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장. 뜻밖의 조우(2).
이게 웬 월척?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같은 만남.
리장창을 류평의 집에서 조우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분명 하늘이 주신 기회다.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다.
모든 면에서 정보가 빠른 리장창이 나에 관해서 모를 리 없었다.
장태산과는 외모부터 완전히 다름을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백날 뜯어봐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여유를 갖고 늙은 홍콩 여우를 상대했다.
“형님. 안으로 드시지요.”
어색한 분위기를 류평이 애써 정리했다.
다들 눈치의 달인들이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은 이미 감지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었다.
“먼저 온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못했네. 내가 합석해도 괜찮겠나?”
주인인 류평이 아닌 나에게 의사를 묻는 리장창.
“물론입니다. 사해가 동도라고 옛 성인들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심 좋은 사람으로 나갔다.
장태산의 고유의 느낌을 적당히 섞었다가 지웠다.
리장창 입장에서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인간 상식으로는 결코 내가 장태산임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사실이라고 해도 납득이 안 될 것이다.
의료용 메스로 겉 피부를 도려낸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지문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살아생전 장립의 것이었다.
“이렇게 젊은 친구가 호탕합니다. 하하하.”
탁탁.
류평이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의적으로 나왔다.
류미는 어울리지 않게 조신한 척 연기에 몰입해 나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분위기를 주도하던 주인공이었지만 지금은 객으로 밀려난 류미.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복잡했다.
“준비한 요리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사람과 술이 있다면 소채 하나에도 술맛이 좋지 않겠습니까?”
리장창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람 좋은 모습을 보였다.
“앉으십시오.”
“고맙네.”
리장창이 상석에 앉았다.
“엄마 제가 도울게요.”
류미가 온수려와 함께 움직였다.
탁.
첫 번째 술병이 올라왔다.
식탁에는 간단하게 땅콩 절임만 준비되어 있는 상태.
“형님께 먼저 올리겠습니다.”
“집주인인 자네부터 받아야지.”
“예법이 그러합니다. 받으십시오.”
“그렇다면야.”
또로록.
리장창이 든 잔에 마오타이주가 가득 채워졌다.
“립. 자네도…….”
“내가 따라주겠네.”
“네?”
리장창이 병을 잡았다.
류평이 병을 건네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주도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스윽.
리장창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잘 부탁하네.”
또로로록.
의심을 거두지 않은 시선으로 나의 잔에 술을 채우는 리장창.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시선을 무시하며 웃는 얼굴로 겸손하게 술을 받았다.
똑똑한 홍콩 여우.
나의 정체를 꿈에도 모르는 그를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던졌다.
리장창! 이번 생에 당신 명줄은……. 내 손안에 있어!
***
일반 가정집 거실만 한 대형 조리실.
화르르르르르르르.
치이이이익. 칙.
온수려는 능숙하게 대형 화구와 중식 프라이팬을 다뤘다.
중국에서 정치인의 딸과 아내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특급 요리사를 고용해 음식을 마련하지만 이런 날에는 안주인들이 직접 부엌에서 요리를 했다.
만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요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
남편과 가문의 홍복은 아내의 손맛이라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
특히 온수려는 장백산 표고로 만든 돼지고기 버섯볶음을 참 잘 만들었다.
채 썬 돼지고기를 소금과 후추로 가볍게 밑간을 해 볶았다.
대륙에서 남편이 10위 안에 들어가는 부자임에도 그녀의 음식 만드는 솜씨는 요리사들 못지않은 수준급이었다.
치리리리리릭.
버섯 안에 새우살을 능숙하게 채우고 달걀옷을 입혀 튀겼다.
먼저 익힌 돼지고기와 버섯을 넣고 청경채와 고수, 양파, 사천 고추를 넣고 볶았다.
매콤한 술안주를 좋아하는 남편의 취향.
매일 술을 마신다 해도 과언이 아닌 베이다이허에서 이만한 안주가 없다.
거기에 정통으로 제조한 두반장 소스를 넣고 볶아 낸다.
스윽.
류미가 옆에 대기하고 있다 크고 화려한 접시를 내밀었다.
밖에서와 달리 류미는 조신했다.
보기 좋게 볶아진 요리가 접시 위에 가득 담겼다.
고소하고 향긋한 음식 냄새가 부엌에 확 퍼졌다.
“가져다 드려.”
“네.”
류미가 부엌 밖에 있는 식탁으로 요리를 옮겼다.
“하하하하.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니 술맛이 좋습니다.”
리장창의 웃음이 호쾌하게 울렸다.
“대인 말을 놓으십시오. 저보다 한참 인생 선배님 아니십니까.”
“형님 그러십시오.”
“그럴까?”
“편한 동생처럼 여겨 주십시오. 한 잔 받으십시오.”
“고맙네! 이제부터 립은 나의 동생이야. 하하하하하.”
리장창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처음 마주쳤을 때 불꽃 튀던 신경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요리가 나왔습니다.”
류미가 상큼하게 웃으며 요리 접시를 내려놓았다.
누가 봐도 조신한 미모의 아가씨가 아닐 수 없었다.
“류미 혼처는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제대로 된 녀석을 골라주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류미는 한순간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류미 정도 되는 신분이라면 애초 정략결혼으로 이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꽌시를 가장 효과적으로 엮는 방법 또한 혼인관계가 최고였다.
리장창만 해도 하나뿐인 딸을 프랑스 귀족 가문에 시집보냈다.
“요즘 골치가 아팠는데……. 형님만 믿겠습니다.”
류평도 한수 거들었다.
그러나 정작 류미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그때 장립이 류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류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사르르 붉혀졌다.
‘이게 뭐람?’
류미는 지금 이 순간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처음엔 호기심과 양소려에 대한 경계심에서 충동적으로 시작된 초대였다.
게다가 가문 사람들 입에서 장립의 이름이 언급되었던 것도 한몫했다.
중국 상류층이라면 아버지 류평과 원자바오라는 이름 앞에서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장립은 예상 밖의 태도를 보였다.
도리어 자신을 상대로 화끈하게 경고까지 날렸다.
이변은 계속 됐다.
중국 최고 권력집안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니면 천재.
류미는 요리를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왔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술병이 다 비기 전에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야 했다.
몇 대의 냉장고 안에는 최고급 신선 식재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대단한 남자구나.”
해물누룽지탕을 만들기 위해 오징어를 손질하던 온수려가 장립에 대해 입을 열었다.
“뭐가요?”
그런 말을 하는 엄마의 속마음이 궁금한 류미.
평소 여성들의 정치 교육은 이렇게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름을 듣고도 저렇게 반응하는 남자를 본 적 있어?”
“……아니요.”
“배포가 대단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네 아버지와 리장창 대인 앞에서도 저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기세가 좋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지금까지 류미가 만난 남자들에 대한 평가 중 단연 최고의 말이었다.
만남이 이루어진 시간은 무척 짧았다.
레드 다이아몬드가 훌륭한 선물임은 분명하지만 온수려를 물질로 감동시키기에는 다소 모자랐다.
평소에도 온전히 사람만을 보고 평가하는 엄마.
“오! 자네는 술도 잘 마시는군!”
“대인들과 함께 있으니 부족한 제가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넉살도 좋았다.
류평과 리장창을 만나기 위해서는 베이다이허 인물들도 시간을 내 줄을 서야만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행운을 거머쥔 그는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친 야생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대로 훈련된 경주마였다.
“얼굴도 호감형이고 관상도 좋다. 음색과 말하는 태도에서 격식이 느껴지는구나. 행동 하나하나도 모두 다 자연스럽다.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문 청년이야.”
온수려의 격찬은 계속 이어졌다.
총리 딸로서 수없이 많은 권력자들을 만나왔던 온수려의 정확한 판단이었다.
“부드러운 남자는 아니에요.”
류미가 직접 경험했던 장립의 거친 언행를 떠올리며 말을 끊었다.
살면서 거친 말은 장립에게 처음 들어봤다.
“나쁜 남자가 맞을 거다. 소려가 함께했을 정도라면 주변에 더 많은 여자가 있을게야.”
양소려와 류미는 알게 모르게 라이벌처럼 살아왔다.
한때 상해방과 사이가 좋았던 어린 시절에는 단짝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다.
무술을 수련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어 대련도 여러 차례 해보기도 했다.
베이다이허에서 어울리며 함께 수영을 하기도 했던 사이였다.
정치적 문제로 얽히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여전히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양소려가 처음으로 남자를 옆에 끼고 나타났다.
윗선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양소려 신분이 아무의 말이나 들을 만큼 평범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동행.
“동생, 노래도 잘하는가?”
“물론입니다. 형님들이 원하시면 당장 가수가 되겠습니다.”
“그래? 그럼 잠시 후에 노래를 들어봐야겠네.”
“한 번 듣게 되시면 다음에 초대 가수로 부르게 되실 거라 장담하겠습니다.”
“뭐라고? 하하하하하하하.”
세 남자의 대화 자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술기운이 아직 돌기도 전에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흥이 올라 있었다.
“저렇게 뻔뻔함이 넘칠 줄 몰랐어요.”
류미가 고개를 내저었다.
교육 한번 제대로 시켜보겠다고 초대했는데 어느새 저녁 자리의 주인공 돼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용기란다. 대화를 나누는 솜씨로 보아 세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많은 것 같구나. 네 아버지가 저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청년은 장립이 처음이다.”
“엄마도 마음에 들어요?”
“물론이야. 네가 지금껏 만났던 남자들 중에 최고인 걸?”
“…….”
류미가 입을 다물었다.
연애 경험은 몇 번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놀았던 건 아니다.
괜히 구설수에 오르기라도 하면 가문에 흠이 됐다.
당연히 만나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 경호원들이 항상 따라다녔다.
상해방과 적이 된 뒤로는 작은 일탈마저 더욱 쉽지 않았다.
자칫 표적이 되어 납치라도 당하면 중국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바람둥이 싫어요.”
“매력 있잖아?”
“엄마!”
“호호호. 내가 이 나이 먹어보니 가장 후회된 일이 뭔지 아니? 너무 조신하게 할아버지 말씀대로 살았다는 거야. 어차피 인생 한 번뿐이야.”
살만큼 산 엄마가 한창 때인 딸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류미 역시 그 말에 공감했다.
청렴한 총리의 딸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며 일탈 한 번 없이 살아온 엄마 온수려.
부와 권력은 차고 넘쳤지만 한 여자로서 누려야 할 행복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류평 역시 대부분의 돈 많은 부호들처럼 젊은 얼라이가 몇 명 있었다.
원자바오도 그 점은 인정해 줬다.
“내일부터 재미있겠구나.”
“???”
“오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으면 여자들의 세상이 오잖아. 베이다이허의 낮…….”
온수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류미야.”
온수려가 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네.”
“베이다이허의 여왕이 되고 싶다면 장립을 잡아.”
“!!!”
“그가 너와 함께한다면 넌 여왕이 될 거야. 베이다이허의 낮을 지배하는 화려한 여왕.”
“그건…….”
“젊음과 추억도 다 한때란다. 난…… 네가 나처럼 후회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같은 여자로서 해주는 진심어린 조언.
“형님들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 인생에 정해진 해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들려오는 장립의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처럼 앞으로의 시간 속에도 정해진 해답은 없을 겁니다.”
“그럼? 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인가?”
류평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니요. 답은 있습니다.”
“동생! 어른들 놀리면 못써. 해답이 없다면서 답이 또 있다니…….”
리장창의 농담 섞인 꾸중.
“그게 바로 답입니다.”
“뭐라고?”
류평의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했다.
온수려와 류미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빨려 들어가는 장립의 얼토당토 않는 듯한 언변.
“인생에 해답이 없다는 게 바로 답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