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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장. 베이다이허의 낮과 밤. (849/1,284)

853장. 베이다이허의 낮과 밤.

‘이 녀석이…….’

류평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한 모습으로 인생 강의를 하는 장립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 나이에 뱉을 만한 말들은 아니었다.

자칫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인생에 대한 답변.

리장창이 그런 장립을 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럼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당당한 장립.

류평은 태어나 젊은 나이에도 저토록 배포가 큰 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장주석이…… 선택한 이유인가?’

상해방의 주인인 장택민이 밀고 있는 인재라는 소리는 들었다.

장립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해 놓은 상태.

같은 성을 썼지만 친척 관계는 아니었다.

유럽 화교 출신인 그가 갑자기 홍콩에 나타나 하루아침에 중요 인사로 등극했다.

장립의 과거는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다.

상해방에서 은밀히 키워낸 자라는 소문과 미국 스파이라는 소문이 번갈아 돌았다.

무척 신경이 쓰였다.

홍콩에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립의 투자회사 자본이 급속하게 늘었다.

출처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월가의 자본도 함께 투자된 상태.

상해방의 비밀 무기라는 소문에 힘이 더 실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딸 류미가 갑자기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일이 일어났다.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내일부터 강행군이 예정돼 있는 상황이다.

우연치 않게 시작된 장립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리장창까지 합류하며 때 아닌 불이 붙었다.

베이다이허 회의 첫날부터 이런 경우는 없었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런 제가 흥에 취해 말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벌주로 세 잔을 마시겠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는 장립.

또로록. 꿀꺽. 또로록.…….

단숨에 세 잔의 술을 비워냈다.

“푸하하하하하하. 립! 정말 자네가 마음에 드는군. 나와 류평 동생 앞에서 이렇게 유창하게 말을 한 이는 오늘까지 아무도 없었어. 내가 존경하게 될 것 같아. 나도 한 잔 따라주게!”

리장창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단숨에 술을 비우고 빈 잔을 내밀었다.

“립! 자네는 태어날 때부터 배포가 남달랐던 것 같군. 나도 한 잔 채워주게.”

류평도 질세라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내밀었다.

잠깐 어색했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빠르게 진정됐다.

모두가 장립의 기지 덕분이었다.

“역시! 대인들이십니다. 존경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듣기 좋은 북경식 발음으로 대화를 이끌고 있는 장립.

골치 아픈 정치와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권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분위기는 쉽게 풀어졌다.

각 세력의 이익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한마디 실수가 예기치 못한 치명타가 되기도 했다.

베이다이허는 권력의 흐름이 달라지는 극도로 예민한 자리였다.

때문에 참석한 사람들의 신경이 다른 때보다 더 날카롭게 서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달랐다.

오랜만에 수혈된 젊은 피.

분명 목적이 있어 찾아왔을 리장창도 발톱을 감췄다.

지금 1인자들도 따로 회의를 하고 있는 상황.

베이다이허 첫날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연히 함께하게 된 장립의 출현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요리 솜씨가 좋으십니다. 류 대인께서는 가장 큰 복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호칭을 형님으로 정리했지만 예의를 지키며 끝내 대인으로 존칭하는 장립.

자연스럽게 안주인 온수려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며 류평을 띄웠다.

“그래서 내가 밖에 나가도 항상 집이 그리워.”

“류평 동생 진짜 복 받은 거야. 내가 지금껏 아내에게 받은 요리라고는…….”

리장창이 장립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말끝을 흘렸다.

프랑스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 제대로 된 중국 요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집에 요리사가 상주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립은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아내가 프랑스 여인이라네. 그것도 귀족.”

“아!”

장립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 탄성을 터트렸다.

“형님. 그래도 형수님 미모는 월궁항아와 같지 않습니까.”

“동생……. 우리 나이 때가 되면 얼굴보다는 음식 솜씨지.”

“그런가요? 전 아직도 아내를 보면 가슴이 뛰는데 이거 병입니까?”

“동생! 지금 나보고 부러워하라고 뱉는 소리지?”

“하하. 결코 아닙니다.”

시답지 않는 농담이 계속 이어졌다.

중국인들은 결코 속마음을 바로 꺼내놓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술을 마시고 친분이 두터워져야 하나둘씩 자신을 내보였다.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눴지만 리장창과 류평 역시 속으로는 계산이 아주 복잡했다.

리장창은 따로 건넬 말이 있어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인물 장립으로 인해 이야기는 전혀 딴 방향으로 흘렀다.

물론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꼭 오늘만 날이 아니다.

최소 열흘 동안 계속되는 베이다이허의 낮과 밤.

오늘은 장립을 직접 만났고, 그의 정체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을 했다.

“그건 그렇고……. 립, 자네는 꿈이 뭔가?”

리장창은 술을 꽤 마셨음에도 취기가 전혀 없는 장립에게 물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야.”

류평도 호기심을 보였다.

상해방의 떠오르는 요주의 인물.

한없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장립.

“제 꿈은…….”

***

노련한 중국 아재들 미끼 던지는 솜씨가 제법이다.

두 사람이 은근히 협공 자세를 취했다.

본격적으로 나를 파악해 보겠다고 수를 썼다.

웃음이 나오는 걸 많이 참았다.

진정 그들은 나를 모르고 있지만, 난 저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특히 리장창에 관련해서는 빠삭했다.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술수꾼.

직접 제거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그에게 타격 정도는 주고 싶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중화민족의 부흥입니다.”

“호오.”

아니나 다를까 기꺼운 듯 호감을 표하는 리장창.

“…….”

묘한 눈길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류평.

“중화민족은 세계 어떤 민족보다 강합니다! 사기와 십팔사략, 풍속통의, 통감외기 등에 기록된 위대한 삼황오제의 시대를 다시 열어야 할 책무가 오늘 날 우리 인민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설가라도 된 듯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누가 봐도 대단한 애국 중국인으로 보일 것이다.

“하오! 하오! 하오!”

하오를 세 번 외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리장창은 더없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몽을 위해 살아가는 천지회의 단주이니 당연한 반응.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겁군.”

류평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장창 만큼의 반응은 아니었다.

여기서 갈리는 두 남자의 애국심.

생각보다 이들 사이에 빈틈이 많았다.

“하지만 부흥에 앞서 앞으로 중화민족은 시련의 계절을 맞이할 겁니다.”

비장함을 실어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시련? 누구에게 말인가?”

리장창이 황급히 물었다.

주객이 전도된 듯 모든 분위기는 나를 중심으로 흘렀다.

“신 냉전의 시대가 열리리라는 것쯤은 여기 계시는 두 대인께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은 결코 중화민족의 부흥을 원치 않습니다.”

텍사스 깡패 형님은 중국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패권국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

피를 흘려가며 경찰국가 행세를 해 오며 반백년이 넘도록 세계를 지배했다.

석유 패권을 쥔 아랍을 갈기갈기 찢어놨고 성격 더러운 러시아 곰들도 때려잡았다.

돈으로 재미를 본 일본 장사치들도 후려 갈겼고, 힘을 합쳐 대항하는 유럽 연합도 뒤흔들어 놓았다.

겉으로는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는 캡틴의 탈을 썼지만 철저하게 감춰진 그들의 속내는 미국 제일주의였다.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의 세상.

곧 모든 세계인들은 미국인의 본심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대통령 한 사람으로 인해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래서 판을 계속 깔고 있다.

“으음…….”

“흠.”

두 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적이 아니라 당신들과 한 편이라는 걸 보여야 했다.

“몇 년 후에 본격적으로 미국은 중화민족을 공격할 겁니다. 그 시발점은…….”

말끝을 줄였다.

계속 떠들면 혀끝의 힘이 약해지고 말발이 서지 않는 법.

“그게 뭔가?”

리장창이 궁금한지 다시 달려들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답게 성격은 여전히 급했다.

몹시 궁금할 것이다.

본인이 알고 있는 사안이라 해도 타인의 의견 역시 들어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 본성.

류평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리장창보다 류평이 마음을 감추는 데 한 수 위였다.

“관세입니다.”

“관세?”

어느 정도 실력 있는 경제학자라면 짐작이 가능했을 부분.

천기누설은 아니다.

미국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관세로 상대국을 후려쳐 굴복 시켰다.

“우리는 충실히 국제법에 따라 상업행위를 하고 있네. 그런데 미국이 어떤 근거로…….”

류평이 나를 테스트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국제 관계가 언제 법으로 지켜졌습니까?”

“그럼?”

스윽.

주먹을 움켜쥐며 보여줬다.

불끈 쥔 주먹을 쳐다보는 두 사람.

“그건 바로 힘입니다.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때 그때부터 이 힘이 바로 법이 되는 겁니다!”

“!!!”

눈에서 빛이 나는 두 남자.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이곳 베이다이허도 힘의 권력 앞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내 조국 또한 그러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옆집 개들에게 침략당하고 농락당했던 불쌍한 조상님들.

이제는 살풀이 한 번 제대로 풀어볼 때가 되었다.

“미국 정부는 슈퍼 법조항인 관세법 337조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말로는 무역구제라지만 불공정한 미국만의 정의입니다.”

337조라는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무겁게 바뀌었다.

중국 위정자라면 모를 수 없는 미국을 위한 악법.

“지적재산권 위반 및 불공정 경쟁과 행위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포괄적 법조문입니다. 그걸 미끼로 미국은 중화민족을 협박해 올 겁니다.”

들어는 봤나! 337조!

이걸 미국 형님이 치켜들면 다들 고개를 숙였다.

과거 제국의 황명처럼 타 국가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무소불위의 새로운 권력.

통상법 301조보다 더 파워가 셌다.

301조가 쨉이라면 337조는 어퍼컷 수준이다.

301조로 겁박한 뒤 관세를 뜯어내고, 그 뒤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반입을 금지시켜 버린다.

다음 순서로 차근차근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 형사소추 등등이 이루어진다.

미국 내에서 미국 법으로 처리하는 아주 악독한 보복 방망이다.

동맹이라고 봐주는 일도 없다.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미국 연방 무역 위원회에서 다수결로 판단되면 끝.

행정부 입김이 가장 세게 들어갔다.

미국 의회에서 행정부에 위임한 사항이라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또라이 대통령이 말하면 그대로 실행해 옮겼다.

그전에 알아서 적당히 조공을 바쳐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21세기 판, 신 조공 문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당했다.

살아남기 위해 피땀 흘려서 번 돈을 여러 명목을 떼어다 바쳐야 했다.

약소국의 서러움이 세기를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그 부당한 처우를 깨부수기 위해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 지금 미국과 우리는 사이가 좋아.”

리장창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음 대 미국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습니까?”

“아마도…… 힐러리 클린턴이겠지.”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공화당에서 대적할 자가 없죠.”

아무리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현 권력자라고 해도 회귀자 앞에서는 미래 예측 초심자였다.

“아닙니다.”

“응?”

“뭐라고???”

“다음 대 대통령은 두 분이 예상하는 힐러리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동생이 생각하는 다음 대 미국 대통령은 누군가?”

리장창이 다급하게 물었다.

복채도 안 내고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하수.

“그는 3단계로 중국을 붕괴시킬 겁니다. 첫째는 제조업 철수, 둘째는 경제 봉쇄. 마지막으로 국제질서 재구축.”

짧고 굵게 말해줬다.

그래야 듣는 사람 의식 속에 제대로 각인되는 법.

“그런 말도 안 되는…….”

리장창이 애써 부정했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이미 중국의 공급망은 세계적이야. 당장 저가의 중국 물건이 들어가지 않으면 미국 경제가 휘청거려.”

류평은 사업가답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놨다.

“미국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에서는 이미 구체적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쯤에서는 유식한 척 알고 있는 지식을 열심히 나열해야만 한다.

두 사람과 치고받는 건 경제 상황을 떠나 문명의 충돌에 버금갔다.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최대한 대한민국에 피해가 가해지지 않도록 나는 열심히 판을 짜는 데 집중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리장창이 난색을 표하며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미래를 아는 자의 여유를 한껏 누렸다.

“립. 여기는 베이다이허라네.”

류평의 안색도 달라졌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명 묵직한 경고와 협박의 의미가 담긴 한마디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은근히 드러냈다.

“만약 제 말이 틀린다면…… 전 재산은 물론 목도 내놓겠습니다.”

“!!!”

너무나 무모한 나의 내기 제안에 두 사람의 얼굴은 더 알 수 없는 표정이 됐다.

여기서 마지막 한 방.

“하지만 제 말이 맞다면…… 두 분은 저에게 선물을 주셔야 할 겁니다.”

물고기와 낚시꾼의 마지막 승부처.

“원하는 게 뭔가?”

리장칭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리장창.

그런 그도 중국의 미래 앞에서는 고심이 되는 모양이다.

승부를 결정짓는 추는 나에게 기울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건…….”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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