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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장. 라면(2). (814/1,284)

817장. 라면(2).

후루루룩 후루루룩.

넓은 양은냄비 뚜껑에 라면을 수북이 올려놓고 흡입하는 한 남자.

남자는 작은 체구에 배가 불룩 튀어나왔지만 온몸이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나이는 사십대 후반.

이마를 거쳐 오른쪽 눈썹을 가르고 지나가는 흉터가 예사롭지 않다.

우적우적.

크게 한입 면발을 흡입하며 푹 익은 김치를 간간이 곁들였다.

배가 많이 고픈 듯 젓가락질을 하는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매운 청양 고춧가루를 첨가한 라면 국물은 눈에 띌 만큼 매워 보였다.

매콤한 훈김이 공간에 배었다.

부산 해운대 앞바다가 한눈에 훤히 보이는 호텔의 스위트룸.

1박에 수백만 원이 넘는 숙박비를 받는 공간답게 작은 소품 하나까지 럭셔리였다.

그런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는 남자는 버너에 양은냄비를 올려놓고 끓인 라면을 흡입 중이다.

일반 투숙객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화기 사용과 음식 조리.

남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꺼어어어어어억.”

스윽.

그림자처럼 옆에 서 있던 블랙 슈트 차림의 샤프해 보이는 남자가 자연스럽게 생수병을 건넸다.

꿀꺽꿀꺽.

단숨에 생수 한 통을 비워낸 남자.

“이제 좀 살 것 같네.”

남자의 붉어진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번졌다.

“잘 먹었어. 주방장.”

“아닙니다. 회장님.”

호텔 스위트룸에서 라면을 손수 끓여 바친 호텔 한식 코너 총 주방장.

남자의 잘 먹었다는 말에 허리를 숙였다.

특급 호텔 주방장임에도 절대 고개를 빳빳하게 들지 못했다.

“호텔에서는 왜 라면을 안 파는 거야?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주방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입니다. 고객의 원하는 바를 파악해 정성껏 대접함이 요리사의 기본 마음자세입니다.”

“오! 그거 좋다. 기본 마음자세. 요즘에는 그런 기본을 망각한 새끼들이 너무 많아. 강 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맞습니다. 회장님.”

남자의 옆에서 이런저런 수발을 들던 강 전무가 짧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내가 이래서 라면을 못 끊어. 배고플 때 가장 먹고 싶은 게 라면이었거든. 서울에서 가출해 돈 벌겠다고 친구 놈하고 멍텅구리 배 탔다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잖아. 선원 새끼들이 얼마나 갈구던지……. 같이 가출했던 친구 놈을 말 안 듣는다고 야밤 조업 중에 바다에 던져버렸다. 진짜 무서웠재. 그때는 이게 지옥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배가 고플 때, 그것도 아주 추운 날 배에서 먹는 라면 맛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 시퍼렇게 언 손으로 건더기도 얼마 없는 라면 국물에 찬밥을 가득 말아 먹고 나면……. 마, 그게 죽이삔기라.”

서울말과 지방 사투리를 섞어 사용하는 남자의 말버릇.

고단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에 얼핏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배에 나를 가둬놓고 강간하던 새끼가 있었다. 우연히 길에서 그 새끼를 마주쳤는데 그때 사시미 박던 맛하고 똑같다. 으흐흐.”

살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남자.

“강 전무 니도 타봤나. 멍텅구리.”

“아직 못 타봤습니다. 회장님.”

“니가 일을 잘해서 그렇지. 그런데 요즘 들어 영 시원찮은 새끼들이 많아. 배 좀 태워야겠다.”

“…….”

“강 전무! 우리 조직 이름이 왜 항구파인지 아나?”

“잘 모릅니다.”

“한 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마도로스 같은 인생을 의미하는 거야. 멍텅구리 배 타고 1년 만에 육지에 내렸을 때 난 다짐했다. 나는 죽어도 다시는 항구에 발길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강 전무, 내가 항구에 가는 거 봤나?”

“못 봤습니다.”

“그래. 못 봤지. 그러니까 너도 잘해. 항구를 한번 떠나면 다시 못 돌아온다.”

손가락으로 이에 낀 고춧가루를 긁어내는 항구파 보스 최철혁.

듣고 있던 강 전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보스가 라면을 찾는 날에는 어김없이 큰 사건이 터졌다.

보스는 초심을 되새길 때마다 라면을 찾았다.

“팁 줘서 보내.”

“넵!”

강 전무가 지갑에서 수표를 꺼냈다.

“새끼 내 앞에서 돈 자랑하냐?”

휘릭.

최철혁이 수표를 빼앗았다.

“라면 값은 3000원. 그 이상 받으면 양아치지. 주방장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넵!”

손을 내밀어 수표를 받으려다 멈칫한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쭈뼛쭈뼛 손을 거두었다.

명실상부 부산을 접수한 항구파.

특급 호텔 나이트 영업권은 물론 지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잘못 보이면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항구파의 잔인한 손속은 이미 부산에서 유명했다.

엄연히 법과 검찰, 경찰이 민간인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보다 항구파의 주먹이 더 가까웠다.

마약 밀수부터 수많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항구파는 부산의 대표적인 어둠속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지역 정치인들과도 친분이 남달랐다.

“팁 안 줘?”

“천 원짜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외상하면 되잖아. 우리가 떼어먹을 것도 아니고. 주방장 불만 없지?”

“무, 물론입니다.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영광입니다.”

“오늘은 국물이 좀 짰어. 다음에 잘 부탁해.”

“회장님 입맛에 맞는 최상의 레시피를 개발하겠습니다!”

“가봐.”

“넵!”

주방장은 빈 냄비와 버너, 구겨진 휴지 조각까지 챙겨 카트에 넣고 부리나케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갔다.

“강 전무.”

주방장이 사라지자 남자가 강 전무를 조용히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니 서울 좀 다녀와라.”

“네?”

“통영에서 실종된 우리 애들 사건과 관련 있는 구서현이 중앙지검에 있다더라. 가서 견적 좀 뽑아봐.”

“넵!”

“그리고 내 사촌동생 최수혁이 겁박했다는 새끼도 찾아내. 손 좀 봐줘.”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이번 일 잘 마무리하면……. 당분간 또 배 탈 일은 없을 끼다.”

부리는 수하들에게도 자비를 모르는 최철혁.

오른팔로 여기는 강지철에게도 예외 없이 주의를 줬다.

“비가 오려나. 어째 칼 빵 맞은 자리가 쑤시네…….”

넓게 펼쳐진 해운대 백사장을 배경으로 몰려오는 먹구름을 보며 오른쪽 갈비뼈를 만지는 최철혁.

살모사처럼 째진 눈동자가 누런빛을 뿜어냈다.

***

“그게 쉽지가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아현이 지분이 그룹에서 꽤 돼. 사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데…….”

“형님. 적자 사업이 두각은 아니죠.”

“……사업하다보면 베이스로 깔아야 할 기간과 자본이 있어. 아현이가 맡고 있는 패션 사업 쪽이 한번 터지면 대박이야.”

임준형은 일단 임아현을 두둔하고 나섰다.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가 운명하게 되면 그룹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랐다.

아직 상속 지분 문제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편법 증여와 비상장 계열사 인수합병을 통해 지분 우위를 점하고 있긴 하지만 형제들 도움이 필요할 때가 분명 있었다.

그 시기를 대비한 보험.

씨익.

장태산이 웃었다.

“남의 허물이 10가지면 본래 내 허물은 100가지가 넘는 법입니다. 오정, 그러다 큰일 납니다.”

“그게 무슨…….”

“오정중공업 드릴십 재고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재고? 이제 발주가 됐는데 무슨 재고?”

“작년과 올해 스위스와 계약한 드릴십 15억 달러. 모두 다 재고가 될 겁니다.”

“뭐라고???”

임준형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직 듣지도 못한 결과 보고에 대해 장태산은 거침없이 재고라 말했다.

“유가가 50달러에 상당기간 머물 예정인데 형님 같으면 원가가 많이 드는 드릴십 인수 받겠습니까? 계약금 날리고 편히 숨 쉬는 게 낫죠.”

“유가가 50달러? 너무 낮은 거 아냐?”

100달러를 넘던 유가가 안정권에 들어섰지만 의외로 유가는 폭락하지 않았다.

장태산의 비관적 전망에 임준형은 공감하지 못했다.

“오정 정보팀에서 별 말 없었습니까?”

“…….”

물론 유가 전망은 나왔다.

대략 70달러 정도에서 안정세를 보일 거라는 보고였다.

하지만 50달러라면 문제가 커진다.

저유가는 제조 원가가 높은 드릴십으로 수지를 맞출 수 없다.

“러시아는 유럽에 새로운 가스배관을 설치할 겁니다. 중국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도 자국 내 실업률을 낮추고 원유 해외 수입 금액을 줄이기 위해 셰일 가스와 원유 생산을 늘릴 겁니다.”

“셰일 원유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어. 채산성이 맞지가 않아.”

극구 장태산의 주장을 부정하는 임준형.

“채굴 기술도 반도체처럼 계속 발전합니다. 황의 법칙처럼 말입니다.”

“으음…….”

제법 이해가 쉽게 되는 설명이었다.

“미국 퍼미안 대분지에 저장된 원유 매장량은 약 450억 배럴. 천연가스는 290조 입방 피트, 천연가스는 무려 200억 배럴이 넘게 매장돼 있습니다. 형님은 그걸 보고만 있겠습니까?”

“!!!”

장태산이 언급한 숫자들에 임준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 수치들이었다.

“비전통 원유라 불리지만 캐내면 똑같은 기름입니다. 수평 드릴링과 수압파쇄법으로 미국은 수천 개의 유정을 개발할 겁니다. 그런 상황에 해양에서 드릴십을 이용해 어렵게 채취한다? 지금쯤이면 발주처 쪽에서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드릴십 수주를 중단했을 겁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지켜보겠지만 배가 완성될 즈음이면 100% 계약을 취소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유가가 받쳐준다면…….”

“환율과 유가는 신의 영역이라는 말도 존재하긴 하지만 다 거짓입니다. 모두 다 특정 세력들에 의해 좌지우지 될 뿐입니다. 배가 인수될 즈음해서 유가는 바닥이 될 겁니다.”

“…….”

장태산이 말하는 특정 세력.

임준형 역시 그들에 관해서는 눈치만 채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태산의 막힘없는 발언에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임준형.

“미국은 앞으로 세계 경찰국가를 어느 정도 포기할 겁니다. 국내에서 유전이 발견됐는데 호르무즈 해협을 수호할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아니 이란을 비롯해 여러 걸프국들의 분쟁을 촉진 시켜 자국의 기름 수출에 집중할 겁니다. 미국 대선주자나 국회의원들 모두가 미국 원유 생산업체들의 로비를 받습니다. 제가 미국 대통령이라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아랍 쪽 국가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을 겁니다.”

납득이 될 만한 내용들로 설명을 이어가는 장태산의 말들은 마치 미래를 보는 예언 같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들 모두 틀린 말 같지가 않았다.

“좋은 말 감사하네. 하지만 그 문제와 아현이 퇴사 처리 문제는 관계가 없지 않나?”

“임아현은 오정의 악성 재고입니다.”

“악성 재고?”

“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제가 형님께 왜 라면을 대접했을까요?”

“???”

장태산의 질문에 임준형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뜬금없는 초대와 라면 대접.

알쏭달쏭한 퀴즈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값이 저렴하면서도 여러 가지 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 중에 최고봉이 라면입니다. 오정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같은 거죠. 하지만 이 라면을 끓일 때 쓸데없는 재료를 잘못 첨가하면 천하의 개 쓰레기 맛이 됩니다. 임아현 부사장은 오정에 있어 꼭 그런 존재입니다.”

확신에 찬 듯한 장태산의 말.

“중국 고사성어에 개가 사나우면 술이 쉽게 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임준형은 속이 답답했다.

쉽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될 것을 빙빙 돌려 말하고 있는 장태산.

나이는 본인보다 어리지만 꼭 아버지 임성철을 대하고 있는 듯 어려웠다.

그래서 더 긴장됐다.

자칫 여기서 이성의 끈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장태산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정의 경영권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꾸욱 입술을 깨무는 임준형.

“그게 무슨 뜻인가. 개가 사나우면 술이 상한다니?”

임준형의 물음에 여전히 미소만 짓는 장태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원인과 결과를 잇는 법입니다. 왜 개가 사나운데 술이 상할까요?”

다시 되돌아온 질문.

“…….”

임준형은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명성한 인재로 한국대 출신이지만 장태산 앞에만 서면 왠지 평범한 사람이 되는 듯했다.

“아무리 술을 잘 빚어도 소비하는 이들이 없다면 술이 상하는 법입니다.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는 술집에 어떤 이가 목숨을 걸고 술을 사러 오겠습니까.”

“!!!”

임준형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렸다.

법으로 미성년자 술 구입이 막히기 전까지 술심부름은 아이들이 도맡아 했었다.

어른 아이를 떠나 술집 개가 사나우면 당연히 발걸음은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오정의 개가 아주 사납습니다. 라면에 곁들인 시원한 소주 한 잔 같은 저를 무척 미워합니다. 그런 상황에 제가 가만히 있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오정을 버릴까요?”

장태산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더 진해졌다.

경고와 협박이 교묘하게 뒤섞인 말.

‘이 어리석은게!’

임준형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수차례 경고를 했는데 임아현이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자신도 대적하기를 포기한 장태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임아현.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앞서 의중을 물어왔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장태산이 직접 자르게 된다면 오정의 경영권에 자연스럽게 개입하게 될 것이다.

“내가…… 처리하겠네.”

임준형은 항복했다.

“형님께 미안할 따름입니다.”

“아닐세. 내가 미안하네.”

“소주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내려놓았던 소주병을 다시 들고 묻는 장태산.

라면 같은 오정을 위해 기꺼이 조력자로 나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임준형은 거절하지 않고 종이컵을 내밀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

또로로록.

종이컵 가득 쓰고 맑은 소주가 채워졌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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