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9장. 밟아! 확실하게!
“프랑스로 출국이라……. 뭐가 이렇게 바쁠까?”
홍린은 막 전해들은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란 듯이 홍콩에 기업을 설립한 장립.
맥켄스 로펌 직원들을 말도 안 될 만큼 파격적 조건으로 채용했다.
순식간에 그럴싸한 투자회사 하나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지사장에는 깐깐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양소려가 앉았다.
권력 핵심인 양광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호위를 맡고 있던 양소려.
그녀는 누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장기판의 말이 아니었다.
상해방에서도 양소려의 위치는 독특했다.
아버지 양광과는 포지션이 많이 달랐다.
상해방을 수호하는 분 밑에서 특별히 무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중요 인사들의 신변 보호에 투입되는 핵심 전력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양소려가 정체가 모호한 장립과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리장창은 누가 턴 거야?”
살벌한 말벌 집을 누군가 건드렸다.
감시하고 있던 리장창의 저택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그 덕분에 호위는 더 엄격해졌다.
극비로 보고된 정보에 의하면 며칠 전 폭풍이 몰아치던 밤 습격이 있었다고 했다.
기필코 상해방 쪽은 아니다.
지금은 앞서 한 바탕 전쟁을 치른 후 갖게 된 휴식기.
갑자기 제3자가 판에 끼어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 리장창을 물다니.”
홍린은 홍콩의 정보통.
요즘 여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잠시 무료했던 삶에 활기가 넘쳤다.
다만.
“장립……. 그자가 제일 수상해.”
그 틈에도 장립을 떠올리며 연신 반짝이는 홍린의 눈동자.
우연인지 모르지만 장립이 나타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진 대형 이벤트 몇 건이 홍린의 촉을 자극했다.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하면서 또 연관되어 있을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눈치 덕분에 홍린의 현재 위치가 가능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거지. 도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지?”
장립에 관한 보고 내용은 프랑스에서 끝났다.
공항을 빠져나와 대기 중이던 오토바이에 오른 후 추적자를 따돌려 버린 장립.
장립의 존재 자체가 홍린을 계속 자극했다.
목적을 갖고 초 근접 거리까지 접근한 장립.
홍린은 꼬리를 놓쳐 버린 장립 때문에 입맛이 썼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내가 분명했다.
***
탕! 타앙! 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달려!!!”
부아아아아앙.
커다란 바퀴가 인상적인 4륜 지프차가 강렬한 배기음을 토하며 초원을 달렸다.
러시아의 군에서 제작한 특수 차량.
눈길과 진흙탕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끼이이이이익.
차가 급제동하며 멈췄다.
그리고.
탕!!!
몇 발의 총알을 맞고도 넘치는 힘을 자랑하며 도망치는 대형 멧돼지.
다시 한 번 멧돼지 몸통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사격.
쿠다다당.
산만한 덩치의 멧돼지가 내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히며 쓰러졌다.
“하하하하하! 잡았다!”
잔뜩 신이 난 남자.
“좋습니까?”
“크으! 두 말 하면 뭐 해. 요즘 애들 말로 꿀 빤다! 내가 일찍 이 맛을 알았다면 골치 아픈 회장질도 진작 때려 쳤을 거야. 형이나 동생에게 사업 물려주고 이곳에 땅을 사서 사냥꾼으로 살았겠지.”
임성철 회장이 많이 변했다.
그사이 거친 수염이 많이 자랐다.
불룩 튀어나왔던 뱃살도 거짓말처럼 쏙 들어가고 몸이 보기 좋게 슬림해졌다.
러시아인이라고 믿어도 될 만큼 털모자를 귀까지 푹 눌러쓰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태양빛에 검게 그을린 피부는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였다.
성수로 치료하고 내공으로 청소 좀 해줬더니 몸 상태가 아주 30대처럼 됐다.
키는 어쩔 수 없지만 좀 더 날렵해졌다.
눈빛은 한국에 있었을 때와 달리 생기가 넘쳤다.
시베리아에서 다시 태어난 야성의 사나이였다.
아무도 이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렸던 오정의 실제 주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따라 실하네. 300킬로그램은 넘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크으! 기록 갱신이다!”
주먹을 움켜쥐고 진짜 사냥꾼 같은 카리스마를 보이는 임성철 회장.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멧돼지 머리에 짝다리를 턱하니 올렸다.
“사진 한 장 찍어줘.”
“넵!”
임성철 회장이 휙 던져 준 스마트폰을 낚아채 사진을 찍었다.
찰칵.
오른손으로 총을 지팡이처럼 짚고 왼손으로 승리의 브이를 그리는 임성철 회장.
포즈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사진 속 임성철 회장의 얼굴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얼굴 변형을 부탁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약간의 내공을 사용하면 기본 축골공으로 변형이 가능했다.
홍콩에서도 축골공을 활용해 다른 얼굴로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다.
프랑스로 건너와 러시아로 들어올 때도 마법을 사용했다.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은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투명 마법을 사용해 공항에 대기 중이던 자가용 비행기에 올랐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나의 행보.
잠시 빌려 쓴 장립이라는 새로운 신분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홍콩 방문 목적인 방울 달기는 제대로 마무리 됐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몰랐던 리장창도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직접 입으로 뱉은 신들과의 약속.
정작 리장창은 모르겠지만 중국 선대 조상신도 계약의 주체가 됐다.
만약 나와 한 계약을 어기게 된다면 리장창의 목숨을 직접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때는 탈이 생기지 않는다.
찰칵.
“사진빨이 좋습니다.”
“시베리아의 거친 남자 느낌 좀 나?”
“물론입니다.”
“흐흐. 고마워. 장 회장.”
“말로만 인심 쓰는 고마움은 사양하겠습니다.”
“이 녀석 암컷이야. 고기가 기가 막혀. 베르그만 법칙에 따라 덩치가 커졌지만 고기 맛이 죽여. 산과 들판에서 도토리, 약석 열매, 지렁이, 뱀 같은 것만 먹고 살아. 그래서 먹고 나면……. 흐흐흐.”
뒷말을 흐리는 임성철 회장.
그사이 별의별 분야를 다 공부했다.
같은 종이라 해도 추운 지방에 사는 동물은, 다른 기후에서 사는 동물보다 덩치가 커진다는 베르그만의 법칙.
인간도 그 법칙에 적용됐다.
남쪽에 사는 이들보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 몸집이 더 큰 이유가 그 때문이다.
“요리도 하실 줄 아십니까?”
“요리? 그까짓 거 일도 아냐. 고기 딱 떼어서 소금과 후추 칙칙 뿌리고 구우면 끝! 거기에 보드카 한 잔 마시면 그게 바로 천국이야.”
러시아에서 생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곳 문화에 적응이 다 됐다.
대한민국 최고급 한정식집을 애용하던 임성철 회장이 야생 칼을 직접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멧돼지 목을 찔렀다.
콸콸.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뜨거운 피가 바로 뿜어져 나왔다.
“이 녀석들은 목살이 끝내줘.”
흥건한 피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임성철 회장의 모습이 진짜 낯설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다.
띠리리리리리리리.
스마트폰이 울렸다.
암호화 작업으로 철저하게 보안이 되어 있는 통화.
- 회장님.
“도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 어디세요?
“여기…… 러시아 별장입니다.”
- 하아. 정말 부럽네요. 지금 여긴 일이 터졌는데…….
“무슨 일 말입니까?
한숨을 토하는 도도희 대표.
그녀가 지금 담당하고 있는 업무는 대부분 인수합병에 관련된 일들이다.
- 대웅조선! 사건 터졌어요.
“사건요?”
대웅조선 인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 중 하나였다.
제문환 전무를 임시 대표로 선임하고 후속작업이 착착 진행 중이었다.
가장 골머리가 아팠던 분식회계 사건을 언론에 터트렸다.
그 일로 배짱을 부리던 산업은행과 정부가 여론에 놀라 서둘러 매물을 내놨다.
계획했던 대로 적당한 가격을 제시해 우선협상자로 선정 됐다.
적정 가격도 원만하게 협상 중이었다.
- 노조가 반대하고 나섰어요.
“노조가 말입니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대웅조선을 인수하는 건 국가 경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좋은 일.
- 정체 모를 외국 기업의 인수는 반대한다고 합니다.
“국내 기업 컨소시엄으로 진행 중입니다. 해외 자본 투자 비율은 그렇게 크지 않은데…….”
- 대웅조선 대표가 노조와 작업에 들어간 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 말 그대로에요. 어차피 인수되지 않아도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준 공기업이잖아요. 여기저기 돈 받아 처먹을 곳이 널렸는데 그 자리를 쉽게 내주고 싶겠어요? 엄청난 뒷돈 써서 대표가 됐는데.
신랄한 도도희의 상황 설명.
나도 모르게 파르르 손이 떨렸다.
개인의 사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이 정권의 행태.
소리만 지를 줄 알지 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경기부양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저금리로 아파트 자금을 뿌려 부동산 거품을 생성했다.
거품에 취한 국민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감당할 세금이라는 것도 모르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미래 투자는 관심도 없고 모두 다 제 잇속 차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급하기도 했다.
하나라도 더 건져내야 고급 인력 유출을 막을 수 있다.
“노조는……. 왜 그런답니까?”
- 노조도 배가 불렀죠. 어차피 월급 따박따박 나오잖아요. 주인 바뀔 때 이런저런 요구로 파업해서 그동안 못 받은 보너스까지 챙기려는 심보죠.
도도희도 노조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배고픈 시절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던 이들과 생리적으로 달랐다.
생존권이 아닌 부자가 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그들.
“요구 조건이 뭡니까?”
- 제문환 대표님이 노조 대표들과 만났어요. 아주 터무니없는 걸 요구했어요.
“터무니없는 요구요?”
- 인수 계약 위로 보너스 1000%. 자녀 특채, 일시 성과급 조합원당 2,000만 원, 특별 근로수당 인상…….
줄줄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요구 조건들.
회사가 흥해서 인수합병이 되는 케이스가 아니었다.
다 망해가는 회사를 애국 차원에서 인수하려 했건만 그 틈에 빨대를 꽂으려 드는 노조.
대웅조선 대표보다 더 나빴다.
고통 분담도 아니고 봉을 만난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행태.
“제문환 대표에게 철수하라 전하십시오.”
- 시일이 촉박해요. 다음 달까지 인수하지 못하면 우선 협상자 지위를 박탈당해요.
대웅조선에 대해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한 도도희.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는 아니었다.
전략을 수정할 타이밍.
“일단 제 말대로 하십시오.”
- 네……. 알겠습니다.
도도희는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수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 마음이 좋지 않아요. 사람들 욕심이 왜 이렇게 끝이 없는지…….
도도희가 현장에서 느꼈을 인간의 끝없는 욕망.
자기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비뚤어진 감정이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쉽게 얻어진다면 그만큼 가치가 없다는 반증.
“한국에 들어갈 겁니다. 구체적인 보고는 그때 받겠습니다.”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대웅조선 인수가 쉽지 않지?”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임성철 회장이 물어왔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흐흐. 그래서 난 인간의 성선설을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이익설이야. 나에게 도움이 되면 선하고 착해지지만 반대 경우에는 악인이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
“그래서 노조를 날렸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데 노조가 왜 필요해?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더 월급 많이 주고 복지 넘치는 회사 만들어 놓은 자 있으면 나오라고 해.”
임성철 회장이 대차게 나왔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소리일 테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권리는 말이야 내가 할 책임과 의무, 성실함을 다할 때 누릴 수 있는 거야. 그게 권리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책임과 의무는 뒷전이고 권리부터 주장해. 그게 말이 돼? 조금만 힘들어도 다들 도망치기 바빠. 그리고 일자리 없다고 아우성이지. 쯧쯧.”
혀를 차는 임성철 회장.
“세계 시장은 빠른 물류 개선으로 평준화가 돼가고 있어. AI가 극도로 발달하고 로봇이 인력을 대체하는 세상에서 경쟁력 없는 인간들이 설 곳이 어디 있을까? 편하고 좋은 일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오정 임원들만 봐도 어린 시절부터 잠 안 자고 피 나는 노력으로 그 자리를 얻어낸 사람들이야. 그런데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대한민국이 공산국가야? 중국과 북한도 그렇게 하지는 않아.”
임성철 회장의 노동에 대한 견해는 확고했다.
“장 회장.”
“네. 회장님.”
“……. 정신이 썩어빠진 놈들은 초장부터 확실히 잡아야 해. 개과천선? 인간 품성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야.”
임성철 회장이 어느 때보다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밟아. 확실하게!”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