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장. VIP.
“알아보셨어요?”
- 그 녀석 말대로다. 이름은 장 립. 프랑스 화교 출신에 미국 예일대에서 수학했다.
“그래요?”
- 다만 수상한 게 몇 가지 있다.
“뭔데요?”
- 유년시절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고아가 됐다. 3년 전 돌봐주던 할머니가 죽으면서 소식이 끊겼다. 미국 정보부에서 일한다는 소문도 있고…….
“아무리 정보부라고 해도. 그런 레드 다이아몬드를 쉽게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거예요.”
- 그렇지.
“재밌는 남자 같아요.”
- 지금 뭐 하고 있니?
“도박요.”
양소려는 CCTV를 통해 장립을 지켜보고 있었다.
베네시스의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비밀 공간.
양씨 가문은 호텔에 중요한 투자자였다. 그 일원이기에 가능한 일.
- 솜씨는?
“도신급이에요.”
- 도신?
“네.”
몇 판 돌아가지 않았지만 양소려는 장립의 실력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패를 이미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게임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무리 운 좋은 초심자의 행운이라 생각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게임 룰에 대해 이미 숙지하고 있는 데다 게임에 임하는 행동도 자연스러웠다.
한 판에 수십만 홍콩 달러가 움직였지만 장립은 시종일관 태연했다.
- 따로 알아낸 정보는?
양광은 누구보다 딸을 믿었다.
이미 어린 시절 상해방의 선택을 받은 아이였다.
명성 있는 고수 밑에서 무공뿐만 아니라 필요한 여러 가지 특수 훈련까지 받아 능력을 키웠다.
“선수네요.”
- 응?
양소려의 시선은 장립과 그 옆에 있는 미모의 여인에게 꽂혀있었다.
카지노에서 붙인 직원인데 그녀는 장립에게 홀딱 반한 것 같았다.
간간이 그 여인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립.
스윽.
양소려는 탁자 위에 놓아둔 수표를 집어 들었다.
판돈으로 던져준 고액권.
이것만 봐도 돈을 쓸 줄 아는 남자라는 건 분명했다.
“‘적의 적은 친구’. 이 말을 파파는 어떻게 해석하세요?”
- 적의 적이라……. 흐음.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에 양광은 신음을 흘렸다.
양광 입장에서 지금 적이라 명명할 수 있는 존재는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태자당 놈들이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상해방을 절단 내고 있었다.
“일단 우리의 적은 아닌 거 같아요.”
- 돈 많은 수상한 놈이 특정 목적까지 품고 있다니……. 젊디젊은 친구 꿍꿍이가 제대로야.
양광은 은연중에 장립을 인정했다.
자신의 정체를 파악한 후 모든 걸 알고 찾아왔다고 말하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태연히 도박까지 즐겼다.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네. 파파.”
통화를 끝낸 양소려.
스르륵.
다리를 바꿔 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장립……. 당신 뭐죠?”
다시 CCTV 속에 비친 장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하오하오!”
“오우! 지져스 크라잉!”
“어머머머머 도대체 몇 판이야?”
2층 바카라 판이 벌어지는 준 VIP룸에서 괴성에 가까운 탄성이 터졌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준 도박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한 남자가 대놓고 칩을 강탈하고 있었다.
“2층 바카라 3번 방 담당이 누구지?”
카지노 내부의 모든 상황을 감시하고 있는 보안센터에서 센터장이자 총괄 매니저인 에릭이 모니터를 보며 인상을 썼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다 긴급 호출을 받았다.
“크리스티나입니다.”
“오늘은 코브라 같은 크리스티나도 살쾡이한테 물려버렸군.”
매니저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수당으로 일당이 정산됐다.
손님이 돈을 많이 잃을수록 매니저의 수당은 늘어났다.
그러니 오늘 게임으로 크리스티나는 한 달치 수당을 날릴 것 같았다.
“샤킹 흔적은?”
“이상 전자파 사용이나 행동은 없습니다. 총 30판에 패한 건 딱 세 번 있었습니다.”
“출입 경력은?”
“마카오에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비기너스 럭인가?”
으레 초심자의 행운을 언급하는 에릭.
가끔 도신의 축복을 받은 초심자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행운은 오늘과 같은 경우처럼 오래가지 않는다.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도박판.
“그래도 너무 심합니다. 벌써 2300만 달러를 땄습니다.”
홍콩 달러 기준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엄청난 판돈을 획득했다.
“리커창은?”
“2000만 달러를 날렸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제대로 멍청한 짓을 했군.”
“5000만 달러를 차용했습니다.”
에릭은 모니터를 지켜보며 고민에 빠졌다.
리커창은 양꼬치 하나를 판매해 엄청난 부를 이룬 중국의 신흥 졸부였다.
그는 매사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드는 버릇이 있었다.
봉이나 마찬가지인 리커창의 돈을 따가는 건 좋았지만 그 돈을 정체 모를 자가 다 빨아들이고 있었다.
“애송이는 아닌데…….”
“프로 맞습니다.”
저 정도 게임 플레이 수준이면 결코 애송이가 아니었다.
판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손님을 VIP실로 모시라고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진짜 실력 한 번 보자고.”
에릭은 연승에 또 다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젊은 남자를 예리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꽤나 잘생긴 동양인.
그를 VIP실로 불러들여 코를 납작하게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
슬슬 바카라 게임이 지겨워지려 하고 있다.
몇 차례 돌렸지만 판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를 마카오, 그리고 도박판.
중국 정치 세력들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을 게 자명했다.
부패한 그들에게 흘러들어 갈 게 뻔한 수익에 구멍을 내고 싶었다.
바카라에서 세 번 졌다.
같이 게임을 시작한 중국인이 눈치를 보다 나를 따라 움직였다.
중국인은 처음에 날 멸시하던 눈빛을 거두고 살살 사람 좋게 웃기 시작했다.
게임이 반복되자 자신의 이름은 리커창이라고 소개했다.
세련되지 못한 태도에서 양아치 냄새가 났다.
놈이 눈치를 보며 나를 좇아 배팅할 때마다 패하는 쪽에 판돈을 걸었다.
리커창은 그때마다 왕창 돈을 날렸다.
그 뒤부터는 다시 나에게 분노의 시선을 보내며 연신 입을 씰룩거렸다.
중국 내 뒷골목에서 맞닥뜨렸다면 당장 복부에 사시미를 꽂았을 분위기였다.
눈치 빠른 이들은 흔들리지 않고 내 배팅에 합류했다.
예상대로 돈을 수북이 쓸어 담았다.
그럴수록 딜러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리커창에게서 벌어들인 수익이 모조리 나에게 빨리고 있었다.
그 틈에도 나는 때를 기다렸다.
이대로 순순히 나를 내보내 줄 리가 없기 때문.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이 정도 실력이 확인되면 은밀한 곳으로 따로 초대한다.
“행운이 대단하십니다. 바카라를 수호하는 아홉 신들의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긋한 여인의 목소리.
잠시 나갔다 들어온 크리스티나였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또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과 마주하게 되면 이제는 그녀에게 항복하게 될 것 같았다.
마법 해제.
마법을 멈췄다.
저서클 마법이라 소모되는 마력 양은 아주 미미했다.
“아직 아홉 신들의 축복을 입에 올리기에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분들이 보시기에 양이 찰까 의심스럽습니다.”
은근히 더 큰 판으로 보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신들의 탁자에 합류하고 싶으시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크리스티나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야 직성이 풀리는 팜므파탈 같았다.
욕망을 끌어 오르게 만드는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고급 향수 냄새가 살살 코 속으로 흘러들었다.
“크리스티나.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
벌건 눈을 한 리커창은 크리스티나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5000만 홍콩 달러를 차용한 뒤 다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럼요. 오늘 두 분을 위해 재신을 맞이하실 재단을 만들어 놨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새하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눈도 입도 웃고 있었지만 말투에 담겨 있는 묘한 차가움.
꼭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수당으로 먹고 사는 그녀의 입장에서 나는 저주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래요?”
그럼에도 흥미를 보이는 척했다.
“바로 가지.”
빵빵하게 돈을 빌린 리커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티나가 나를 바라봤다.
동의 의사를 묻는 눈빛.
“재신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군요.”
물론 콜!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크리스티나가 요염한 자태로 먼저 걸음을 옮기며 앞장섰다.
꿀꺽.
남자로서의 욕망밖에 없는 사람처럼 리커창이 침을 삼켰다.
우리는 3층으로 이동했다.
2층과 달리 경비가 눈에 띌 만큼 삼엄했다.
건장한 체격의 보안요원들 몇 명이 3층 입구에 서 있었다.
말로만 듣던 VIP들을 위한 도박판.
온갖 불법과 함께 조폭들까지 연루되어 있는 불법 도박판이 벌어지는 곳.
리커창 같은 졸부들을 상대로 빨대를 꽂는 2층 정킷방과는 입구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이곳입니다.”
크리스티나가 혹할 만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
오! 대박!
진심으로 감탄했다.
베네시스 호텔 카지노는 다른 유명한 곳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눈부시게 화려했다.
그런데 VIP실은 차원이 또 달랐다.
세계 명화가 분명한 대가 작품들이 넓은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검은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과 대형 공기청정기가 가동되는 듯 방 안은 온도와 습기까지 적당하게 유지됐다.
부드러운 가죽에 적당하게 탄성이 있어 보이는 붉은 가죽 의자들이 중앙 테이블을 중심으로 놓여 있었다.
게임 테이블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도우미들이 샴페인과 음료수 따위를 들고 서빙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우! 이 판도 난 패배자가 됐네.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캉, 겨우 5000만 달러 가지고 왜 이래?”
“래리, 오늘 행운의 여신은 네 차지인 것 같아.”
딜러를 뺀 일곱 명의 남녀가 ‘텍사스 홀덤’이라는 카드 게임 중에 있었다.
“새로운 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내실에 있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파바밧.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잘 부탁합니다. 흐흐흐.”
리커창이 호구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한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 틈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 눈에 띄었다.
새카만 어둠의 오라를 풍기는 자들.
도신의 축복을 받은 신의 하수인들이 분명했다.
저들은 카지노가 섭외한 선수들일 게 확실했다.
“다들 재밌게 놀아.”
“잘 가 캉. 다음에 보자고.”
중앙에 앉아 게임을 하던 두 사람이 빠졌다.
“마침 두 자리가 비었군요.”
크리스티나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가리켰다.
“실례합니다.”
빈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정통 북경 중국어를 구사했다.
테이블의 중앙.
맞은편의 흰머리가 많은 중후한 인상의 딜러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칩을 교환해드리겠습니다. VIP 전용칩으로는 개당 10만 달러 실버칩과 100만 달러 골드칩을 사용합니다.”
판돈이 상당히 셌다.
“…….”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 모두 나와 리커창이 갖고 있는 판돈을 궁금해 했다.
한판에 최하 1000만 홍콩 달러가 휙휙 오갔다.
이럴수록 판돈이 무척 중요했다.
입맛이 돌았다.
제대로 된 판을 기다렸다.
조금 전 2층은 맛보기.
도박 좀 했다 하는 프로 도박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감정에 흔들리지 말라.
판돈은 중요치 않다, 운이 중요할 뿐.
그리고 도박판의 영원한 승자는 없다.
도박판 선배들의 교훈들을 싹 무시했다.
“크리스티나. 칩으로 교환 부탁합니다.”
지갑에서 1000만 홍콩 달러 다섯 장을 꺼내 건넸다.
바로 판돈을 키웠다.
어차피 여기 있는 돈 모두 내 것이 될 운명.
사람들에게 던질 미끼는 싱싱하고 맛 좋은 게 최고다.
파바밧!
판돈이 커지자 사방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번뜩였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웃고 있지만 이 판이 돌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두 다 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 판돈보다 남의 판돈이 더 커 보이는 법.
특히 상대의 판돈이 커질수록 욕망의 게이지 또한 더 거세게 타오를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5000만 달러 수표를 보자 눈빛이 달라졌다.
“나도 골드칩으로!”
리커창도 호기롭게 외쳤다.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골드칩을 바꿔왔다.
수표는 대기 중인 직원이 바로 조회를 끝냈다.
“크리스티나, 당신의 행운을 사겠습니다.”
기분 좋게 100만 달러짜리 칩 하나를 크리스티나에게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해하며 진심으로 놀라는 크리스티나.
아무리 대단한 갑부라 해도 매니저나 딜러에게 100만 홍콩 달러를 팁으로 주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10만 달러짜리 칩이 그나마 큰 금액일 정도.
“나, 홍린이라고 해요. 미남이 돈도 많네요. 어디 살아요? 북경? 홍콩?”
홍린이라는 매끈한 중국 여인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눈에 색기가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코 정실은 될 수 없고 좋게 봐도 후처 관상.
“빨리 좀 시작합시다!”
내가 여인의 환심을 사자 리커창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다른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 돈을 물 쓰듯 써온 리커창도 VIP룸은 처음인 것 같았다.
돈만 많다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님이 확실했다.
사실 정킷방에 드나드는 손님들과도 격조가 달랐다.
리커창은 외모나 말투에서나 모두 싸구려 냄새가 났다.
“다들 솜씨 좀 볼까요?”
어둠의 신이 보호하는 게 분명한 자가 이를 드러내며 환영인사를 대신했다.
“래리. 이번에는 살살 부탁해요.”
“린의 부탁이라면 그래야죠.”
“래리는 매너가 좋다니까. 호호호.”
홍린이 받아쳤다.
판돈이 큰 게임이었다.
이 판의 승자는 당분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딜러가 게임 시작을 알렸다.
스슥.
딜러는 조용히 카드 두 장씩을 정확하고 빠르게 플레이어들에게 날렸다.
침묵에 잠긴 일곱 명의 겜블러.
각자의 패를 아주 조심스럽게 살폈다.
나도 무표정한 얼굴로 본격적인 게임에 돌입했다.
마법은 아직 개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성큼 임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온 마음을 다해 가슴을 활짝 열고…….
그녀를 뜨겁게 받아들였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