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장. 베이다이허의 낮과 밤(3).
“립은 대단한 청년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나이에 일대일로에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만만한 녀석이 아니야.”
손님들이 돌아가고 식구들만 남은 류평의 집.
자정이 가깝도록 술잔이 오갔다.
장립과 리장창이 들고 온 술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류평의 술 창고가 개방됐다.
맛깔스러운 안주는 끊이지 않고 테이블에 올라왔다.
일대일로로 인해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누구보다 리장창이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태자당과 천지회가 주축이 되어 계획된 일대일로 대사업.
장립이 예상치 못한 백기사가 되어 나타났다.
“정말 로버트 라이언과 친분이 있을까요?”
침실에 놓인 탁자에서 온수려는 조금 전 식사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을 다시 점검했다.
뜨거운 용정차를 나눠 마셨다.
술이 깨는 데 뜨거운 차만큼 좋은 게 없었다.
두 사람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말짱했다.
오늘 나눴던 수많은 대화를 떠올리며 그 안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 머리를 맞댔다.
중국의 권력은 남자들이 쥐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실상 밤은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남자들 옆에서 조언하는 아내들이 없었다면 베이다이허의 밤은 살벌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건 확실해.”
류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나이는 어리지만 허세를 부릴 청년은 아니더군요.”
“그런 자가 어디서 뚝 떨어졌을까? 장 주석과도 적정 거리가 있던 것 같은데.”
“그렇죠?”
“상해방과도 그렇게 인연이 깊은 것 같지는 않았어. 내가 공청단 소속이고 리장창이 태자당이라는 걸 살짝 언급해 줬지만 전혀 개의치 않더라고.”
“상해방에서 키운 첩자라면 대단한 거고…….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장립만의 목적이 있는 것이겠지요.”
여자의 촉은 때로 예리하고 무서웠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온수려는 장립에게서 어떤 위험성을 함께 감지했다.
“목적이 있겠지.”
“돈은 아닌 것 같죠?”
“다른 놈들이라면 우리와 인연을 맺어 이권 사업에 뛰어들려 했을 거야. 하지만 장립은 아니야. 눈에 그런 아쉬움이 없었어.”
류평도 어느 정도 사람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속을 알 수 없던 그의 눈빛.
그 깊은 곳에 담겨져 있을 것 같은 장립만의 비밀.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시원한 답이 얻어지지 않았다.
“궁금하네요. 오랜만에.”
“그 말 오랜만에 듣는군.”
“호호호. 당신을 선택할 때 내가 했던 말이에요. 난 당신이 궁금하다고…….”
온수려와 류평은 여느 부부들처럼 사이가 좋았다.
류평에게 얼라이가 있음을 알았지만 그런 것쯤 눈감아줄 만큼 온수려는 통이 컸다.
아버지를 보고 자라 권력을 쥔 남자들의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차피 조강지처 자리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
“그런데…… 류미가 좀 수상하지 않아?”
“왜요? 걱정 돼요?”
“장립 그 친구는 남자가 봐도 괜찮잖아.”
“류미도 바보가 아니에요. 어차피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어요.”
온수려는 딸을 믿었다.
잠깐 일어난 호기심과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는 없었다.
장립이 눈에 띌 만큼 괜찮은 청년이라 해도 권력의 성골이 아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원자바오를 외할아버지로 두고 있는 류미.
잠시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뿌리째 휩쓸리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다만.
“베이다이허의 낮이 곧 시작되겠군.”
류평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이 멀었지만 점점 더 짙게 느껴지는 새벽의 기운.
“이번에는 요란할 것 같아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문객 한 명 때문에…… 여럿이 다칠 것 같아요.”
의미심장한 말을 뱉는 온수려.
그렇게 시간은 천천히 베이다이허의 낮을 맞을 준비를 했다.
밤보다 화려한 베이다이허의 낮.
모든 이들이 서서히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났다.
***
‘도대체 왜! 리장창이 류평의 집에 방문한 거야!’
양소려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류미의 등장과 그녀의 초대로 장립은 류평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뒤에 사람을 붙여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대비를 해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치 못한 리장창이 류평의 집에 나타났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전격적인 회동.
일이 꼬이고 또 꼬였다.
상해방의 원수이자, 천지회의 인단 단주 리장창.
그를 척살하기 위해 과거 몇 번이나 살수를 보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반대로 천지회에서 보낸 살수들에 의해 상해방 요인들은 상당수 죽거나 장애를 얻었다.
상해방의 철천지원수인 리장창.
그와 함께 장립이 술자리를 가졌다.
그들은 자정 무렵에야 흩어졌다.
리장창이 먼저 류평의 집을 떠났고, 문 밖까지 따라 나온 장립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두들기는 모습까지 보였다.
전해들은 정보만으로도 이미 친분을 맺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립이 돌아왔을 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돌아온 즉시 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깊은 밤, 남자의 방에 찾아갈 수도 없었다.
여러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한 양소려는 눈살만 찌푸렸다.
끼이익.
사박사박.
그때 거실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
해는 진작 밝았는데 장립은 이제야 눈을 뜬 모양이었다.
‘꼭 밝혀내겠어!’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류평의 저택에서의 이야기들.
리장창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그 내용을 알아내는 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장립은 현재 상해방의 손님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로 인해 상해방이 오해를 사거나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딸깍.
방문을 열고 나가는 양소려.
장립은 큼지막한 창가 앞에 서서 밖을 보고 있었다.
“립…….”
“일어났어요?”
양소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장립이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뭐가 이렇게 뻔뻔해?’
장립의 표정은 순진무구해 보일 만큼 밝았다.
자신이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장립이 얄밉기까지 했다.
“그런 복잡한 눈빛은 아침부터 사양하고 싶군요.”
장립은 눈치도 빨랐다.
“말해 봐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양소려가 포문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장립은 트레이트마크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류미 집에서 있었던 일 모두 다.”
양소려는 직접적으로 정보를 파악하기로 작심했다.
장립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오늘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베이다이허에 오자마자 류미의 시선을 끈 장립.
괜히 다른 권력자의 여자들 눈에도 띌지도 모른다. 베이다이허의 낮 역시 위험했다.
무엇보다 장립은 여성들을 유혹하는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늑대 같았다.
이제야 서서히 그의 실체가 보이는 듯했다.
꽁꽁 감춰진 장립의 또 다른 모습.
‘모두 다 속고 있는 거야.’
장 주석 명으로 장립이 이곳에 오게 됐지만 다들 장립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투자회사 보유 자금은 적지 않았지만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말이다.
중국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장립의 모습은 뭔가 달랐다.
양소려도 짐작할 수 없는 그 무엇.
한층 깊어진 눈동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떨렸다.
“류평과 리장창 형님을 만났습니다.”
“혀, 형님요?”
양소려는 기겁을 하며 놀랐다.
중국에서 형제 호칭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꽌시 중에서 가장 상급에 속하는 관계가 호형호제였다.
그런데 어제 처음 만난 장립에게 류평과 리장창은 형제를 허락한 것이다.
“두 분 다 호탕하고 품이 넓었습니다. 유익한 대화도 좋았습니다.”
“뭐, 뭐가 말이에요?”
“앞으로 중화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염려했습니다.”
‘저 얘기가 다는 아닐 거야!’
양소려는 장립이 발설하지 않고 있는 얘기들이 궁금했다.
하지만 짐작만 할 뿐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리장창은 적이고, 류평과 그 집안사람들과도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
“제 투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 했습니다.”
“투자요? 어디에요?”
다급하게 묻는 양소려.
장립의 얘기는 들을수록 속이 답답해졌다.
“일대일로.”
“헛!”
일대일로라는 말에 양소려는 참고 있던 탄성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다니는 거야!’
협조는 하고 있지만 시진핑과 태자당을 견제하는 상해방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국가사업이 일대일로였다.
이번 베이다이허 회의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질 사안이기도 했다.
그런데 겁도 없이 장립이 일대일로에 투자 의사를 밝힌 모양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칫 상해방의 사람이 속임수를 써 태자당과 손을 잡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여러 억측과 동요가 한꺼번에 일어날 게 뻔했다.
막아야 한다.
“안 됩니까?”
“당신,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요? 지금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그거야 상해방 입장 아닙니까?”
“!!!”
단번에 선을 긋는 장립.
“전 투자자일 뿐입니다. 돈이 되는 곳에 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상해방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딱히 연줄이 닿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왔던 것도 제가 원해서 이뤄진 결과입니다. 물론 상해방의 호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립이 양소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이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뜨거운 사이도 아닌데.”
더없이 차가운 장립의 목소리.
한마디로 경고였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장립의 요청이 먼저 있었고 뒤에 장 주석이 허락했다.
왕정 상무위원은 이 상황을 예상한 듯 반대했었다.
상해방과 장립 사이는 내세울 만한 이렇다 할 관계망이 없었다.
“그래도 장 주석님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상해방의 입장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양소려는 차분하게 이성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장립에게 협박이 통하지 않다는 건 여러 상황으로 이미 경험했다.
류미를 상대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던 장립이었다.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기운을 지우고 부드럽게 웃는 장립.
그의 천변만화한 얼굴 변화에 양소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위험해. 위험해!’
그런 장립을 보며 온몸에 전해지는 신호는 단 하나였다.
장립은 베이다이허를 노리고 있다.
구체적인 목적은 알 수 없다.
속마음도 짐작이 불가능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낱낱이 지켜보는 방법 말고 다른 수는 없었다.
전해지는 경고만 믿고 장립을 제거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파도가 좋군요. 아직 여름인가 봅니다.”
장립은 잔잔한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을 조용히 바라봤다.
아이들과 여자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구역.
베이다이허의 낮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여성들에게 함부로 다가가거나 말을 섞으면 안 됩니다. 베이다이허의 낮은 남자들에게는 휴식시간입니다. 여자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서는 시간이기도 하구요.”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양소려는 조용히 장립에게 경고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여성들은 모두 다 권력자들의 아내이거나 애인이었다.
권력자들의 얼라이들도 출입이 가능했다. 그들도, 그림자 권력의 핵심이었다.
남자들은 재산관리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녀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반대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각자의 방식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군요.”
조용히 듣고 있던 장립이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 안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베이다이허의 낮 시간의 다른 이름이 바로 ‘꽃들의 전쟁’이었다.
그걸 단숨에 알아챈 장립의 직관력.
양소려는 그런 장립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굳이 장 주석에게 보고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장립의 이면.
띵동.
노크도 없이 현관 벨소리가 들렸다.
경호원이 먼저 알렸어야 할 방문객.
그들이 막지 못하고 통과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의 등장인 셈이다.
“누구세요.”
양소려가 현관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나야. 문 열어.”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