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6장. 라면. (813/1,284)

816장. 라면.

“실패?”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부사장님.”

“그러니까 일이 왜 틀어졌냐고 묻잖아! 월급 그냥 받아 처먹어? 일 그 따위로 할 거면 당장 때려치워!!!”

퇴근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늦은 밤.

오정모직 부사장실에서 고함이 터졌다.

방음이 얼마나 잘되는지 고성이 울려도 밖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임아현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비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부사장을 모시면서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정가 구성원들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센 임아현.

“그 계집이 기회를 찬 거야? 섭외한 찌라시가 오정 무시한다는 뜻 맞지?”

“소속사 대표 쪽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걸 약점으로 잡아 배우 문효진을 투입했는데……. 장태산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자 쪽은 장태산의 경호팀에 막힌 것 같습니다.”

“경호팀? 뭐가 그렇게 잘났어? 일 하나 처리하는데 뭐 이렇게 깐깐해? 어린 새끼가.”

임아현은 지끈지끈 골치가 아팠다.

한창 혈기 넘칠 나이의 돈 많은 어린놈이 사회 경험 많은 노련한 정치인처럼 깐깐했다.

사방을 찔러봤지만 치고 들어갈 만한 빈틈이 없었다.

삐이잇.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 부회장님이 조금 전 약속을 잡고 급히 나가셨습니다.

“오늘 저녁 중요한 바이어 만나기로 했잖아. 그런데 어딜 가?”

- 급히 만날 사람 있다는 전언만 남기고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고 합니다.

오빠 임준형의 동선에 대한 보고가 바로 들어왔다.

‘바이어와의 약속을 깨? 누구를 만나러 간 거야?’

해외 대형 바이어와의 미팅은 쉽게 취소할 성질의 일정이 아니다.

그런 약속을 취소하고 움직인 임준형.

‘느낌이 안 좋아.’

임아현의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럴 때일수록 불길한 예감은 비켜가지 않았다.

특히 장태산이 오정과 연관되고 엮인 후부터 되는 일이 없이 늘 일들이 꼬였다.

여동생 임윤아가 전혀 생각지 못하게 임원 자리를 꿰차고 경영에 뛰어들었다.

장태산의 도움으로 분수에도 맞지 않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 중에 있었다.

엄마와 오빠도 그런 장태산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

그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작업을 했지만 도리어 당할 것 같은 불길한 분위기.

“부사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장태산 일은 이쯤에서 접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평소에는 시키는 일이면 다 순종적으로 맡아 해오던 비서가 다른 의견을 냈다.

‘그래, 이번에는 물러난다.’

임아현도 바보가 아니었다.

“입막음 단단히 하고 뒤처리도 깔끔히 해.”

“알겠습니다.”

비서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보였다.

겪으면 겪을수록 두려움만 커지는 장태산의 능력.

그만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이제야 편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태산……. 기다려. 너도 언제까지나 완벽할 수는 없겠지…….’

독기를 품으며 이를 가는 임아현.

그녀는 더 이상 장태산에 대한 집착을 멈추기로 했다.

그도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실수를 하게 될 터.

가슴 조이는 불편한 상황을 멈추고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임아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그가 얼마나 자비심이 없는지.

***

“부회장님. 바이어 쪽에서 섭섭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문자를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비서.

“황 대표가 마중 나갔지 않아?”

“부회장님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난 이 일이 더 급해.”

“넵.”

비서 오광연은 입을 다물었다.

바이어와의 약속은 수십억 달러짜리 하반기 물품 계약 건이 달린 미팅이었다.

NK 쪽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계약 건.

임준형이 오늘 그들과 만나 직접 사인하는 것으로 암묵적 약조가 돼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임준형이 과감하게 약속 펑크를 냈다.

심각해져 있는 임준형의 표정을 확인한 오광연은 미팅 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부우우웅.

차는 미끄러지듯 강변북로와 연결된 자유로를 달렸다.

임성철 회장의 부재로 부회장에 올라 그룹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임준형.

저녁에 갑작스럽게 장태산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에게 허락 받을 일이 뭐가 있지?’

임준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장태산이 내민 비공개 주식 지분표.

과거 말로 들었을 때와 달리 직접 눈으로 지분표를 확인하자 숨이 막혔다.

오정전자 25% 지분 이외에도 다른 주식을 더 소유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오정의 주인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었다.

바이어와의 미팅은 내일 다시 잡아도 됐다.

어차피 단가와 수율 문제에서 오정이 NK를 압도한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근접하고 있었다.

을이 아닌 갑의 위치에서 지휘해도 되는 시기였다.

덜컹 덜컹.

도로에서 벗어난 차는 포장이 거친 농로를 달렸다.

길이 막히지 않아 약 3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됐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추고 운전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타다닥.

뒤따라온 경호팀이 먼저 내려 임준형을 보호했다.

자칫 그가 위험해지는 순간 오정을 비롯해 대한민국 재계가 흔들릴 수 있었다.

임성철 회장의 부재를 커버할 만큼 어느새 든든하게 성장한 임준형.

‘이 밤에 실내 낚시터라니.’

임준형은 도저히 장태산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깔끔하게 강남에서 만나도 될 텐데 굳이 그는 일산의 한 실내 낚시터로 자신을 불러냈다.

“여기.”

“됐어.”

“한강 바람에 감기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휘리리링.

그러고 보니 강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왔다.

일산과 파주 경계는 서울과 온도가 달랐다.

“아직 그럴 나이 아냐.”

오광연이 롱코트를 꺼내들고 다가오자 임준형이 거부했다.

자유로 너머가 바로 한강.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실내 낚시터 주차장에 주차된 차량은 잘 빠진 스포츠카 한 대가 전부였다.

‘마중도 안 나오는군.’

임준형은 입맛이 썼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장태산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해.”

“네?”

“왜 장태산한테 얻어맞을까 봐?”

“아니 그게 아니라…….”

“중요한 얘기야. 기다려.”

“넵!”

임준형은 오광연과 경호원들을 물리고 낚시터 안으로 들어갔다.

끼리릭.

비닐하우스로 만들어진 실내 낚시터 문을 직접 열었다.

바깥과 달리 습기가 적당히 퍼져 있는 훈훈한 실내.

“여깁니다.”

반대편에서 장태산이 일어나며 손짓했다.

저벅저벅.

살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내 낚시터에 와 보는 임준형.

물비린내와 섞여 풍겨오는 고기 비린내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지저분하게 이런 곳까지 부른 이유가 뭐야?’

머릿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복잡해졌다.

“늦은 밤에 만나자고 해 죄송합니다.”

장태산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알긴 알아?”

“그럼요. 앉으십시오.”

앞에 놓인 간이 의자를 가리키는 장태산.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허름한 의자에 임준형은 엉덩이를 붙였다.

“마침 라면이 다 끓었습니다. 저녁 식사 전이죠?”

“뒤에 사람 붙였어?”

“회사에 이 늦은 시간까지 있었다면 저녁 먹을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달그락거리며 양은냄비 뚜껑을 여는 장태산.

파와 고춧가루, 마늘, 달걀이 추가된 라면은 깔깔한 임준형의 입맛을 자극했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운 야식.

“드실 거죠?”

“배고파.”

“그럴 줄 알고 넉넉히 끓였습니다.”

냄비 뚜껑과 젓가락을 건네며 양보하는 장태산.

“여기다 먹어?”

“형님이라 양보하는 겁니다.”

“끙…….”

임준형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양은냄비에 요리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냄비 뚜껑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집에서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물 마실 때나 있는 일이다.

“라면도 위아래가 있는 법. 형님 먼저~.”

장태산이 넉살 좋게 웃으며 라면을 권했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임준형은 도깨비에 홀린 듯 젓가락으로 라면을 건졌다.

호로로록.

배가 무척 고팠다.

손에 잡힌 젓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바이어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일부러 저녁을 굶었다.

연이어 있었던 회의 때문에 당이 바닥을 보이기 일보직전.

밖에서는 대기업 총수 정도 되면 매끼 럭셔리한 식사를 할 거라고 상상하겠지만 현실은 제 시간에 밥 먹는 일도 힘들 때가 많았다.

해외 근로자까지 합쳐 100만 단위가 넘는 직원들을 거느린 대기업 총수.

임준형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 총수의 어깨는 참 무거웠다.

보통 사람들처럼 하루 세끼를 챙겨 먹는 일도 벅찼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시로 비행기를 타고 빈번한 출장도 수행해야 했다.

대형 바이어들 대다수가 해외 쪽 상대.

하루에 사인해야 할 서류만도 수십 개씩 쌓였다.

일일이 검토한 후 최종 결재 사인을 할 때마다 많은 심력이 소모됐다.

“!!!”

‘이거 라면 맞아?’

가끔 도우미를 통해 야식으로 라면을 먹긴 했지만,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먹어본 보통 라면이 아니라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내놓은 메인 요리 같았다.

면발은 꼬들꼬들하고 탱탱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고추기름 특유의 미묘한 풍미.

시원한 국물이 배어 있는 면을 씹자 진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청양고추가 들어간 듯 매콤함이 가미돼 복잡한 머릿속 스트레스를 날렸다.

“어떻습니까?”

“분식집 계열사 하나 낼까?”

최고의 칭찬이었다.

“고추참치 살짝 넣었습니다. 괜찮죠?”

“대박이야.”

“하하. 맛있어 할 줄 알았습니다. 소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좋지!”

임준형은 거절하지 않았다.

라면으로 식욕이 확 돌았다.

즐겨 먹지 않던 소주가 생각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장태산이 소주를 권했다.

또로록.

어느새 준비한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주는 장태산.

“건배하시죠.”

“도깨비에 홀린 것 같아.”

“이곳이 과거에 한강 도깨비 터였습니다.”

“농담이지?”

“아니요. 진담인데요. 저기 한쪽에 도깨비들이 낚시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장태산이 가리킨 곳을 유심히 바라보는 임준형.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면 다 먹고 씨름 한판하자는데요.”

“……나 공포 영화 안 좋아해.”

“걱정 마십시오. 한국 도깨비들은 착합니다. 일본 도깨비들처럼 심술 고약하지 않습니다.”

꿀꺽.

임준형은 도깨비가 있다는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재빨리 잔을 비웠다.

종이컵에 반절이나 채워졌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으.”

“여기 수저.”

장태산은 잘 훈련된 비서처럼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착착 수행했다.

국물을 떠 입에 넣는 임준형.

‘미치겠네. 무슨 짓을 해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요 근래 먹었던 어떤 요리보다 입에 딱 맞고 만족스러웠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더 칭찬하지는 못했지만 수저는 자꾸 국물을 거듭 떠 입으로 들이켰다.

후루룩 후루루룩.

라면 면발도 계속해 건져 먹었다.

마약 같은 중독성.

“끄읍.”

잠시 후 든든한 포만감에 짧은 트림이 터졌다.

재계의 황태자라 불리는 임준형과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보통사람의 모습.

“잘 먹었어.”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자주 와?”

“두 번 와봤습니다.”

“혼자서?”

“아니요.”

“그럼?”

“도운중 회장님이 부르셔서 그때요.”

“도 회장님이?”

어렸을 때 몇 번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수표로 용돈을 주셨던 재계의 큰 어른.

“의외로 조용해서 대화하기 좋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 주인이 통으로 대관도 해줍니다.”

서울 인근이라 사람이 제법 있을 법한데 낚시꾼이 한 명도 안 보인 이유가 있었다.

“저녁도 얻어먹었으니 본론 꺼내봐. 자네 때문에 수십억 달러짜리 거래를 하기로 한 바이어 바람맞히고 나왔어.”

“저도 미모의 여배우와 술 마시다 형님 만나러 왔습니다.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수십억 달러와 여배우를 동급으로 치는 장태산.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자르시죠.”

“응?”

“임아현 부사장. 잘라내십시오.”

“아현이를???”

느닷없는 장태산의 일방적 통보.

“힘드시면 제가 할까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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