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장. 제갈소소.
“얼음 심장 양소려가 무슨 일일까?”
수영장 2층에 마련된 휴게 숍.
커피를 비롯해 아이스크림, 간단한 식사까지 웬만한 게 이곳에서 다 해결됐다.
베이다이허를 위해 공산당 중앙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곳.
일류 호텔 주방장과 웨이터들이 파견 근무를 나와 있었다.
그만큼 모두 신원이 확실한 자들이다.
이들은 휴대폰을 비롯해 일체 음향 촬영기기를 휴대할 수 없었다.
보름 가까이 근무하고 몇 달치 월급을 한꺼번에 받는 조건.
이상한 말을 내뱉는 순간 비밀 공안에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여인은 그 어디에서보다 안심하고 대화를 나눴다.
얼음이 들어간 차가운 우롱차가 담긴 유리컵이 앞에 놓여 있다.
“페어플레이.”
“뭐?”
“상대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줬으면 해.”
“내가 잘못한 게 있나?”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류미가 딴청을 피웠다.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을게.”
양소려는 류미의 태도에 꿈쩍하지 않고 할 말을 이었다.
“지키지 않으면 예전처럼 대련을 빙자해서 패려고?”
“정당한 승부였어.”
“원래 우린 실력 차이가 컸어. 다만 넌 네 사형들의 관심을 받는 내가 싫었을 뿐이야.”
“그렇게 믿고 싶다면 네 생각대로 믿어.”
“언제나 넌 밥맛이야.”
“칭찬으로 들을게. 어차피 더 이상 우리가 친한 사이가 아니잖아.”
파바바밧.
두 여인 사이에 은근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감히 주변에 누가 얼쩡거리지도 못 했다.
수시로 벌어지는 이런 대화들이 나중에 가서는 이권이나 권력 싸움의 단초가 됐다.
아직 젊은 청춘들이었지만 미래 중국을 경영할 지도자들이었다.
“하아.”
팽팽했던 긴장감을 해소하며 양소려가 먼저 한숨을 토했다.
정권을 빼앗긴 상해방은 언제나 아쉬운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류미는 공청단 핵심 권력자의 후손.
“장립은 주석님의 귀한 손님이야.”
“알아.”
“너무 깊숙이 끌어 들이지마.”
“베이다이허에 오는 순간 이미 그건 늦은 거 아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지. 내가 할 일 없어 이곳에 데려온 거 같아?”
베이다이허에 모이는 권력자들 중에서도 전국구 자손들만 모이는 곳이 여기였다.
조부나 아버지가 권력자인 정치 후손들.
상당수가 중요 공기업이나 개인 사업체의 차기 주인들이었다.
일면식을 터놓는 순간 엄청난 꽌시가 된다.
하물며 음주운전으로 사상자를 낸다고 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때로는 없는 죄도 만들어 무모한 사람을 감옥에 수감시킬 수도 있다.
그만큼 무소불위의 권력 집안의 자손들만 모인 자리.
그런 자리에 장립을 초대한 류미의 의도는 명확했다.
“네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어.”
짧고 명료한 류미의 대답.
“과연 네 아버지께서 원할까?”
양소려는 야심가 류평을 잘 알고 있었다.
외동딸인 류미를 통해 다음 대 권력으로의 발돋음을 이루고자 했다.
그렇기에 류미의 남편은 최소한 중국을 이끌어 갈 미래 상무위원급은 되어야 했다.
“남편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야.”
“뭐라고?”
“내가 립과 결혼할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핵심을 짚는 류미의 말에 양소려는 차마 할 말이 없어졌다.
류미의 말대로 립은 이용대상일 뿐 동반자로서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날 것 같은 짐승의 냄새.
계속 양소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부탁이야. 장 주석님이 노여워할 일은 만들지 말아줘.”
“흐음…….”
장택민 주석은 류미도 벅찬 상대다.
외할아버지 원자바오도 장택민에게는 한 끗발 밀리는 상황.
그쪽에서 작정하고 나선다면 류미의 가문도 위험할 수 있었다.
“좋아. 최대한 페어플레이.”
베이다이허의 낮에 이뤄지는 또 다른 계약들.
여인들 사이에 오가는 계약들이지만 결코 그 가치가 작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수십 수백 개의 계약들이 만들어지고 합쳐져 중국 대륙을 휩쓰는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낸다.
결코 작은 것 하나 허투로 버려지지 않았다.
“고마워.”
“내가 고맙지. 네 덕분에 저기 립……. 어!”
합의를 끝내고 립이 있던 곳을 쳐다보다 말을 멈춘 류미.
“왜?”
덩달아 같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양소려.
“저건 또 뭐야?”
양소려의 인상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
눈이 부셨다.
햇살을 등지고 선 낯선 여인의 실루엣이 눈앞에 있었다.
검은 갈색 단발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상이 강한 중국 미녀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앞 머리칼은 귀여운 인상을 받도록 반쯤 내렸다.
밝은 치아는 고르고 가지런했다.
콧날 끝은 전체적인 인상으로 보아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부드러웠다.
웃고 있는 얼굴 자체가 선한 사람으로 보였다.
한눈에 봐도 착한 미인.
“무슨 일입니까?”
무심한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파바바밧.
주변 남자들의 예기치 못한 시선이 비수가 되어 꽂히고 있었다.
류미와 양소려에 이은 세 번째 미인과의 대책 없는 대화.
“초면에 실례인 줄 아는데……. 오일을 좀 발라 줄 수 있어요?”
“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는 선탠 오일병이 들려있었다.
초면에 실례가 맞다.
“친구가 아직 오지 않아서…….”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어깨를 살짝 매만지는 그녀.
작렬하는 태양빛에 벌써 등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연약한 피부에 화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위험에 처한 여인의 도움 요청은 절대 거절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결코 그녀가 예뻐서 수락하는 게 아니다.
도움을 청해 왔으니 예의를 다해 도움을 줄 뿐이다.
“고마워요.”
사랑스러운 미소로 배시시 웃는 그녀.
참 미소가…….
- 악신의 가시가 당신을 노립니다.
뭐라고???
갑자기 들려온 경고음.
장립이 되고는 처음 들려온 경고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성도 이름도 모르는 미인일 뿐.
설마.
누가 봐도 순수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여인.
그러나 자세히 보니 정말 보인다.
고수다.
지금까지 만나 봤던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여성 수련자.
이거 위험할 뻔했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잠시 당황한 듯 보이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역시 청순가련형의 탈을 쓴 채로 잔뜩 숨기고 있는 가시.
자세히 보지 않고 당했다면 제대로 아플 뻔했다.
땡큐 알림음!
- 경고 비용을 차감했습니다.
- 기쁘시다면 보너스를 지불하시겠습니까?
아 놔!
확 밀려오는 짜증에 구겨지는 인상을 겨우 진정시켰다.
“아닙니다. 누우십시오.”
이성을 찾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달콤한 향기와 함께 출현한 악신의 가시.
“감사해요.”
옆으로 비스듬히 얼굴을 두며 단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기는 여인.
보기에는 예의도 바르고 참으로 조신했다.
스윽.
수영 타올이 깔린 선 베드에 딱 맞게 눕는 그녀.
뒤태는 또 어찌 그리 착해 보이는지.
그러나 문제는 가시.
어디서부터 가시를 제거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또로록.
병에서 오일을 조금 따랐다.
“차갑습니다.”
“네…….”
누가 보냈는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자다.
악신이 보낸 가시는 누가 봐도 현모양처감이다.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남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스윽스윽.
오일을 바른 손으로 그녀의 등판을 가볍게 터치해 갔다.
파르르르.
여인의 연기가 아주 훌륭했다.
낯선 남자에게 등을 맡기고 터치를 느끼는 여인의 떨림.
나를 목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나 말고도 주변에 여인을 탐낼 만한 늑대들이 많았다.
게다가 여성 VIP들을 돕기 위해 파견된 여성 직원들도 도처에 대기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콕 찍어 오일병을 들고 다가온 여인.
일단.
“피부 관리를 잘하신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나이는 이십대 초반 정도다.
무공을 수련한 듯 다른 여자들과 피부 결이 달랐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전 장립이라고 합니다.”
“제갈소소…….”
제갈소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곳에 모인 고위 공산당원들 중에 제갈 성을 사용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름도 외모와 잘 어울립니다.”
“…….”
칭찬이 부끄러운 듯 선뜻 대답을 못 하는 제갈소소.
이 상황이 굉장히 웃겼다.
자신을 목표물로 한 악신의 전사 등에 착하게도 오일을 발라주는 남자라니.
오일을 바르며 괜히 웃음이 났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표정이다.
“남자 새끼가 자존심도 없나.”
“그러게 말이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번에 새로 왔나?”
옆에서 서로 금칠을 해주느라 바쁘던 이광이라는 자와 그의 친구.
굳이 내 귀에 들어가라고 큰소리로 시비를 털었다.
일단 못 들은 척 한 번 참았다.
괜히 사고 치지 말라던 양소려의 경고를 되새겼다.
스르륵 스륵.
오일을 좀 더 따라 제갈소소 등에 듬뿍 발랐다.
어쨌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 일.
“크크. 숙녀 분 끝나면 나도 부탁해.”
“솜씨가 예사롭지 않는데 이런 일이 전문가인가 봐? 흐흐.”
두 놈은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나를 만만하게 본 듯 본격적으로 시비를 털었다.
여름 대낮에 술을 마셨으니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
그만큼 취기가 올랐다는 증거.
정신 줄을 아예 놓고 뱃가죽이 등에 붙도록 웃어대는 두 놈.
“형님에게 정중하게 부탁하면 발라주마.”
물론 두 번은 안 참는다.
여기서 입 다물고 있으면 내 스스로 호구 인증.
“뭐라고!”
“너 뭐야! 어디서 굴러온 온 쓰레기야!!!”
술기운에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치는 이광과 그의 친구.
마치 스트레스 좀 풀어보라고 하늘이 주신 기회 같았다.
“말은 입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책임이라는 추가 달린다는 사실 모르지?”
고개를 들어 놈들을 똑바로 쳐다봤다.
“야! 너 뭐야! 아버지 이름 대!”
이광이라는 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베이다이허에서 두 번이나 듣게 된 ‘아버지 뭐 하시노’ 중국 버전.
“알아서 뭐하게?”
피식 비웃음을 날려주고 본격적으로 판을 깔았다.
“쟤 이광 아냐?”
“저 남자는 누구야?”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잘못 걸렸네…….”
도리어 나를 걱정해 주는 착한 중국 누님들.
“야! 내 말 안 들려! 일어나서 똑바로 대답 안 해?”
여전히 오일을 바르는 일을 멈추지 않는 나를 보며 이광이 악을 썼다.
“큰일이네…….”
“화가 난 것 같지?”
“저 자식 성격 쓰레기인데…….”
낯선 누님들의 걱정을 사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났다.
내 턱 아래로 한 뼘이나 깔리는 두 놈.
젊은 것들이 몸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해 올챙이배가 툭 튀어나왔다.
근육은 없고 살만 뒤룩 뒤룩 쪄 가슴이 주먹만큼 튀어 나왔다.
일어서고 보니 놈들과 확연히 비교가 되는 나의 명품 바디.
저벅저벅.
놈들에게 한 발 다가갔다.
기세에 눌려 이미 주춤주춤 뒤로 발을 빼는 이광과 그의 친구.
나의 얼굴과 근육을 확인하고 질투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는 너희 아버지는 뭐 하시는데?”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