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장. 참 교육(2).
“엄마. 오빠한테 전화해 봐. 진짜 오는지 말이야.”
“오늘따라 왜 그래? 너 오빠한테 잘못한 거 있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온다고 하니까…….”
“……그러게 말이다.”
황라현이 유난히 안절부절못하는 임아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이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의 임준형이 전화로 임아현을 찾았다.
본가에 있다고 하니 바로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솔직하게 말해. 언니 무슨 사고 쳤어?”
늦게 퇴근해 이제 화장을 지우고 나타난 임윤아가 임아현을 추궁했다.
“임윤아. 너 그 말투 고쳐라. 언니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존경 받게끔 살아봐. 그럼 큰언니처럼 대해 줄게.”
“이게!”
“둘 다 그만 좀 해. 싸우려면 둘 다 나가.”
황라현은 두 사람의 다툼에 고개를 내저었다.
남편이 쓰러진 후 집안에 기강이 무너져 버렸다.
공부만 하던 막내딸도 변했다.
어렸을 때부터 숫기가 없어 두 언니에게 늘 치이던 막내 딸.
요 몇 년 사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아주 여장부가 다 됐다.
그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다만 샘이 많은 임아현의 견제가 시작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이런 날을 대비해 일찍부터 가업 분배에 들어갔지만 남편이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닥친 시련.
그의 빈자리가 컸다.
“휴우.”
황라현이 생각할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최고 의료진으로부터 최신 뷰티 코스를 밟고 있지만 피부가 까칠해져 예전 같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요즘 그걸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부회장님 들어오십니다.”
집사가 거실에 모여 있던 황라현의 가족들에게 임준형의 귀가를 알려왔다.
스르륵.
현관 자동문이 열렸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임준형.
술에 취한 듯 얼굴은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머님, 저 왔습니다.”
단정하게 자세를 잡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임준형.
“많이 마셨니?”
“아닙니다.”
“황 집사. 꿀물 부탁해요.”
“네. 사모님.”
간단히 인사가 오갔다.
“오빠. 장태산 만났다면서! 도대체 그 자식을 왜 자꾸 만나! 격 떨어지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앉은 채로 임준형에게 따지는 쏘아붙이는 임아현.
저벅저벅.
그런 임아현에게 말없이 조용히 다가오는 임준형.
“일어나.”
임아현의 바로 앞에 선 임준형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오, 오빠. 무섭게 왜 그래.”
임아현이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쫘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엉거주춤 일어나던 임아현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털썩.
얼마나 세게 뺨을 맞았는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쓰러진 임아현의 왼쪽 뺨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손자국.
“준형아!!!”
황라현이 다급하게 아들 임준형의 팔을 붙들었다.
평생을 샌님처럼 살아온 아들이 눈앞에서 손찌검 하는 걸 처음 봤다.
임준형은 아무리 화가 나도 겉으로 분출하기보다 되도록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술이 아닌 음악을 듣거나 산책하며 분노를 다스렸다.
그런 그가 오늘 가장 많이 배려해주고 예뻐하던 여동생의 뺨을 때렸다.
“오…… 빠…….”
임윤아도 당황하고 놀라기는 마찬가지.
안경 너머로 언제나 침착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나름 이성적으로 살아온 큰오빠가 손을 들었다.
평소 막내인 자신보다 더 관심을 갖고 챙기던 작은 언니를 향한 싸대기.
살면서 처음 본 광경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빠는 폭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가 남도 아닌 여동생의 뺨을 갈겼다.
이상하게 시원하기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장태산을 만나고 온 직후였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간 거야?’
오빠가 저렇게 나왔다면 임아현이 맞을 짓을 한 게 확실했다.
한 번 오기를 부리면 끝을 보고야 마는 언니 임아현.
“지, 지금 나 때린 거야……. 오빠가…….”
충격과 혼란에서 헤어난 임아현이 뺨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
집사를 비롯해 집안에 상주하는 비서들 모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정 일가 내에서 벌어지는 집안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어.”
임준형이 짧게 대꾸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알코올 냄새가 강하게 풍겼지만 술에 취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두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왜! 왜 때려! 오빠가 뭔데!!!”
임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짜아아아아악.
그 순간 다시 한 번 가해지는 싸대기.
“아아아아악!”
이번에는 좀 더 멀리 튕겨나가 철퍼덕 주저앉는 임아현.
“준형아! 그마아아안!”
황라현이 다급하게 몸을 날려 임아현의 앞을 막아섰다.
이렇게 화가 난 아들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봤다.
아니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온순하고 순종적이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폭군처럼 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앙!”
급기야 임아현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억울함과 분노가 한데 뒤엉켜 그녀를 홱 돌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임성철 회장에게 회초리를 맞아 본 게 다였다.
사춘기시절부터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던 임아현.
지금까지 자신을 누구보다 다정하게 감싸주던 오빠의 손에서 잔인함을 맛보고 있었다.
“후후훗.”
임아현의 눈에 오빠 임준형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웃었다.
“집사님! 꿀물 안 줘요?”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집사에게 꿀물을 요구했다.
스으윽.
꿀물이 담긴 컵을 쟁반에 담아 나타난 집사.
조용히 잔을 건네고 사라졌다.
꿀꺽꿀꺽.
임준형은 달달한 꿀물을 단숨에 비워냈다.
탁.
탁자 위에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임준형.
“임아현. 너 내일부터 회사에 출근할 필요 없다.”
“!!!”
폭탄선언이 이어졌다.
“오빠…….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임윤아가 더 놀라 물었다.
임아현도 오정의 정식 주주였다.
부사장이라는 직책은 결코 하루아침에 정리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언급이 되었어야 할 일.
“준형아. 출근하지 말라니. 엄마에게 설명해봐.”
황라현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두 사람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준형이 오정의 핵심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누가 봐도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배 아파 난 딸자식 몫도 챙겨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
“어머니. 아현이 저 자식이 오정 말아먹을 뻔했습니다. 더 놔두면 큰 사고 칠 게 뻔합니다.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임성철 회장의 고집을 그대로 이어 받은 임준형.
뭔가 단단하게 결심을 한 듯 그의 태도는 확고해 보였다.
“오……빠가 뭔데! 오빠가 아빠는 아니잖아! 나 오정물산 부사장이야! 임원 회의도 없이 날 자르는 게 말이 돼!!!”
눈을 쏟다가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말에 악을 쓰며 대드는 임아현.
눈물에 마스카라가 흘러내리고 화장이 엉망이 되면서 얼굴 꼴은 말이 아니었다.
“네가 한 말썽을 몰라?”
전혀 동요하지 않는 임준형.
“무슨 말썽!”
“장태산.”
“!!!”
임준형의 한마디에 임아현은 금방 말문이 막혔다.
불길했던 어제 꿈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게 무슨 말이니? 태산 군에게 아현이가 무슨 짓을 했어?”
평소 딸의 행실을 잘 알고 있는 황라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일단 임아현은 발뺌했다.
증거는 확실히 정리했다.
“손주혁!”
임준형 입에서 또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걔는…… 내 동창이야!”
“그래! 너도 나이가 있으니 사생활 인정해 주마. 근데 매제가 모를 거라 생각해?”
“…….”
입술을 잘근 깨무는 임아현.
멋대로 흔들리는 눈빛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문효진은 어떻게 설명할래?”
“!!!”
급기야 임준형의 입에서 문효진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듣고 임아현은 절망했다.
오정이 갖고 있는 정보력 수준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거지같은 기획사를 통해 미인계를 사주해? 그것도 여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를 상대로!!”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문효진? 그 여배우를 언니가…… 태산 씨에게 보냈다고?”
임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언니의 패륜적 행동.
자신과 약혼 얘기까지 나온 남자에게 악의를 갖고 더러운 일을 사주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임아현을 노려보는 임윤아의 눈빛이 서늘했다.
“시, 시험해 본 거야! 내 동생 남자라면 그 정도 미인계는 무사히 통과해야지!”
임아현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펼쳤다.
“그래서 기자까지 붙였어?”
임준형은 검사처럼 체증한 증거를 하나씩 계속 내밀었다.
“증거는 확보해야지.”
임아현은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고 절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장태산의 무서움을 넌 모른다.”
임준형은 조금 전까지 함께했던 장태산을 떠올렸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장태산은 임아현이 한 짓에 대해 상당히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정리하지 못한다면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그깟 놈이 뭐가 무서워! 여차하면 아버지처럼 사람 시켜서…….”
쫘아아아악!
임아현 입에서 아버지 소리가 나오자마자 듣고만 있던 황라현이 임아현의 뺨을 후려쳤다.
“어, 엄마…….”
아픔보다 놀라움으로 황라현을 바라보는 임아현.
“감히! 네 아버지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황라현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눈동자에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엄마 그게…….”
“닥쳐! 오빠 말대로 넌 내일부터 회사 근처에도 가지 마. 이건 명령이야!”
평소 자식들 싸움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황라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아현에게 황라현은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엄…….”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당장 내 집에서 나가! 그리고 연락하기 전까지 먼저 찾아오거나 전화하는 일 없도록 해. 이건 엄마가 아닌 오정의 대주주로서 내리는 처분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무서워지는 황라현.
“…….”
집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겁 없이 날뛰던 망아지 같던 임아현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의 멍한 표정이 됐다.
세상이 망해도 편을 들어줄 것 같았던 엄마의 변심.
여동생도 자신을 벌레 쳐다보듯 바라봤다.
오빠 역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냉정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가 봐도 명백한 오정그룹에서의 축출.
지금 이곳에서 나가면 언제 다시 그룹 사업에 다시 뛰어들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왜 내게 이런…….’
임아현은 지금 상황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그때 임아현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깨며 울렸다.
아들이 직접 골라 지정해 놓은 벨소리.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는 임아현.
- 엄마!!! 빨리 와! 아빠가 이상해!
“아빠가?”
- 임아현! 이 창녀 어딨어! 으아아아아아아아! 내 얼굴에 먹칠을 해!
와장창창창.
전화기 너머에서 집안 살림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엄마! 빨리 와! 무서워! 우아아아아아앙!
아들이 울면서 임아현을 찾았다.
뚝.
하지만 짧은 통화는 이내 끊겼다.
화가 난 남편의 무차별적인 폭행.
“가 봐.”
평소라면 옆에서 위로하고 응원했을 엄마 황라현이 축객령을 내렸다.
“네 남편 단속 잘해라.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임준형의 이어지는 경고.
“난 형부 편이야.”
임윤아도 임아현의 등을 떠밀며 위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흐으윽.”
서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임아현.
타다다닥.
그대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아아…….”
황라현이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집안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평소 온순하던 아들이 자신 앞에서 손찌검을 할 정도라면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짐작이 됐다.
“태산 군, 화가 많이 난 거니?”
“자신이 직접 처리해도 되느냐고 물어서 말렸습니다.”
“엄마. 태산 씨…… 만만한 남자 아냐. 아빠 앞에서도 할 말 다했어. 그리고 한국 밖에서도 견제하는 자들이 많아. 그런 남자를 겁도 없이……. 미치겠네.”
그나마 장태산에 관해 많이 알고 있는 임윤아가 말을 잇다 말고 두 눈을 감았다.
이번 일이 기회임을 알았다.
장태산이 직접 처리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주주총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오정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었다.
“네가 태산 군 화 좀 풀어줘라.”
황라현도 장태산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네가 힘 좀 써 봐라.”
임준형도 임윤아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일시에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 임윤아.
“뭐……. 일단 최선을 다해 볼게.”
과거처럼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라면…… 제대로 먹을 거야!’
그 순간에도 발칙한 꿈을 꾸는 임윤아.
그녀는 미처 몰랐다.
요즘 장태산이 라면을 얼마나 질리도록 먹고 다니는지 말이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