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장 진검승부.
“!!!”
양소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같은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상무위원 왕정이 급작스럽게 나타난 것만 해도 대단했다.
중국 고위직 공무원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가 상무위원 자리였다.
그가 한 번 움직이면 경호원 수십 명이 함께 이동할 정도다.
각 파벌을 대표하는 수장들인 만큼 행동 하나가 미치는 파장이 컸다.
때문에 왕정은 계파 보스들의 허락이 있을 때만 정치적으로 움직였고, 북경과 상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마카오에 나타났다.
처음 연락 받았을 때부터 상식적이지는 않았다.
왕정이 홍린을 만나는 일도 일 년에 겨우 몇 번이 전부.
애첩과의 만남도 몇 차례 갖지 않는 왕정이 장립을 직접 찾아왔다.
‘도대체 왜?’
의문은 꼬리를 물고 부표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카지노를 방문할 때부터 장립에게 VIP들을 소개할 생각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양소려의 계획과 달리, 장립은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며 VIP룸에 입성했다.
홍린을 비롯해 홍콩과 마카오 상류층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 그 자리에서 장립의 신분을 캐려 했던 계획.
뭇 남성들을 테스트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인 도박과 여자.
양소려가 세운 계획과 예상은 곳곳에서 빗겨나갔다.
더욱 놀라운 건 장립이 도신급 재능을 겸비했다는 사실.
내로라하는 프로갬블러들이 장립과의 게임에서 다 털렸다.
게임에서 쓸어 담은 수익 중 일부를 아무 조건 없이 도박사에게 떼어주기도 했다.
마치 물욕을 뛰어넘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계속된 장립의 돌발 행동은 양소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
홍린의 끈질긴 유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립의 그런 태도는 자신에게도 똑같았다.
몇 차례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양소려가 지켜본 장립은 수수께끼 같은 사내였다.
담도 크고 배포도 좋았다.
중국인들을 떠나 외국 경제인이나 외교관들도 왕정을 한 번 만나보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그런 왕정 앞에서도 장립은 담담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장립은 왕정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술을 마셨다.
왕정이 혹할 만한 아부성 발언도 일체 뱉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런 걱정이 없어보였다.
“가가……. 정말이에요?”
홍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왕정의 애첩인 그녀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주석.
왕정과 상해방의 차명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홍린이지만 장택민 주석은 가벼운 만남도 허락지 않았다.
시진핑이 현 황제라면 태상황제의 자리는 여전히 장택민이 주인이었다.
그 장택민이 장립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남자가 뭐라고…….’
홍린은 놀란 눈으로 장립을 천천히 뜯어봤다.
키가 크고 얼굴이 꽤나 잘생긴 정체 모를 사내.
도박판에서 보였던 그의 배짱은 놀랍고 대단했다.
까탈스러운 양소려가 직접 동행했다면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 큰 이슈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하긴 왕정이 직접 장립을 만나러 걸음했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주석의 만남 요청까지.
‘흐음.’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홍린.
얼굴 하나만 믿고 왕정의 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기와 달리 홍린은 북경대 출신의 엘리트 수재였다.
마카오 도박장에 박혀 가끔 쌓인 스트레스를 풀며 시간을 보내지만, 주업은 홍콩과 마카오 인근에 집중돼 있는 사업장의 자금 불리기.
세력도 돈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다소 태자당에 밀리고 있지만, 상해방은 장택민 주석 시절 국가 발전 기회를 이용해 엄청나 부를 일궜다.
상장되어 있는 민간 기업들 상당수가 그런 상해방과 연관이 있었다.
공청단이 배 아파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태자당과 손을 잡아야 겨우 상해방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홍린은 그곳에서 상해방의 자금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조차 고민스러운 시선으로 장립을 바라봤다.
만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단히 신비로운 존재였다.
홍린의 시선을 받는 그가 왕정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
중국의 조상신들? 그들이 왜?
나를 호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결코 쉽게 할 수 없었을 제안이다.
중국과 나는 어떤 식으로든 동행할 수 없는 관계였다.
꿈속 할배가 절대 고개 쳐들지 못하도록 박살내라고 하셨다.
그런 임무를 띤 나에게 중국 조상신 쪽에서 딜이 들어온 것.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 태호(太昊)와 헌원(軒轅) 신농(神農)의 일족은 다릅니다.
“!!!”
머릿속에 울리는 알림음의 부연 설명.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삼황오제에 관해서는 나도 좀 알고 있다.
하도나 사기, 십팔사략 같은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들.
구전되어 오던 것들을 중국 역사가들이 뻥을 덧입혀 그럴싸하게 그려냈다.
역사서란 것에 기록된 내용들도 다 제각각.
그런 역사서를 두고 알림음은 나에게 ‘구라’가 아니라 ‘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 알림음이 지금까지 거짓말 하는 걸 못 봤다.
어쩌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한족으로 거의 다 통합됐지만 중국 민족들은 과거 수백, 수천이 넘을 종족들이 섞여 살았을 터.
그 많은 민족의 조상신이 같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 생각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중국을 다스리는 자는 시진핑.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진정한 권력자는 장택민.
천지회와 상해방은 결을 달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회귀한 인생이지만 중국의 현실 정치판 경험은 과거에도 지금도 처음이다.
조각 뉴스로 접하던 짧은 정보들을 수합해 지금의 거대한 판을 샅샅이 살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핵심은 심플했다.
산 아래서 보는 풍경과 정상에서 보는 풍경의 차이 정도로 와 닿는 판.
대신 궁금한 게 있었다.
장택민이 왜, 내가 선택해 변장한 장립을 꼭 찍은 건지 말이다.
“의외입니다.”
감개무량함을 대신할 만한 수사여구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온갖 편모술수를 써서 상무위원에 오른 왕정에게 먹힐 리도 없었다.
진검승부.
“나도 의외야.”
왕정도 인정했다.
“그러게요……. 저도 의외네요.”
홍린도 자연스럽게 참전했다.
양소려는 생각이 많은 듯 말을 아꼈다.
왕정과 이 자리에 함께할 정도라면 양소려 또한 평범한 신분은 아닐 터.
상해방에서의 양광이 갖는 입지를 짐작할 만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오늘 홍콩에 처음 입국했습니다. 유럽에서 쭉 살다 인종차별로……. 미국에서 공부했고……. 우연히 보물을 획득해 홍콩이 시세가 높다기에 그것들을 팔러왔을 뿐입니다.”
“세관에 신고도 안 됐더군.”
왕정 정도 위치면 나에 대해 이미 다 파악했을 것이다.
“홍콩에는 비밀 루트들이 많더군요.”
그 정도 대비는 언제나 철저했다.
“정체가 뭔가?”
또 다시 정통으로 검이 날아들었다.
다른 자들 같았다면 대처하기 힘들었을 빠르고 강한 일격.
눈빛은 고요하고 차분했지만 기세는 매우 매서웠다.
말 한마디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장착한 정치 9단.
“돈 냄새 맡고 왔습니다.”
“보석과 도박으로?”
가볍게 웃으며 되묻는 왕정.
중국 정치권에서 그를 부르는 별명이 매화검이었다.
매화 같은 웃음 뒤에 감춰진 날카로운 검 같은 직관을 쓰는 자.
언제 어디서 당했는지도 알지도 못한 채 정적들이 매화검에 쓰러졌다.
적들뿐만 아니라 상해방 동료들도 마찬가지.
시진핑이 휘두른 칼날에 모두가 쓰러져갈 때 왕정이 살아남은 진정한 이유다.
죽음의 목전에서도 적의 목에 한 방을 찌를 수 있는 독기와 무기를 품었다.
장택민이 고심으로 키워낸 고수인 셈이다.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뭐라고?”
가볍게 건넨 대답에 왕정이 어이가 없는 듯 물었다.
아공간에 쌓인 보석만 쫙 풀어도 당장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정도는 된다.
황금? 잠깐 이계 가서 귀족들 창고 몇 곳 털면 그만이다.
드워프들이 쌓아 놓은 금괴만도 양이 엄청나다.
도박도 마찬가지다.
마법을 사용하면 10,000전 10,000승.
눈 감고도 몇 십억 달러 터는 건 일도 아니다.
“가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립은 지금껏 내가 본 갬블러들 중 단연 최고예요.”
홍린이 거들었다.
“보석도 최상품이죠.”
양소려도 도왔다.
“자네, 내가 쌓아 놓은 창고에 얼마 정도의 금괴와 달러가 있을 것 같나.”
왕정, 꾼답지 못하게 유치했다.
지금 나와 돈으로 비벼보겠다고?
“1,000억 달러쯤 되십니까?”
졸부의 말투를 사용했다.
한화로 110조 정도 되는 금액.
“…….”
왕정이 대충 던진 내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가볍게 한 반격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그 정도는 돈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군.”
“재물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기세로 기를 눌러 놓자 안경 너머로 나를 다시 찬찬히 살피는 그.
“도인(道人)인가?”
눈치가 제법이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날린 가벼운 쨉.
“이 풍진 세상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다 각자의 삶에서 도(道)를 수련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구나 할 판이다.
중국 권력 서열 7위 안에 드는 상무위원을 상대로 말 따먹기를 하는 겁 없는 중생.
양소려가 얼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봤다.
홍린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
“재밌군.”
왕정이 잔을 들었다.
또로로록.
조용히 왕정의 잔에 술을 채우는 홍린.
나도 잔을 내밀었다.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잔을 채우는 양소려.
“대인의 가시는 모든 길이 평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잔을 들며 듣기 좋은 덕담을 건넸다.
“하하하. 고맙네.”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웃는 왕정.
그와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그와 나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두 여인은 알아챘다.
실수로라도 끼어들지 않았다.
“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술잔을 내려놓고 왕정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뭘 말인가?”
“홍콩에서 판을 벌릴 생각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삼세의 인연인데, 왕정 대인께서 힘을 써 주시면 후에 잊지 않겠습니다.”
“!!!”
양소려의 눈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상무위원을 조력자로 삼으려는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것이다.
“도와주지.”
왕정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택민으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고 왔음이 확실했다.
“주석님께 감사하다 전해 주십시오.”
“알겠네.”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 차르와도 맞먹는 나다.
일개 중국 상무위원한테 쫄릴 내가 아니었다.
전 주석 장택민도 마찬가지.
권좌에서 쫓겨난 용은 욕망의 끝을 붙들고 있는 못된 이무기 정도로 보였다.
자연스럽게 홍콩 사업장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왕정도 나와의 대화에서 건질 만한 건더기가 있어야 보고하기가 편할 것이다.
현직 상무위원이지만 냉정하게 장택민의 하수인.
윗선들의 보이지 않는 장기판에서 그는 말과 같았다.
“아! 그리고…….”
말을 살짝 끊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이미 대화의 주도권은 나에게 와 있었다.
상대가 진검승부로 나왔지만 격이 달랐다.
난 문파의 장문인급이고 왕정은 장로급.
“주석께 손을 잡겠다고 말씀드려주십시오.”
“???”
홍린과 양소려는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반면 왕정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찌른 확실한 한 방.
장택민 주석이 듣기 원하는 진정한 답을 주었다.
그것도 제안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말이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올 여름 친황도에 절 초청해 주십시오.”
“뭐라고! 처, 친황도에!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