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6장. 협상. (832/1,284)

836장. 협상.

“아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깬 여인.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새카만 어둠이 늙은 아빠를 덮치는 꿈을 꿨다.

넓게 퍼져 덮쳐오는 새카만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거침없이 몰아쳐온 어둠이 끝내 아빠를 삼켜버렸다.

어둠 속으로 잠기며 자신을 바라보는 처연한 눈빛이 꿈에서 깬 뒤에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꿈에서 자신은 아빠를 돕기는커녕 관망할 수밖에 없는 제3자의 시선이었다.

감정적으로는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뻗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벌어지는 상황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

끔찍하게 느껴지는 고통 속을 견디지 못하고 꿈에서 깨 벌떡 일어난 클라라.

콰과과과광.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저택을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쏟아지는 빗소리가 스산하기만 했다.

넓은 침대는 오늘따라 무척 허전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홀로 방에서 재웠다.

동양과 다른 서양식 육아 방식.

남편은 한 달째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과거와 달리 남편의 기운도 많이 변했다.

최근 들어서는 무술을 자주 수련하는지 몸에 타박상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프랑스에 오면 외가 쪽 귀족들과 어울렸다.

의지할 만한 누구도 주변에 없는 이 밤.

막 꿈에서 깬 클라라는 큰 저택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스산함마저 느꼈다.

띠릿 띠릿.

그때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스마트폰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문자가 왔다는 신호.

“이 밤에 누가…….”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깬 깊은 새벽 시간.

늦은 밤 온 연락이 예의 없다는 생각에 클라라의 얼굴이 굳었다.

스르릇.

침대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띠릭.

잠금을 해제하고 문자 내용을 살폈다.

“!!!”

간단한 문장.

- 클라라. 사랑한다.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렴.

내용은 크게 문제될 만한 게 없었다.

평소에도 자주 오는 간단한 문자였다.

이상한 건 분명히 시차를 알고 있는 아빠가 이 시간에 이런 문자를 보냈다는 것.

“아빠…….”

평소와 다른 시간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꿈에 이어 아빠의 문자까지.

클라라의 목이 잠기며 목소리가 갈라졌다.

밝은 곳으로 나오지 못한 어둠 속의 정치인인 아빠.

지금까지도 태자당과 천지회를 이끌며 수없는 위기를 몸소 겪었다.

자신 또한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로 몇 번의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중국 정치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특히 공산당의 일 처리는 음험하고 독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를 통해 들어왔던 수많은 이야기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사라져도 절대 그 뒤를 밝히려 들지 말라 했다.

“불길해.”

연거푸 떨어지는 낙뢰와 쏟아지는 빗소리가 음울한 장송곡처럼 클라라를 엄습했다.

굳이 프랑스로 자신을 시집보낸 이유 중에 안전 보장도 있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클라라도 태자당과 상해방의 악연 정도는 잘 알았다.

이곳에 묻혀 지내도 홍콩과 중국에서 흘러들어오는 소식은 종종 접했다.

파르르.

손을 심하게 떠는 클라라.

다급하게 번호를 눌러 통화를 시도했다.

큰 사건이 일어난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뚜우우우우우우 뚜우우우우우우.

유난히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받지 않는 아빠.

“도대체 무슨 일이야!!!”

***

- 레벨이 낮습니다.

- 대상을 저승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 중국 조상신의 보호를 받는 자입니다.

- 악신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 카르마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

속수무책으로 연달아 들려오는 알림음에 정신이 멍해졌다.

홍콩에 온 가장 큰 이유가 리장창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놔두면 자신은 물론 주변인들 모두를 계속 위험에 처하게 할 위인이었다.

리장창은 포기를 모르는 자였다.

중국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릴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밖에 시립해 있던 경호원들은 모두 마법으로 얌전히 잠재웠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라 행동에 제약이 덜해 더 편했다.

전혀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던 리장창의 저택을 습격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몰아온 공포를 리장창에게 제대로 선물했다.

하지만 그 이상 진도를 빼지 못했다.

내가 혼자 상대하기에 좀 벅찬 최상위 중국 조상신들.

악신의 보호 하나도 다소 벅찬데 그 이상의 상대가 나타났다.

중금리를 제안하며 유혹하는 알림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건 포인트가 한참 모자라다는 의미의 다른 액션.

“???”

눈을 감고 겸허히 죽음을 맞이하려던 리장창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실눈을 뜨더니 천천히 눈을 더 크게 뜨는 리장창.

머리가 비상한 자이니 지금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 챘을 터.

순간 어쩔 수 없는 기로에 섰다.

이 사태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속으로 이가 갈렸다.

제거 대상 0순위가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니.

억울했다.

리장창은 보란 듯이 나를 죽이겠다고 살수를 보내고 별짓을 다했는데 난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회귀한 자에게 한해 보이지 않는 제약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두 번째 로 맞닥뜨린 적의 제거 실패 상황.

신들의 보호를 받는 자들은 이래서 문제다.

더 당겨야 할 카르마 포인트.

이건 리장창과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상신과 조상신들의 전쟁이나 진배없었다.

띠리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리.

스마트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 봐도 누가 전화를 한 건지 알만했다.

“받아보십시오.”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내가 타의에 의해 죽이지 못하는 상황임을 리장창이 알아차려선 안 된다.

저세상 신들의 세계의 보이지 않는 카르마 법칙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잔인하군.”

나를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리장창.

“통화, 원하던 것 아니었습니까?”

냉정함을 유지한 채 차갑게 응수했다.

고도의 심리전이 벌어졌다.

일단 사태를 정리하며 나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해야 했다.

때마침 운 좋게 걸려온 전화.

스윽.

스마트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을 켰다.

- 아빠!!!

몹시 당황한 클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들었던 것 같은 착각이 일 만큼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클라라 특유의 음색이 잠궈 둔 기억 창고에서 곧바로 소환됐다.

마지막 이별까지 모두 잘 정리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어느새 가슴 한쪽이 시큰시큰했다.

내 손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려던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전화를 한 클라라.

“클라라…….”

냉혈한 리장창도 딸의 전화에 평범한 중년의 아버지 모습을 여실히 보였다.

- 이 문자 뭐에요? 무슨 일 있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전하는 신변 걱정.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심이 머나먼 타국에서 그대로 전달됐다.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잇는 리장창.

- 그런데 이 문자 내용은…….

“클라라. 언제나 아빠는 너를 사랑했다.”

리장창은 아직도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었다.

순간 번뜩 스치는 생각.

- 아빠! 도대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클라라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

또 다시 나의 눈치를 살피는 리장창.

클라라와의 통화가 길어질수록 나의 가슴을 후벼 파듯 더 아플 거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 누가 옆에 있죠? 그렇죠?

클라라가 눈치 챘다.

“…….”

나를 보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리장창.

상황은 생각했던 대로 착착 진행됐다.

- 다니엘이…… 찾아 왔나요…….

클라라, 역시 똑똑하다.

나의 방문을 정확하게 짚어 낸 그녀.

“아니! 그게 아니라…….”

제대로 당황한 리장창.

클라라의 정확한 질문에 허둥거리는 리장창의 모습이 우스웠다.

뒤에서는 온갖 공작을 다 쓰며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던 자.

딸과의 통화에서는 전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 하아아.

클라라의 길고 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녀도 아버지가 어떤 짓을 벌여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복잡한 심정이 전화기를 통해 그대로 전해져왔다.

- 다니엘…….

그녀가 확인되지 않은 나의 방문을 믿고 이름을 불렀다.

끝없이 가라앉은 목소리.

- 당신이 찾아온 거 알아요. 대답해 줘요.

홍콩에서 있었던 그녀와의 데이트가 문득 떠올랐다.

그날도 역시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한쪽 어깨를 적셔가며 홍콩 거리를 걸었다.

추억의 흔적이 옅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지만 추억은 과거 그 시간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 다니엘…….

“오랜만입니다.”

감정을 제거한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흐른 만큼, 추억도 그리움도 제법 잊혀졌다.

이제는 제대로 클라라를 이용할 때.

- 잘 지냈죠?

복잡한 의미가 담긴 물음.

“당신 덕분에.”

- 다행이에요.

클라라는 그때처럼 날 대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머문 채 통화를 하는 그녀의 머릿속은 터질 듯 복잡하리란 걸 잘 알았다.

자신의 아빠 목숨을 내가 쥐고 있었다.

최대한 내 기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리장창은 클라라까지 지금 상황에 끌어들인 나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죽는 순간까지 딸에게만큼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아비의 심정.

무시했다.

콰악.

대신 리장창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죽일 수는 없었지만 통제는 가능했다.

“크으!”

리장창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 아빠아아아아!

클라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분위기는 완벽하게 무르익어갔다.

리장창은 고통에, 클라라는 보이지 않는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두 사람에게 악마의 화신이 됐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 다니엘! 제발 부탁이에요! 아빠를…… 살려줘요!!!

클라라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울며 애원했다.

“클라라…… 안 돼! 이놈에게…… 크아아악!”

가볍게 내공을 실어 리장창에게 좀 더 고통을 가했다.

- 포인트가 대폭 차감 됐습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크게 빠져나간 포인트.

이대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 다니엘! 멈춰줘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게요!!!

클라라는 나만큼이나 다급해졌다.

“크으으으.”

얼굴이 험상 굳게 일그러지는 리장창.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됐다.

“난. 당신 아버지 리장창을 믿을 수 없습니다.”

대신 여지를 남겼다.

- 아빠! 어서 다니엘에게 말해요! 뭐든지 하겠다고 약속해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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