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장. 중국 할배의 미끼.
“그 자식 뭐 하는 놈입니까?”
베이다이허에서 가장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별장.
나머지 별장들을 발아래 깔고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한때는 모택동 주석이 사용하기도 했던 곳.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시원한 창문은 특수 방탄유리로 제작되어 설치됐다.
100평이 넘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거실에는 커다란 원탁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몇 병의 마오타이주.
안주는 의외로 소탈하게 차려져 있다.
맛깔스러운 연갈색 빛깔의 윤기가 자르르 도는 오리 구이와 기름으로 볶은 담백한 청경채.
소박한 상차림과 달리 모여 있는 인사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천지회의 핵심 인물인 천단 단주 장문량, 지단 단주 리장창이 동석했다.
내일 도착하는 시진핑 주석을 제외하고 태자당에서 배출한 3인의 상무위원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중앙판공청 주임 방창걸, 중앙서기처 서기 왕뢰, 그리고 중앙규율검사위원회 서기 이악산.
당대 중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핵심 인사가 둥그렇게 앉아 대화를 나눴다.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지만 오늘 낮에 있었던 사건으로 다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열이 많이 나 있는 자는 단연 이악산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고위 공산당 자제들 앞에서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당했다.
서슬 퍼런 중앙규율검사위원회 서기인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당장 휘하 경호원들을 이끌고 장립이라는 자를 잡아 족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류평의 딸 류미가 자신의 약혼자라고 말한 것이 걸렸다.
장택민 주석도 그자를 끼고 돈다는 소문이 있어 한 발 물러서 있었다.
자칫 상황 파악을 잘못해 내전이 발발할 경우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꼭지까지 화가 났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뛰어난 놈입니다.”
장립을 직접 만나 본 리장창이 먼저 칭찬을 했다.
“그래봐야 어린놈입니다. 뛰어나봤자 얼마나…….”
이악산이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끊었다.
얼굴에 핀 열꽃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아들이 당한 치욕은 곧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번 기회에 상해방 놈들을 쓸어버릴까요?”
중앙서기처 서기 왕뢰가 의기양양 눈동자를 반짝였다.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답게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걸 선호했다.
“회에서 결정만 내리면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워낙 비리가 많은 놈들이라 인민들도 반길 것입니다.”
이악산이 재빨리 동조했다.
이 사태가 모두 상해방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믿었다.
별 볼일 없는 장립이라는 자를 밀어주는 장택민에 대한 원망도 한몫했다.
“그건 불가합니다.”
상무위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방창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팎으로 시진핑 주석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 중의 최측근.
꾀주머니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의 머리는 좋았다.
“불가하다니요?”
이악산이 김이 샌 듯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회가 좋습니다. 이번 기회에 거머리 같은 상해방 놈들을 모조리 제거해야 합니다!”
왕뢰가 적극으로 동조하며 나섰다.
“장 주석과 상해방의 힘이 고작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냉정한 표정으로 되묻는 방창걸.
“…….”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방창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거대한 중국 곳곳에 상해방의 잔뿌리가 깊게 뿌리 내려 있었다.
“방 상무위원 말씀이 맞아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해방을 치게 되면 위기를 느낀 공청단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장문량이 얘기를 듣고 있다 조용히 반문했다.
“아쉽지만 참으십시오. 아직 때가 아닙니다.”
리장창도 그에 동의하며 의견을 냈다.
“그럼 장립 그자라도 손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악산이 강한 어조로 나갔다.
‘그 자식을 죽여 없애 버려야 아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다.’
권위가 무너져 버린 권력자의 미래는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아들 이광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싶었던 이악산으로서는 무참히 아들을 짓밟은 장립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장립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평생 꼬리표처럼 베이다이허 일이 아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심정은 알겠지만 좀 기다려 주십시오.”
리장창이 이악산을 진정시켰다.
이악산의 성품을 익히 잘 알기에 그를 만류했다.
권력을 쥔 이후로 안하무인으로 성격이 바뀐 이악산.
“언제까지 말입니까?”
“베이다이허가 끝나는 날까지는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정중하게 요구하는 리장창의 부탁.
천지회 인단 단주 리장창도 상무위원들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할 수는 없었다.
동지와 동업자 관계처럼 같이 성장해 온 사이.
중국몽을 위해 한덩어리로 뭉쳤지만 각자의 계산은 달랐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회주님도 그리 원하실 겁니다.”
천단 단주 장문량이 회주 이름을 팔며 이악산의 흥분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이악산이 입을 다물었다.
시진핑 주석조차도 수호자라 불리는 회주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중국 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조종하는 실제 모든 일들의 중심이라 할 만한 회주.
그의 가진 바 능력은 짐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장태산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습니까?”
방창걸이 장문량에게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됐다.
“일단 쇠탈의 후예라는 것까지 알렸습니다. 회의를 거친 후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장태산이 문제입니다. 놈은…… 무서운 놈입니다.”
직접 위협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리장창이 두려움을 드러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그날.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의 깊은 밤.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자리에서 왜 살려줬는지 날이 갈수록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 클라라가 개입하면서 맺게 된 휴전 협약.
냉정하게 그 일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시 살수들을 선별해서 보내면 안 됩니까?”
모든 걸 무력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는 이악산.
권력과 힘이 그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다.
“당분간은…… 반대합니다.”
리장창이 이악산의 말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분명 장태산과 약속했다.
최대한 그 기한만큼은 지켜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부 문제에 집중하는 게 좋습니다. 아직 우리의 적은 강합니다.”
장문량이 리장창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언제든 힘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이악산이 호기롭게 답했다.
나이 많은 방창걸이 그런 이악산을 주의 깊게 살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걷게 되는 파멸의 코스를 이악산이 밟으려 했다.
“주석이 오면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포섭할 대상들은…….”
계속 이어지는 회의.
또로로록.
잔에 술이 채워지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목소리는 더 낮고 은밀해졌다.
베이다이허의 두 번째 밤.
곳곳에서 야망에 몸을 사르는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새카만 기의 파장이 짙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
뭐지? 왜 이곳에 이분이!
순간 당황했다.
집 주인 양광과 상무위원 왕정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의 등장.
한때 중국을 들었다 놨다 했던 거물급 정치인이 나를 보고 웃었다.
그것도 친절하게 나의 이름까지 부르면서 말이다.
“주석님을 뵙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작은 키에 두툼한 안경테를 쓰고 있는 중국 할배.
시진핑이 등장하기 전까지 15억 인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인물이다.
허수아비를 세우고 수십 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효웅 장택민.
그 남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반갑군.”
손을 내미는 장 주석.
“영광입니다.”
장태산이 아닌 장립으로 그와 악수를 했다.
최대한의 존경과 예의를 갖춰 인사를 나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장택민은 동양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양반이다.
2020년까지도 말짱하게 살아서 시진핑을 견제했던 할배.
“생각보다 더 듬직하군.”
키 차이가 많이 났다.
“감사합니다.”
“주석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집주인 양광이 장 주석을 안으로 인도했다.
찌리릿.
그사이 눈이 마주친 왕정 상무위원이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가뿐히 무시했다.
“소려야. 곧 시집을 가도 되겠구나.”
“아직 주석님과 상해방을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
양소려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는 장 주석.
나를 대할 때와 다른 친밀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양광보다 장 주석과 더 가까워 보이는 양소려.
“나중에 원망하면 안 된다?”
“절대 원망 안 해요.”
양소려가 저렇게 활짝 웃는 걸 처음 본다.
“술상을 준비하겠습니다.”
“고맙구나.”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탁자에 앉았다.
장택민 주석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양광과 왕정이 그의 좌우를 담당했다.
양소려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양광의 아내는 이곳에 함께하지 않았다.
“…….”
잠시 침묵에 잠긴 공간.
딱히 장 주석이 함께 자리했다고 해서 괜한 너스레를 떨 필요는 없었다.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흘러가 버린 권력자의 영향력보다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인연들의 파워가 더 셌다.
미국 대통령, 러시아 차르, 인도 총리, 세상을 어둠 속에서 경영하는 차일드 가문 사람들.
하다못해 대한민국의 권력 실세라 할 만한 주순자까지.
지긋한 시선으로 장 주석이 날 봤다.
나를 묘하게 여기는 호기심이 그의 눈에서 읽혔다.
“자네…… 재밌는 친구군.”
첫 인상에 대한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장 주석.
그의 입가에 넉넉한 미소가 번졌다.
“주석님께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입니다.”
덩달아 나도 미소를 지었다.
파밧.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또 눈치를 주는 왕정.
그는 죽을 때까지 장 주석과 이런 대화를 나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전혀 쫄 필요가 없는 것을.
대신 양광은 나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봤다.
호형호재하기로 했지만 막상 그와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다.
매번 양소려가 전담 비서처럼 나와 함께했다.
“오늘 화끈하게 베이다이허에서 신고식을 했다던데 괜찮나?”
장 주석, 생각보다 말투가 젊었다.
고리타분한 꼰대들처럼 옛 단어를 나열하지 않았다.
하는 말이 젊다는 건 그의 의식이 아직도 총총하게 젊다는 걸 의미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존경하던 어떤 분께서 그러셨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쫄지 말고 살라고 말입니다.”
“쫄지 말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그것 참 명언이네!”
장 주석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립 동생 성격이 시원시원합니다.”
양광이 분위기를 거들었다.
그에 반해 왕정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그 대가가 가볍지 않다는 걸 모르나?”
그러더니 차갑게 한마디 뱉으며 끼어들었다.
“사내대장부라면 상대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설마 지금 저에게 굴욕을 자처하지 않았다고 추궁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분위기는 나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어 대차게 나갔다.
왕정이고 나발이고 여차하면 아웃시키면 그만.
상무위원,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중국에서야 끗발 좀 먹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서 대면했다면 나를 깍듯하게 모셔야 했을 입장.
“그 말이 아니잖나!”
왕정이 목소리를 높이며 호통을 쳤다.
꿈틀.
그 순간 장 주석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왕정.”
그리고 짧게 한마디 뱉었다.
“죄, 죄송합니다.”
왕정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런 왕정을 가볍지 않은 시선으로 주시하는 장택민.
짖어대려던 개를 가볍게 눌러놓고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립……. 자네의 배포는 인정하지만 이곳은 베이다이허네. 나조차 힘이 빠져 자네를 구해주지 못할 수가 있어.”
장 주석이 엄살을 부렸다.
아직까지 끗발 괜찮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후회해도 늦었지 않습니까.”
살짝 꼬리를 말며 염치를 내비쳤다.
“흐음……. 그렇다고…….”
장 주석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입을 다물더니 지그시 날 봤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
장 주석이 뭔가 준비해 둔 게 있는 듯 미끼를 던졌다.
밀당의 고수다.
“어떤 방법인지 여쭙겠습니다.”
살짝 미끼를 물고 입질을 시작했다.
그 순간 장 주석의 눈빛 속에 스치는 희열을 봤다.
자신이 던진 미끼에 내가 걸렸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듯했다.
중국 할배! 어서 더 맛있고 확실한 미끼를 내 놔봐!
“……내 사람이 되어 주게. 그럼 자네를 돕겠네!”
데일 듯 뜨거운 장 주석의 목소리.
“헛!”
크게 놀란 왕정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렸다.
놀라기는 양광도 마찬가지.
그만큼 장 주석의 제안이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저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