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6장. 베이다이허의 낮과 밤(4).
“장립은?”
“양광의 별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른 움직임은 없고?”
“조용합니다.”
지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음에도 리장창은 가뿐해 보였다.
따로 수련을 한 덕에 술 따위에 체력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일찍 일어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들을 살폈다.
인단 단주로서 밤새 있었던 조직별 접촉과 그 자리에서 오간 내용들을 파악해야 했다.
사무가 적지 않은 리장창이지만 가장 먼저 장립의 동선을 확인했다.
‘장태산과 비슷하지만…… 달라.’
세상에는 같은 빛깔을 소유한 자들이 꽤 많았다.
특히 지배층이나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 뿜어내는 빛깔은 좀 더 특징적이다.
그들의 몸에서 발산되는 파장은 더 독특해서 쉽게 바꿀 수 없다.
그 점에서 장립도 장태산과 비슷한 부류로 오만함이 엿보였지만 좀 더 겸손했다.
외모는 물론 체격, 피부, 말투까지 달랐다.
“지문 결과는?”
“확실하게 장립입니다.”
베이다이허까지 따라온 제갈유량이 리장창의 마지막 의심 한 자락을 거두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장립이 쥐었던 술잔을 따로 하나 챙겼다.
연거푸 자리가 이어지면서, 잔이 바뀌는 틈을 노렸다.
“유량.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장립이 정말 1000억 달러를 가져올 수 있을까?”
“……정확하게 파악해 봐야 하겠지만 요즘 들어 로버트 라이언이 홍콩과 선전 주식 시장에 자금을 늘린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중화민족이 곧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걸 그들도 알 겁니다.”
제갈유량은 내심 자부심을 드러냈다.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8% 이상의 성장률이 이어졌다.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치와 군사는 공산당이 맡고 인민들에게는 넉넉하게 쌀을 보급하는 권력 교환 법칙.
인민들은 단순해 배가 부르면 별 걱정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왜 장립일까? 직접 찾아와도 될걸.”
“장태산이 있지 않습니까. 로버트 라이언도 눈치를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새로운 대타를 세우려고 그러는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돈에는 우정도 사랑도 없는 법이니.”
“장립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류평도 눈독을 들이고 있어.”
“장 주석이 가까이 하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상해방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또한 생각보다 쉽게 풀릴 때도 있지 않습니까?”
“방법이 있나?”
제갈유량의 자신 있는 말투에 리장창이 물었다.
인단을 지금처럼 완벽하게 이끌어 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제갈유량을 옆에 둔 덕분이었다.
중요한 결정은 인단 단주인 리장창 자신이 내렸지만 조직 관리는 전적으로 제갈유량의 몫.
“베이다이허의 낮이 밝았습니다. 장립은 아직 혈기왕성한 청년입니다.”
뭔가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씨익 웃는 제갈유량.
“어설픈 수법은 통하지 않을 놈이야.”
“그래서 비장의 한 수를 준비했습니다.”
“한 수?”
“자연스럽게 만나기만 한다면…… 장립은 반드시 넘어 올 겁니다.”
제갈유량은 확신했다.
“믿어 보겠네.”
신뢰의 눈빛을 보이는 리장창.
“확실히 포섭하겠습니다!”
***
‘류미!!!’
문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양소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렇게 대놓고 서로의 집을 방문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른 시간부터 별장에 나타난 류미.
“소려. 문 안 열어줘?”
“어? 아, 알았어.”
끼릭.
양소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현관문을 열었다.
‘이 복장은 또 뭐야?’
남자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빼앗을 만한 하늘색 투피스 수영복.
그리고 그 위로 몸의 실루엣이 훤히 보이는 비치웨어를 가볍게 걸치고 나타난 류미.
키가 큰 미녀답게 같은 여자인 양소려가 봐도 상당히 괜찮았다.
“류미…… 이 복장은…….”
“왜? 문제 있어?”
양소려의 물음에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류미의 시선은 문 안쪽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리고.
“립! 뭐 하고 있어! 어서 빨리 움직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사람들?’
류미의 말에 양소려는 기겁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약속된 게 있음이 확실했다.
“이제 일어났어. 기다려.”
‘말까지 놓는 사이야?’
까칠한 공주님 류미는 또래 남자들에게 절대 반말을 허용하지 않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큼 도도하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파다했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예상 밖의 파격적인 행동을 보였다.
“립이니까 봐줄게.”
게다가 화도 내지 않았다.
“날이 덥네. 시원한 주스 있어?”
류미는 본인 집처럼 막무가내로 들어오더니 자연스레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에어컨 덕분에 실내 공기는 쾌적한 상태.
수영복만 입고 있는데도 더운지 손부채까지 부치며 열기를 식히는 류미.
장립은 어느새 본인이 머무는 방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무슨 일이야?”
“보면 몰라?”
“립과 약속했어?”
“어.”
“어떤 약속?”
양소려가 자신도 모르게 추궁하듯 캐물었다.
“양소려. 네가 립의 여자친구라도 돼?”
류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
“그렇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무리 너와 내가 친분 있는 사이라지만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건 사양하고 싶네.”
강한 경고가 담긴 류미의 차가운 말들이 이어졌다.
“미안해.”
양소려도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실수를 인정했다.
지뢰밭 같은 장립의 행동으로 평소 차분하던 양소려는 정신이 산만해졌다.
“미안하면 주스 가져와.”
“……알았어.”
양소려는 순순히 주방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베이다이허의 낮은 이미 시작됐다.
젊은 청춘 남녀들이 곳곳에서 무리지어 모였다.
가장 핵심은 여인들.
그곳에서 베이다이허의 여왕이 조용히 탄생한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중국 사교계를 이끌 여왕이 되는 것이다.
류미 정도라면 그룹 모임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 모임 장소로 갈 것이다.
복장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수영장이 딸린 장소임이 확실했다.
‘아마 그곳이겠지……. 그렇다면.’
바로 떠오르는 장소 한곳.
또로록.
잔에 주스를 채웠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한 양소려.
사박사박.
류미에게 준비한 주스를 내밀었다.
“고마워.”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 후훗.”
류미가 주스를 받아들고 가볍게 웃었다.
양소려가 원하는 바를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정치인 집안에 태어난 순간부터 어쩔 수 없이 습득하게 되는 눈치빨.
그만큼 저력 있는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었다.
끼릭.
그때 장립의 방문이 열렸다.
“오우!”
류미가 장립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응?’
류미의 놀란 반응에 몸을 돌려 장립을 바라본 양소려.
“!!!”
눈이 번쩍 뜨였다.
“괜찮아?”
시원한 남색 바탕에 하늘색 체크 문양이 가볍게 들어간 래시가드 스타일의 반바지를 입은 장립.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 근육.
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투명한 하얀 셔츠를 입었다.
그간의 베이다이허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남자의 조각 같은 몸매.
양소려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완벽해! 립! 너…… 진짜 멋있어!”
류미가 탄성을 터트리며 엄지척을 내밀었다.
“고마워. 너도 오늘은 매력적이야.”
“그럼 갈까?”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류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립에게 다가갔다.
덥석.
그리고 양소려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거침없이 팔짱을 꼈다.
연인 사이라 해도 믿을 만한 모습.
느닷없는 상황에 양소려는 심장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소려. 주스 고마웠어.”
약을 올리듯 양소려를 향해 상큼하게 웃으며 장립과 함께 나가려는 류미.
“자, 잠깐!”
양소려가 황급히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
류미가 반쯤 몸을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입술을 깨무는 양소려.
“나도…… 같이 갈 거야!”
***
“오랜만이야!”
“이광! 사업체 물려받았다는 소식은 들었다. 축하해.”
“별것도 아닌 건데 뭐.”
“무슨 소리야. 1년 매출이 100억 위안이면 대단한 거지.”
“용돈 수준이지. 너야말로 부동산 물려받았잖아.”
“에이. 아파트 몇 동 가지고 왜 그래.”
“북경 3환 지역 내 아파트잖아.”
“할아버지가 용돈으로 준 거야. 팔아봐야 몇 푼 안 돼.”
“한 채 팔아서 우리 술이나 마실까?”
“그럴래?”
“그럼 회의 끝내고 약속 잡자.”
“역시! 넌 나와 마음이 통해. 흐흐흐.”
옆에서 들려오는 허세 작렬하는 얘기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류미와 함께 도착한 베이다이허의 어느 수영장.
바다가 훤히 보이는 인피니티풀이었다.
시설은 5성급 호텔 수준.
선 베드는 물론 여타 시설물, 가벼운 타올 한 장까지 최상으로 관리됐다.
일반인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공간.
베이다이허의 여름을 위해 만들어진 수영장이 확실했다.
서비스는 꽤 괜찮았다.
깔끔한 복장의 웨이터들이 와인과 주스를 수시로 서빙했다.
눈만 마주쳐도 바로 달려와 고객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켰다.
규모는 적당했다.
100명 정도 인원이 즐기기에 안성맞춤.
이미 수영장에는 수십 명의 남녀들이 모여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 맨 정신에 듣기 거북한 대륙판 허세였다.
그깟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자랑으로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느라 바빴다.
힐끔힐끔.
무리끼리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몰래 나를 살피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낯선 나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호기심과 달리 막상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류미가 팔짱을 아주 단단하게 끼고 이곳에 들어왔다.
뉴페이스에, 전직 총리 외손녀와의 동행까지.
그림만으로도 다들 의문이 들 것이다.
거기에 더해 양소려까지 따라왔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연한 핑크와 블루색이 가미된 단정한 베니 프릴 쓰리 피스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양소려.
무공을 수련한 여인답게 몸이 탄탄하고 날씬했다.
덕분에 제대로 눈호강했다.
수영장에서도 두 여인의 미모는 단연코 탑.
뭇 남성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즐기며 선 베드에 누웠다.
이런 휴가도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넓게 펼쳐져 보이는 바다.
적당한 태양빛.
젊은 청춘 남녀들의 웃음소리와 적당한 술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주고받는 대화 내용들은 거의가 다 재활용도 불가능한 폐기물 쓰레기급.
잘난 맛에 사는 집안 자제들답게 겸손함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끝도 없는 허세와 실체 없는 자랑질이 대부분.
싸구려 중국 상류층 권력자 집안 자제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독야청청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밤이 찾아오면 또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몰랐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평온하게 내려놓고 싶었다.
다만.
“저기요.”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통통 튀는 상큼한 여성의 목소리.
스륵,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 순간 숨결과 함께 훅 끼쳐오는 산뜻한 향수 내음.
그리고…….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