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장. 신들의 충고.
“다, 단주님!!!”
제갈유량은 리장창의 저택에서 온 긴급 보안 신호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저택은 가까웠다.
무장한 경호원들과 함께 도착한 단주 리장창이 머물고 있는 저택.
만전을 기했어야 할 경호 실패에 경호원들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경호원 모두 자신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몰랐다.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찰나 한순간 다 같이 의식을 잃었다.
쏴아아아아아.
폭우는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콰과과과과광.
벼락이 동반되는 흔치 않은 날씨였다.
제갈유량의 부름에도 멍한 시선으로 창밖만 내다보는 리장창.
조금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마치 악몽을 꾼 듯했다.
가장 안전하다고 자부했던 홍콩 저택이 한 사람에게 습격당했다.
폭우를 뚫고 습격한 초대받지 못한 자.
‘휴전은 왜…….’
장태산이 자리를 뜨고 난 뒤 계속 의문이 들었다.
처음 보였던 태도로 당장 목숨을 거두면 간단한 것을 장태산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뭔가 곡절이 있는 듯한 표정.
클라라를 핑계로 내세웠지만 그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장태산은 더 이상 처음 만났을 당시의 순진한 청년이 아니었다.
눈빛에 내비치는 고요함 속엔 리장창 자신을 능가하는 연륜이 담겨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계약을 쉽게 저버릴 수 없었다.
딸 클라라가 목숨을 걸었다.
지금은 어엿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클라라는 누구보다 자신을 많이 닮았다.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에 책임을 지려 할 게 자명했다.
장태산 또한 주변 사람들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클라라의 목숨을 취하고 말 것이다.
두 사람에게서 각자의 확고한 신념이 느껴졌다.
“단주님…….”
대답 없는 리장창의 안전을 확인하고 제갈유량은 기립한 채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장태산이 찾아왔다.”
“헉!”
생각지 못한 대답에 크게 놀란 제갈유량.
사지나 진배없는 홍콩에 직접 찾아들 거라 전혀 생각 못 했다.
과거 한 차례 이곳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장태산.
“조력자가 있습니까?”
“모른다.”
“혹시 러시아가…….”
“그들도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아.”
“그럼 어떻게 들어왔단 말입니까? 장태산은 지금 러시아 사하공화국에 있습니다.”
“확실한가?”
“출국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의심스러운 장태산의 이동 루트.
“모든 공항과 항만에 대한 검문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제갈유량은 더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이미 독 안에 든 쥐였다.
홍콩은 섬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장태산은 본토로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굴이 공개되어 있는 만큼 공항과 항만 관리만 철저히 해도 잡을 수 있었다.
“불가능해.”
“네?”
“장태산이 어린애인가?”
“하지만 이곳은 우리 관할입니다. 공권력을 투입하면…….”
“내 집이 털렸네.”
“…….”
“대책 없이 왔을 녀석이 아니야.”
“그래도 잡을 수만 있다면…….”
“놔줘.”
“네?”
리장창의 빠른 포기에 제갈유량은 당황했다.
평소 장태산의 이름만 나와도 분을 삭이지 못했던 리장창.
눈앞에 나타나면 당장 찢어죽이겠다던 평소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날 살려주는 조건으로…… 양보했네.”
“!!!”
“어차피 우리도 내부 일에 힘을 집중할 때야. 그 녀석은 당분간 잊어.”
“존명!”
“그건 그렇고…… 장립은 찾았나?”
“지금 호텔에 있습니다.”
“언제부터?”
“지하철에서 잠시 놓쳤지만 곧 호텔로 복귀했습니다. 그 뒤로 룸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확실해?”
“호텔 CCTV와 저희가 보낸 요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비상계단 또한 확실히 통제되었습니다.”
“으음…….”
‘그자가 계속 걸려. 무슨 이유일까?’
널리고 널린 장씨 성.
‘립’이라는 이름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장립이 나타난 뒤부터 그가 계속 신경 쓰인다는 것.
장태산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외모 또한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수집한 정보를 비교해 봐도 국적도 살아온 환경도 달랐다.
외모는 물론 신장도 전혀 다른 사람.
성형을 감안해도 체격이나 키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축골공을 수련하지 않는 한은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끊임없이 계속되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
리장창을 향한 신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
또로로로록.
색깔이 묘한 술이 잔에 채워졌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를 채운 듯 색감이 특별한 술이다.
꿀꺽.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술의 독특한 빛깔만큼 맛도 특이했다.
놀랍게도 신맛, 단맛, 짠맛, 상큼한 맛 등등이 다 느껴졌다.
정확하게 일곱 가지의 다른 맛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다.
“어때! 맛있지?”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스트랩 스타일의 블랙 원피스를 걸치고 고혹스런 목소리로 물어왔다.
“처음 맛보는 술입니다.”
“비싼 거야. 여기 손님들도 포인트 아까워서 잘 못 마셔.”
“그럼…… 파셔야죠.”
“누나가 특별히 쏘는 거니까 부담 없이 마셔. 동생 덕분에 직원들도 얻었고 이것저것 해서 포인트도 많이 벌었잖아.”
계산이 철저한 진이 누님.
조용히 미소 지은 붉은 입술이 데일 듯 뜨겁고 매혹적이게 보였다.
“벽계수 형님 지옥에 계시죠?”
“어떻게 알았어?”
“누님에게 포인트 쪽 빨리고 신선 됐을 리가 없죠.”
“빙고! 호호호.”
진이 누님이 운영하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찾았다.
계획대로 리장창을 처리하지 못한 탓에 마음이 착잡했다.
클라라와의 인연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였다.
인간 세상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들과의 관계도 문제다.
상대해야 할 적들이 강할수록 그들을 보호하는 신들은 더 강했다.
회귀한 생을 살고 있는 나에게만 적용되는 요상한 법칙.
중국 조상신들이 작정하고 보호하고 있는 리장창 같은 거물은 처리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다.
다른 악인들처럼 쉽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사용되는 포인트의 양도 엄청났다.
같은 부류의 악인이어도 리장창 같은 인간에게 사용되는 포인트는 단위가 달랐다.
한 박자 쉴 타임.
리장창과 휴전 협정을 맺고 호텔로 돌아왔다.
리장창은 내가 장립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마법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조용한 호텔에서 곧바로 신들의 세상을 찾았다.
누군가와 술 한잔하고 싶은 밤.
황진이 누님이 특별히 룸을 제공했다.
“말해봐.”
“네?”
“고민 있잖아. 500년 묵은 이 누님이 상담해 줄게.”
나는 인정 많은 진이 누님을 천천히 바라봤다.
“……누님, 진짜 실존은 하셨나요?”
“송도삼절이 뻥 같아?”
“누님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들이 워낙 부실해서…….”
“그 잘난 양반들이 나에 대한 자료를 남겨 놨겠어? 나 살던 당시에도 온갖 악담을 진짜처럼 만들어 내던 찌질한 양반네들이 많았어.”
중종 시대에 파란을 일으켰던 황진이 누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갇혀 있던 이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다.
“오늘…… 제거하려던 악인을 끝내 처단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악인이겠네. 동생 선에서 처리가 되지 않았다면 최상급 악신과 대형 조상신의 보호 정도는 받고 있겠네.”
“알고 계셨어요?”
“이곳이 정보통이야. 악신뿐만 아니라 선신 보호를 받는 자들 역시 제거하려 들면 포인트가 엄청나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빛, 음양의 법칙이 그렇거든.”
“착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저는 왜 이렇게 주변에 노리는 자들이 많습니까? 선신들이 저를 보호해 줘야하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황진이.
“아닌가요?”
“동생 진짜 뻔뻔하구나.”
“네?”
“동생이 뭐가 착해? 손에 묻힌 인간들의 피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주변에 바글거리는 여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리고 이성 문제는 남자라면 누리는 평범한 사생활 아닙니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선신들이 보호하는 ‘진짜 착한 인간들’은 세상에서 태어나면서 제 몸에 인 피가 전부인 자들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타인에 대해 악한 말도 안 뱉어. 그들이 진정한 성자야. 물론 이성 문제도 백지처럼 깨끗하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억지스러운 진이 누님의 말에 강하게 반발했다.
“성자들 다 그래. 그리고 저기 위에서 놀고 계신 분들 다 그런 분들이었어.”
손가락으로 하늘 위를 가리키는 진이 누님.
“…….”
진짜 성자들을 두고 한 말이라면 할 말 없다.
“그리고 동생은 공용이잖아. 선신도 악신도 동생을 물들일 수 있어. 그래서 누구든 동생을 죽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동생은 어차피 저승 명부에도 이름이 없는 사람이니까.”
“네???”
“염라대왕님도 양심이 있지. 한 번 죽었는데 또 죽일 수는 없잖아.”
윙크를 하며 싱긋 웃는 진이 누님.
“그럼 전 죽으면…….”
“무조건 신이 될 거야. 살아생전 어떤 포인트를 쌓았느냐에 따라 선신과 악신으로 저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지.”
그 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림음이 기어코 날 신계로 끌어들이려 안달인 거다.
“방금 마셨던 술 이름이 ‘일곱 업장 칵테일’이야.”
“일곱 업장 칵테일요?”
“빨간 맛은 인간으로 살면서 경험한 청춘 시절의 연애 같은 업, 그렇게 뜨겁게 살았던 업을 상징해. 주황색은 창조적이고 매사에 열의를 보였던 업을. 노란색은 부와 권위, 초록은 세상을 향한 평안을 기원했던 업, 파란색은 순수하고 냉정한 업, 남색은 지성의 업, 보라색은 예술성이나 장엄과 위엄 같은 신앙의 업 등을 맛과 색으로 빚은 거야.”
진이 누님의 예상치 못한 강의.
“물론 악신들에게는 부정적인 업장을 전하는 의미로 사용돼. 빨간색은 피와 파멸, 주황은 타락한 정신적 욕망, 노랑은 물질적 탐욕, 초록은…….”
귀에 쏙쏙 박히는 설명.
또로록.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정확한 설명을 들으며 술을 마시자 술의 빛깔이 전하는 의미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중에서 가장 경계할 색이 무슨 색일 거 같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술을 음미하는데 갑자기 던져진 질문.
“그런…… 색도 있습니까?”
“바로, 이 색이야.”
진이 누님의 손가락이 자신의 옷자락을 가리켰다.
“블랙.”
“???”
“모든 것들을 빨아 마셔 죽도 밥도 아니게 만드는 색. 우주의 청소부 같은 블랙홀도 같은 의미야. 인생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어. 그래서 긴 영혼의 삶에서 경력을 단절시켜 버리는 무서운 색이지.”
“그게 무슨…….”
“‘죽은 마음’이라는 뜻이야. 신들도 구제할 수 없는 절망의 깊은 바다. 악신들의 고향이자 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
진이 누님의 섬뜩한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점에서 동생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어.”
“제가요?”
“절망의 바다를 건너 회귀했잖아.”
“아!”
“인간들뿐만 아니라 많은 신들도 과거로 모두 돌아가고 싶어 해.”
“신들도요?”
“과거로 돌아가 다시 그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나도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소풍 같은 인생에서 엄청난 보물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거지. 악신들이 뿌려 놓은 좌절이나 절망, 포기하는 삶에 무릎 꿇지 않고, 내 가까운 주변으로 공평한 신들이 뿌려 놓은 사랑과 헌신, 자비와 용서를 통해 회귀 전엔 몰랐던 선한 포인트를 쌓는 거야. 그게 바로 이곳에 와보니 신들도 부러워한다는 인간들의 삶이고 꿈이야.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삶을 다시 허락 받지 못했어. 회귀는……. 내가 신이 된 이후에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혜택이었다구.”
아쉬움과 결연함이 함께 묻어나는 진이 누님의 한마디한마디.
나의 생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동생은 잘하고 있어. 두 번째 살면서 여전히 목적지까지 가는 게 힘들더라도 쉬지 말고 걸어. 소풍에서는 하이라이트인 보물찾기도 중요하지만 엄마가 싸주신 맛있는 김밥 냄새, 친구들과의 수다, 여행, 군것질, 파란 하늘…… 그 소소한 것들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어. 그걸 꼭 기억하고 잊지 마.”
500년은 그냥 묵히는 게 아니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무심하지 말라는 살아 있는 충고.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답답했던 마음을 온전히 채우는 향기 가득한 신의 충고였다.
진이 누님을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
- 신들의 충고 대가로 엄청난 포인트가 지불되었습니다.
“!!!”
역시! 세상에 믿을 신은…… 아무도 없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