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장. 협상(2).
“이 밤에 어디를 갔을까?”
홍콩 시내가 훤히 보이는 펜트하우스 실내.
홍린은 방금 전해진 보고에 의문이 들었다.
며칠 동안 장립에 관련한 모든 걸 철저하게 조사하고 감시해 왔다.
왕정의 첩인 동시에 정치적 동반자.
지금은 고인이 된 홍린의 아버지는 생전 상해방의 자금담당을 도맡았던 원로였다.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이 있던 시기 상대 정치 라인의 술수로 암살을 당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그 후광은 여전히 홍린을 비추고 있었다.
장택민이 직접 나서서 홍린을 왕정과 엮었다.
이중 안전장치.
홍린은 장택민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던 집안.
그걸 똑똑히 지켜봤던 홍린이었기에 권력 중심에서 멀어질 때 느끼는 공포를 잘 알았다.
그렇게 상해방의 일원이 된 홍린.
아버지를 닮아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자금을 불려나갔다.
자연스레 상해방에서의 위치는 공고해졌다.
왕정의 지위가 오를수록 자연스럽게 홍린의 입김도 세졌다.
왕정이 상무위원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뒤에서 작업한 홍린의 보이지 않는 공작 덕분이었다.
상해방 내의 장장한 경쟁자들을 거대 자금과 여자들을 풀어 순차적으로 무너트렸다.
그렇게 세운 왕정의 힘을 빌려 이번에도 장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었다.
철저하게 감시망을 좁혀오던 차에 장립이 사라졌다.
능력이 남다른 상해방 실력자들의 눈을 따돌렸다.
홍콩 지하철역에서 혼란한 틈을 이용한 듯 사라져 버렸다.
CCTV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했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리장창도 닭 쫒던 개가 됐겠네. 호호호.”
낮보다 밤을 즐기는 홍린.
와인잔을 들고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태자당과 공청단 연합으로 연전연패하던 상황에서 장립이라는 변수가 작용했다.
시작 당시는 판도 변화를 누구도 예상치 못했지만 갈수록 파장이 커졌다.
처음엔 도박꾼인 줄 알았지만 프로 투자자였다.
양광이 관심을 보이며 귀한 외동딸 양소려를 장립 곁에 붙일 정도다.
거기에 이은 왕정의 예고 없던 방문.
첩이긴 해도 엄연히 정치 동반자인 자신에게도 통보 없이 홍콩으로 날아왔다.
심지어 장택민 전 주석이 전하는 메시지까지 가져왔다.
그 자리에서 배짱 좋게 나온 장립.
왕정의 홍콩 출정에 리장창이 기르는 사냥개들까지 따라 붙었다.
그러나 그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내심 속이 후련했다.
“멋있는 남자야.”
홍린은 참으로 오랜만에 남자를 보고 설렜다.
지난 세월 자신의 미모만 보고 끊임없이 날아들던 불나방 같던 남자들.
왕정도 그런 부류의 남자들 중 한명일 뿐이었다.
첩으로 그의 옆에 머물고 있지만 자신의 허락 없이는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장택민의 은밀한 지령을 수행 중인 홍린.
왕정을 최측근에서 감시하기 위해 보낸 또 다른 끈이 바로 홍린이었다.
임무에 충실하게 임하던 홍린에게 장립의 패기 넘치는 모습은 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돈도 제대로 쓸 줄 아는 남자였다.
막판 도박장에서 보였던 그의 행동.
도박사에게 베풀던 배포 큰 선심과 양보.
홍린은 도박장에 틀어박혀 사는 겜블러들의 생리를 잘 알았다.
그날 장립이 그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면 그자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에게 칩을 양보하던 장립.
특히 고위 상무위원에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더불어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유혹의 눈길을 보낸 자신에게도 넘어오지 않았던 남자.
행동 하나하나는 물론 스타일도 호쾌했다.
그뿐만 아니라 외모 역시 빠지지 않았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모든 요소를 다 갖췄다.
남자들이 미인의 뒤를 쫓듯 여자들도 마찬가지.
“홍콩에 사무실을 마련했으니 이제 자주 보겠네…….”
홍린의 삶에 돈과 권력이 차고 넘쳤지만 인생은 무료했다.
왕정의 여자라는 낙인 때문에 대시하는 남자도 없다.
상해방뿐만 아니라 태자당과 다른 조직들도 홍린을 항시 주시했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따로 없었다.
그런 까닭에 빈번하게 카지노에 들러 스트레스를 풀었다.
지루한 홍린의 삶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장립이 등장했다.
식어가던 홍린의 인생에 단비를 뿌리며 자극했다.
“이 누나가 도와줄게. 그러니 오래 버텨. 나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꿀꺽.
와인을 단숨에 비워내는 홍린.
거친 손놀림에 한 방울 붉은 와인이 입가에 매달렸다.
스윽.
긴 혀로 입가를 핥아 남김없이 빨아 넘기는 홍린.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장립의 웃은 얼굴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
‘이건…….’
리장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태산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홍콩은 섬이었다.
사방이 열려있고 오고가는 선박들만 해도 엄청났다.
장태산이 마음만 먹는다면 가능했을 일.
자신만 제거하면 뒤탈이 없을 거라 믿는 듯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장태산은 이미 천지회 측의 척살 대상들 중 최상단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 척살 대상 선별에 있어 핵심 주체는 리장창.
“흐음.”
딸의 애절한 울부짖음에 장태산이 고민하는 게 훤히 보였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목숨처럼 돌보는 성격의 소유자.
그건 행동과 달리 마음이 여리다는 증거였다.
장태산은 자신의 딸 클라라와의 인연도 적지 않았다.
보아하니 장태산은 클라라에 대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 아빠! 빨리 약속해요! 빨리!!!
클라라가 연신 재촉했다.
뒷목이 강한 힘에 의해 붙들려 통증을 수반하며 시큰거렸다.
겨우 입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다.
장태산은 예상했던 대로 제대로 된 무공을 수련한 자였다.
“클라라. 미안해요.”
장태산이 거절의 말을 뱉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한 압력.
“크억!”
참아보려고 했지만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격렬한 신음.
- 아빠아아아아아아아!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는 클라라.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드는 딸에게 향한 복잡한 감정과 미안함에 리장창은 가슴이 미어졌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이대로 죽게 된다면 클라라는 평생 트라우마를 겪게 될 터였다.
결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함부로 동의할 수도 없었다.
장태산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온다면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았다.
“그……만…… 협상……하겠…….”
온힘을 다해 버티며 눈을 감은 채 리장창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스윽.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뒷목에서 손을 거두는 장태산.
목줄을 찬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아빠? 아빠!!!
“클라라. 나 괜찮다…….”
- 흐으윽. 흐흐흑.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보려 애쓰는 클라라.
리장창의 가슴은 한없이 먹먹해졌다.
‘독한 놈!’
딸과의 통화 중에도 거침없이 목숨을 취하려 했던 장태산.
그에 대한 평가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듯했다.
악마보다 더한 독한 냉혈한이 확실했다.
“뭘 협상하겠다는 겁니까?”
장태산이 관심을 보였다.
딸까지 팔아 얻은 기회를 살려야 했다.
“원하는 게 뭔가.”
뒷목을 매만지며 리장창이 물었다.
더없이 불리한 입장에 있지만 그렇다고 요구하는 바를 다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중국몽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혀라도 깨물 것이다.
- 아빠! 그냥 다 해줘요! 다니엘 나쁜 남자 아니에요!
본의 아니게 클라라까지 합류한 3자 협상 자리.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이다.
“그럴 수 없다.”
리장창은 배수의 진을 쳤다.
협상에는 응하지만 결코 끌려갈 수 없었다.
이 위기를 모연하고자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상황을 딸도 함께 확인하고 있었다.
거짓말로 목숨을 부지한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요?”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까지 흘리는 장태산.
“…….”
그런 장태산을 보며 리장창은 생각에 잠겼다.
본인이 장태산이라면……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너를 죽이겠다는 내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굳건한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 아빠!!!
클라라는 융통성 없는 아빠 발언에 다시 비명을 질렀다.
“저도 그런 아량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
- …….
리장창과 클라라, 둘 다 입을 굳게 닫았다.
“5년.”
갑자기 장태산이 내뱉은 5년이라는 기한.
“그게 무슨…….”
“5년 동안 휴전을 제안합니다.”
“뭐라고???”
“싫습니까?”
- 아빠! 승낙해요! 바로 수락해 줘요! 다니엘은 두 말 하는 남자가 아니에요!
클라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리장창을 흔들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요구하는 대로 타협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핵심 협상이었다.
“3년.”
리장창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간.
말없이 리장창을 쳐다보는 장태산.
“인심 좋게 4년으로 하죠.”
장태산은 리장창의 목숨 값을 놓고 흥정했다.
‘뭔가 이상해……. 도대체 꿍꿍이가 뭐란 말인가!’
리장창은 부정하고 싶었지만 장태산의 계획대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가 힘을 제대로 실었다면 단숨에 목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뜻대로 죽였다면 일이 간단했을 텐데 분명 장태산은 힘을 뺀 채 뜸을 들였다.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클라라에게 저도 마음이 빚이 있었을 뿐입니다.”
리장창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 장태산이 말했다.
- 다니엘……. 미안해요.
장태산의 말에 클라라가 울음을 참으며 화답했다.
아빠와 천지회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된다고 했던 다니엘.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아빠가 왜 그를 직접 죽이려 하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클라라가 알고 있는 다니엘은 따듯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 세상에 뛰어든 성자나 다름없었다.
작은 친절에도 무한히 감사할 줄 알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결같이 따뜻했다.
다른 사람의 품으로 떠나는 결혼식에 찾아왔을 만큼 순정적인 남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에게 클라라는 여태 미안함을 품고 지냈다.
“좋다…… 4년으로 하지.”
리장창은 이 악몽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부끄럽고 참담했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저택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앞으로는 저택에서도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홍콩을 떠나 잠시 다른 곳에 둥지를 틀어야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보장하시겠습니까?”
확인에 들어오는 장태산.
“나 리장창이야. 내가 한 말은…….”
“믿을 수가 없죠.”
리장창의 말을 중간에 툭 끊어 버리는 장태산.
“과거에도 저에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천지회 윗선에서 저를 제거하라고 하면 또 그 일을 반복하지 않겠습니까?”
“!!!”
장태산은 다 알고 있었다.
“지단 단주 신분으로 천단, 인단의 요구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까? 만약 회주가 명한다면?”
베일에 감춰져 있는 회주까지 거론하는 장태산.
‘무서운 놈!’
장태산의 치밀함에 리장창은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 제가 보증할 게요!
그때 조용하던 스피커폰을 통해 클라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클라라!”
리장창이 강한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 만약. 약속한 4년 내에 당신이 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다니엘…… 내가 아버지 대신 목숨을 내놓겠어요!
충격적인 클라라의 제안.
“클라라!!!”
리장창이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슴이 찢어질 듯 미어지는 딸의 갸륵한 효심.
“좋습니다. 리장창 당신에 대한 신뢰는 없지만 클라라의 말은 믿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 장태산.
“앞으로 4년 동안 나와 내 가족, 친구들을 상대로 리장창 당신과 천지회의 누군가가 위해를 가한다면…… 클라라는 물론 당신 주변 누구도 평안하지 못할 겁니다.”
확고한 협상 내용에 대한 확인 사살.
“알겠네…….”
리장창은 장태산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딸의 기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오늘의 치욕.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딸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당신이 섬기는 조상과 회주, 천지회, 그리고 딸 클라라의 이름으로 약속하십시오.”
장태산은 마지막까지 몰아붙였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리장창.
“……나 리장창은 중국을 보살피는 조상님들과 천지회의 회주님……. 그리고 사랑하는 딸 클라라의 이름으로 장태산과 4년간 휴전하는 걸 확약하는 바이다!”
으르렁거리듯 한마디 한마디를 똑똑하게 내뱉는 리장창.
번쩍! 콰과과과과과과과광!
기다렸다는 강하게 내리꽂히는 낙뢰와 이어지는 천둥소리.
리장창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내뱉은 이 말 때문에 중국을 보살피는 그들의 조상신의 분노가 얼마나 커졌는지…….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