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녀가 풍기는 기운은 몹시 퇴폐적이고 관능적이었다.
어지간한 남자는 바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진한 유혹의 향기가 풍겼다.
“마음에 들어.”
주혜가 바로 말을 놓았다.
“고맙습니다.”
“홍콩에 있다고 했지?”
굳이 그 대답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승부는 진작 결판이 난 상태.
“따로 만나고 싶은데. 연락해도 되지?”
자신감을 온몸으로 피력하는 주혜.
자신이 겸비한 미모와 남자의 권력을 제대로 이용할 줄 알았다.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대기 번호표가 남았나 모르겠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