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장. 르네상스.
“전무님 오셨습니까!”
항구파가 영업권을 소유한 호텔 지하에 자리한 클럽.
수도권에서 유명세를 타던 클럽이 부산에서도 대세였다.
7년째 부동의 1위, 클럽 ‘데이’.
무대 위에서 청춘남녀들이 넘쳐나는 에너지를 한껏 발산했다.
쿵! 따라라라라~ 쿵쿵~♬
강렬한 비트음이 호텔 클럽 내부 공기를 뒤흔들었다.
“모두 소리 질러! 예에~♫”
한창 분위기를 높이는 디제이를 살펴보던 강 전무는 업장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럽 가드들은 주변 분위기를 의식해 과거처럼 90도로 허리를 꺾지는 않았지만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덜컥.
강 전무를 측근에서 가드하는 항구파 동생들이 전무실 문을 열어준 후 문 앞을 병풍처럼 막아섰다.
클럽 내부 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CCTV 10여 대로 꽉 찬 관리실.
치이이익.
강 전무는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이며 털썩 가죽 소파에 몸을 묻었다.
“씨팔.”
그의 입에서 조용히 욕 한마디가 진하게 터져 나왔다.
한마디 욕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빨리 은퇴할 것이지 아직도 보스질이야.”
강지철은 보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의리 따위는 애초 모르는 자였다.
10여 년 전 항구파가 부산을 접수할 때 중소 규모의 조직에서 투신했다.
그때 구성파를 몰아내고 부산을 차지한 항구파의 기세는 서슬이 퍼랬다.
서울에서 대학 나온 강지철은 조직 내 엘리트로 꼽혔다.
그러다 일본어가 유창하다는 이유로 야쿠자 쪽을 전담하게 됐다.
마약을 들여와 어둠 속에서 부산을 오염시켰다.
돈은 쏠쏠하게 벌어들였지만 늘 자리는 불안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철혁의 친척이자 오른팔이었던 최도철 전무가 통영에서 실종됐다.
강지철은 최도철과 함께 쌍철이라 불렸지만 늘 주먹에서 밀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통영 사건 이후 운 좋게 승승장구했다.
오른팔 격인 최도철의 부재를 틈타 최대한 보스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암암리에 도발을 일삼는 구성파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전라도 쪽 조직과 힘을 합쳐 피 튀기는 전투를 몇 번 치르기도 했다.
그때 사시미에 제대로 한번 맞은 최철혁.
그 일이 있은 후 최철혁은 부하들을 더 믿지 못했다.
조직의 배신자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내몰리자 본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위기를 넘긴 후 최철혁의 잔인한 복수가 시작됐다.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 수십 명이 부산 앞바다에 수장됐다.
배신자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바다에 담가 버렸고 사건은 실종 처리로 마무리됐다.
잔혹성이 극에 달한 최철혁이 그 힘으로 부산을 삼켰다.
“몰래 빼돌린 거 눈치 챈 듯한데……. 혼자 잘 처먹고 잘 살아라.”
부산에 들어온 러시아 선원들을 통해 웅담과 사향, 녹용을 거래해 왔던 강지철.
상부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처리해 온 일이 최철혁에게 보고된 것 같았다.
다행이 마약류가 아니어서 보스가 이번에 경고만 하고 한 번 눈감아 줬다.
“서울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번 일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욕심 많은 최철혁은 오래 전부터 서울을 노렸다.
강남 하나회 구광필이 자살해 버린 후로 서울은 무주공산이 됐다.
여러 지방 조직들이 서울을 접수하겠다고 나섰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일통을 이루지 못했다.
파이가 워낙 컸기에 항구파도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한 발자국 걸쳤다.
연예기획사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 사채 시장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흐흐. 나 없는 동안에 제발 칼 맞아 뒈져라.”
치익.
재떨이에 담배를 거칠게 뭉갰다.
“오늘 물 좋은데?”
CCTV 화면에 보이는 늘씬한 젊은 여성들의 몸놀림에 강지철은 후끈 달아올랐다.
케케묵은 분위기의 나이트클럽을 정리하고 최신 유행하는 핫한 클럽으로 재정비한 것은 강지철의 아이디어였다.
이곳은 누가 뭐라 해도 그의 왕국이었다.
삐잇.
호출 벨을 누르는 강지철.
스륵.
두툼한 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전무님.”
대기하고 있던 최고참 웨이터가 들어왔다.
“저기 보이는 애 있지?”
CCTV 한가운데 현란하게 춤추고 있는 젊은 여자를 강지철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데려올까요?”
“옆방으로 정중히 모셔와.”
“넵!”
웨이터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한번 찍으면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강지철.
룸에 들어오는 순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온갖 그물이 설치되어 있는 옆방.
“그런데…… 누가 최수혁이를 건드렸다는 거야?”
보스가 무척 아끼는 사촌동생 최수혁.
한창 잘나가는 배우인 최수혁은 항구파에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곧 만나겠지. 흐흐흐.”
보스가 싫으면서도 한편으로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리고 강지철은 서울행이 가져올 위기의 실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
“크읍…….”
임준형은 거침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속이 탈 걸 알지만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장태산 앞에서 자신은 확실한 약자였다.
어떻게 당한지도 모르게 오정의 상당 주식을 빼앗겼다.
“천천히 드십시오.”
장태산도 소주를 따라 마셨다.
쓴 소주를 넘기면서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다.
보글보글.
어느새 새 라면이 끓여지고 있었다.
“KI 지분이 우리도 꽤 있어. 도와줄까?”
임준형은 장태산이 KI그룹을 상대로 작업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쓰러지게 만든 원흉.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아무리 미워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여전히 가족 간 재산분쟁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KI그룹 역시 쉽게 덤빌 수 없을 만큼 많이 성장했다.
오정도 꽤 힘을 써야 상대할 수 있는 기업.
“파리 잡는 데 오정의 힘까지 필요 없습니다.”
“파리?”
“좀 큰 똥파리죠.”
재계 서열 20위 안에 드는 KI그룹을 똥파리라고 비하하는 장태산.
오정도 아래에 놓고 보는 그에게 KI그룹 정도는 씹지 않고 삼켜도 될 물건인지도 몰랐다.
“잘 부탁해. 그래도 오정과 인연 있는 사업체가 많아.”
“몇 개 추려서 싸게 넘겨드려요?”
“됐어. 괜히 사람들한테 책잡히기 싫어.”
“아쉽네요. 생명공학 쪽은 합자회사 설립하려고 했는데.”
“생명공학?”
“제 전문이 생명공학입니다.”
“변호사잖아.”
“앞으로 생명공학 분야가 돈 될 겁니다. 형님도 그래서 비상장으로 키우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룹 승계를 위한 포석으로 활용되고 있는 생명공학 분야.
뻥 튀기 하기에 가장 용이했다.
신약이라도 하나 발표되면 순식간에 주가가 폭등할 것이다.
비밀리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그 결과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아 씨가 욕심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몇 개 사업을 공동 진행할까 생각 중입니다.”
“윤아랑? 어떤 기술인데?”
금세 임준형이 흥미를 보였다.
아직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은 사항이었다.
장태산이 거느리고 있는 장주시 연구소가 놀랍도록 대단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어 그만큼 다른 대기업들이 군침을 흘렸다.
임준형도 욕심이 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장태산이 따로 초청하지 않았다.
장태산은 막내 여동생 임윤아만 상대하고 연구소에 동행했다.
‘분명 의약 바이오라고 했어.’
오정 정보실에서 겨우 빼낸 비밀 중 하나가 바로 장태산의 의약 바이오에 관한 건이었다.
다른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실소하고 무시했겠지만 장태산의 말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무게감이 달랐다.
그가 몸소 보여준 추진력과 기획력.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자본력과 기술력이 합쳐졌을 때의 결과를 예상하면 오정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욕심나세요?”
“당연하지. 나도 사업가야.”
임준형은 감추지 않고 욕심을 드러냈다.
다소 샌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임준형 또한 야망이 있는 사업가였다.
반도체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세계 일류 상품들을 양산하고 싶었다.
“형님도 회장님 닮으셨습니다.”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그렇다면 일단 내실부터 다지십시오.”
“내실? 어떤 거?”
“반도체 말입니다.”
“그거야 오정의 장기잖아. 초격차 기술을 이용한 시장 선도. 10년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우리를 따라 올 기업은 없어.”
“확신하십니까?”
“어.”
임준형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메모리 반도체는 오성이 절대적이었다.
NK가 치고 나왔지만 기술력과 자본에서 밀렸다.
중국도 인력을 빼가면서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쉽게 따라올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긴 세월 동안 쌓아온 기술은 몇 명의 고급 인력이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오만하군요.”
“자신감이라고 해두지.”
“라면 드십시오. 이번에는 기본 맛에 충실했습니다.”
연거푸 소주가 들어가자 얼큰한 안주가 땡겼다.
수프와 면만 들어간 기본 라면.
임준형은 주저하지 않고 뚜껑에 라면을 덜었다.
후루루루룩.
뜨거운 면발을 후후 불며 흡입했다.
‘정말……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네.’
임준형은 또 한 번 감탄했다.
기본 라면도 대단히 맛있었다.
“죽이죠?”
“비법이 뭐야?”
“초격차 기술입니다.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되죠.”
“뭐라고? 하하하하하하.”
임준형은 장태산의 재치 있는 대답에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한 잔 더 드십시오.”
“나 술 잘 마셔.”
“그러세요? 저 이기면 원하는 기술 하나 드리죠?”
“정말?”
“전 진실 빼면 시체입니다.”
“믿겠네.”
임준형이 빈 잔을 내밀었다.
또로로로록.
다시 잔이 채워졌다.
임준형은 종이컵 가득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지만 아직 정신이 말짱했다.
그룹 회장은 술도 잘 마셔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에 어릴 적부터 술 먹는 기술도 따로 배웠을 정도다.
술도 정신력 싸움의 한 수.
“건배.”
임준형이 장태산의 잔을 채우고 건배를 외쳤다.
꿀꺽꿀꺽.
목젖을 타고 위장으로 흘러들어가는 아릿한 소주맛.
후루루루루룩.
급히 안주로 라면을 삼켰다.
탱탱한 면발이 소주의 독한 쓴맛을 중화시켰다.
“르네상스가 몰려옵니다.”
소주를 다 비운 장태산이 툭 던진 한마디.
순간 임준형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오늘 장태산과 속마음 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임아현 때문에 자존심이 살짝 상한 순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워낙 바쁜 삶을 살아온 터라 누구와도 이렇게 친분을 나눌 기회가 없었다.
장태산과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지만 서로 간에 일정 거리가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뭔가 달랐다.
장태산이 먼저 여러 비밀을 풀어놨다.
“르네상스? 어떤 르네상스?”
“반도체의 르네상스 말입니다.”
‘뭘 알고 하는 말 같은데?’
임준형은 말없이 장태산을 빤히 바라봤다.
답을 듣기 원하는 학생 같은 심정이 됐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길어야 10년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또 다른 반도체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겁니다.”
“어떤 반도체?”
오정의 핵심 주력 사업에 있어서는 암울함 전장이 아닐 수 없었다.
“인공지능 반도체입니다.”
“아!!!”
장태산은 AI 반도체라 불리는 미래 주력 반도체를 말했다.
오정 연구소에서 이제 사업 계획이 올라왔을 정도로 생소한 분야였다.
최근 서서히 태동하고 있는 인공지능 분야.
장태산은 변호사임에도 선견지명이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신사업 분야를 명확하게 꿰고 있었다.
‘두려운 자다.’
임준형은 속으로 장태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투자에만 특화된 인재가 아니었다.
넓은 시야와 각종 기술을 망라해 각 분야에 대한 해박함을 장착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래에 대한 확고부동한 태도까지.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대형 정보기술 업체는 앞으로 자체 개발 칩으로 AI시대에 대응하려고 할 겁니다. 아니 이미 실행 중이라고 봐야 맞겠지만……. 그런 면에서 오정은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훅 치고 들어온 장태산의 피할 수 없는 질문.
“…….”
임준형의 입에 쓴맛이 확 돌았다.
“오정은 지금 갈림길에 있습니다. 형님은 어떤 길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장태산의 여유 있는 모습.
임준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난…….”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