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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장. 선과 악.(2) (810/1,284)

813장. 선과 악.(2)

찰칵 찰칵 찰칵.

포차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로 옆에 자리한 낮은 건물의 옥상.

한 남자가 망원렌즈가 달려 있는 카메라로 포차 내부를 연속 촬영하고 있다.

대상은 요즘 뜨고 있는 여배우 문효진과 그녀의 상대 남자.

“그림 좋고~.”

문효진이 자신의 수저로 잘생긴 남자 입에 음식을 떠먹여 주는 장면도 담았다.

누가 봐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달달한 연인들의 모습.

문효진은 남자의 입에 들어갔던 수저로 개의치 않고 국물을 떠먹었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는 멈추지 않고 계속 터졌다.

“용돈 두둑하겠네. 흐흐흐.”

편집장 쪽에서 떨어진 오더였다.

누가 의뢰한 사항인지는 모르지만 문효진의 연애 사생활을 한 방 터트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스폰을 받는다는 스토리까지 하달됐다.

구체적으로 상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까지 전달됐다.

한국대 법학과 출신의 변호사 장태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타이틀을 갖고 있는 젊은 청년 사업가였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다.

딸깍.

“후우우우.”

만족스러운 그림을 건진 후 기자 오정봉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오늘 건진 사진만 잘 전달하면 500만 원은 너끈히 받을 수 있다.

박봉의 기자 월급으로 생활하는 팍팍한 삶에 내린 단비와 같았다.

“소속사도 변변치 않은데 뜨기도 전에 아주 가겠네. 예쁜 것들은 꼭 얼굴값을 한다니까……. 쯧쯧.”

오정봉은 이런저런 생각에 혀를 찼다.

자신도 요즘 팬심을 갖고 챙겨봤던 인기 드라마의 핵심 조연.

소속사의 파워가 좀 있다면 계획된 스캔들을 막아줄 수도 있겠지만 문효진에게는 그럴 만한 백이 없었다.

파산 위기에 내몰려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문효진의 소속사.

일이 좀 풀리는가 싶더니 대표가 도박에 손을 대는 것도 모자라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는 뒷소문이 파다했다.

“어? 저건 또 뭐야?”

문효진과 그녀의 남자가 달달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쪽으로 한 남자가 다가섰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듯 걸음걸이가 좀 불안했다.

이미 어디선가 거나하게 한잔하고 온 듯 포차에 함께 들어섰던 일행들 역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최수혁? 오! 대박!!!”

분명 요즘 핫하게 잘 나가고 있는 배우 최수혁이었다.

문효진과 함께 출연했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 최수혁이 문효진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최수혁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얼굴은 선명하게 망원렌즈에 잡혔다.

찰칵찰칵.

오정봉은 바쁘게 손가락을 놀렸다.

문효진과 달리 최수혁은 소속사가 꽤나 빵빵했다.

잘하면 의외의 상황에서 큰 거 한 장을 보너스로 건질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흐흐흐흐.”

오정봉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스윽.

눈앞의 상황에만 정신이 팔린 오정봉.

자신을 둘러싼 어둠속에 새카만 두 개의 그림자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

‘선과 악…….’

문효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장태산은 뭔가를 알고 말하는 게 확실했다.

따뜻한 말투에 담겨 있는 뼈가 박힌 질문.

“…….”

문효진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소주와 애교, 맛있는 안주로 무난하게 시작된 작업은 시작과 함께 멈춰 버렸다.

오랫동안 수행해 온 선사에게 받은 화두 같았다.

또로록.

장태산이 문효진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참 쉬우면서 어렵죠?”

장태산이 술잔을 잡고 돌리며 물었다.

“네…….”

문효진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장태산을 유혹하려 했던 호기로운 기세는 한풀 꺾인 뒤였다.

성품이 본래 극악스럽지 못한 문효진은 내적 양심을 저버리지 못했다.

“방금 격언은 제가 말한 게 아닙니다. 주역에 나오는 문장이죠. 사람은 선을 쌓을 때만 이름이 빛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악한 자는 일순간의 성취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후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됨이 하늘이 정한 이치라는 거지요. 효진 후배님은…… 좋은 분입니다.”

장태산이 문효진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흔들림 없는 순수한 눈빛.

“살다보면 여러 위기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협박과 유혹이 도처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을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효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달콤한 유혹이 곁들어진 협박에 못 이겨 이 자리에 나온 장본인이었다.

“그런 순간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 타협해 버리면 영원히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확언이나 다름없는 장태산의 말.

찌릿찌릿 문효진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다.

연예계에 발을 들인 후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양심.

“효진 후배님은 맑은 수채화 같은 빛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보장하건데 그 빛을 잃지 않고 지켜내면 훗날 크게 성공할 겁니다.”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가 담겨 있는 장태산의 말이었다.

‘진심이야. 이 남자.’

문효진은 장태산의 따뜻한 눈빛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여자를 상품이나 전리품 정도로 취급하는 연예 바닥 관계자들.

그러다 보니 문효진은 남자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있었다.

그런데 장태산과의 오늘 만남은 그렇지 않았다.

“그 말…… 가슴에 담을게요.”

울컥 터지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문효진은 애써 웃음 지었다.

장태산을 유혹해 보려 했던 마음을 이미 버렸다.

급하다고 돈 몇 푼에 장태산이 말하는 그 빛까지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아빠는 뭔가를 직감한 듯 그런 말을 했었다.

회사가 무너져도 가족이 화목하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후배님. 눈물은 아껴요. 이제 인생 매운 맛 시작점입니다. 불떡볶이처럼 화끈하고 아릿할 그날을 위해 오늘은 술로 마음을 달래봅시다.”

“넵! 선배님!!!”

장태산의 조언에 문효진은 눈물을 닦았다.

진짜 술이 고픈 날.

전혀 다른 마음으로 잔을 들었다.

“선배님과의 인연은…… 두고두고 제 가슴에…….”

문효진이 장태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달라 보였다.

뜨겁게 장태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짐하는 문효진.

바로 그때.

“효진아~ 지금 이 분위기 뭐냐?”

느닷없이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꺄아악! 최수혁이다.”

“멋있다!!!”

“간지 대박.”

조용하던 포차 안의 있던 여성들의 비명이 한꺼번에 터졌다.

아직 저녁 날씨가 꽤 쌀쌀한데 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친 최수혁.

그 위에 가벼운 슈트를 걸친 모습으로 문효진에게 다가왔다.

이번에 끝난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순간 문효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첫 촬영 때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집적거렸던 30대 초반의 최수혁.

시청자들에게는 야성미 넘치는 매너남으로 소문이 나 있지만 문효진은 최수혁의 본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파트너로 함께 열연했던 여배우들과 꼭 추문에 휩싸였다.

사적인 술자리에 어린 여자 후배들을 불러들여 불미스러운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알만한 주변 동료들은 알아서 조심하라고 수시로 경고를 줄 정도다.

미리 단단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문효진도 당할 뻔했다.

드라마 촬영 중간 중간 갖게 된 회식 자리에서 매번 억지로 술을 권했던 최수혁.

정신을 붙들고 몇 번이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오늘 역시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그와 마주했다.

“뭐야? 드라마 끝나면 선배도 아닌 건가?”

문효진 뒤에 바짝 서서 이죽거리듯 말을 내뱉는 최수혁.

“뭐야. 최수혁. 후배가 널 씹네?”

“크크. 이런 대우도 참고, 우리 수혁이 성격 많이 좋아졌어.”

술이 꽤 취한 듯한 최수혁과 그의 일행들.

하나 둘 가까이 다가오며 문효진을 빙 둘러쌌다.

두둥 칫 디이이이잉~♫.

포차에 울려 퍼지는 록 음악에 낮게 오가는 말소리는 대부분이 묻혔다.

누가 보면 전 드라마를 핑계로 주연과 조연의 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모습이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도촬하는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연예인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포차인 만큼 무단 촬영을 하거나 사인을 요구하는 순간 강제로 쫓겨나는 게 이곳의 룰이었다.

“문효진. 인사 안 할 거야?”

최수혁이 문효진 뒤에서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물었다.

위장에서 술과 뒤섞인 기분 나쁜 안주 냄새가 문효진의 불안한 호흡에 섞여들었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문효진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오셨어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문효진.

털썩.

동석한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문효진 옆 자리에 막무가내 착석하는 최수혁.

“여기 이분은 뭐지? 효진에게 선배면……. 이쪽 업계 후배? 그럼 나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위아래를 모르나?”

최수혁은 장태산을 비웃듯 힐끔 쳐다보며 시비를 털었다.

“업계 사람 아닙니다.”

문효진이 대신 대답을 했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닌데.”

최수혁은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장태산을 자극했다.

‘이 새끼 뭐야? 모델 쪽인가? 문효진 이게 얌전한 줄 알았더니 내숭이었어?’

상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최수혁은 기분이 별로였다.

드라마 촬영 당시부터 문효진을 눈독 들였다.

얼굴도 반반했지만 학벌도 한국대 출신이었다.

시간이 조그만 더 흐르면 연예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겠다 싶은 예감이 들었다.

그전에 수중에 넣으려 마음먹었던 최수혁.

몇 번 작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거나 타이밍을 놓쳤다.

얼마 전 있었던 쫑파티 때도 그랬다.

술을 제법 많이 마신 상태였던 문효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찾았지만 인사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몇 차례 연락을 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매번 거절당했다.

동료들 사이에 도도하다는 소문이 있어 더 안달이 났지만 꾹 참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을 들여 보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오늘 이렇게 마주쳤다.

그것도 자신보다 잘난 놈과 술잔을 기울이며 환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가는 문효진을 발견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마음이 담긴 눈길을 수시로 상대 남자에게 보이는 문효진.

얼큰하게 술이 오른 최수혁은 작정하고 시비를 걸었다.

“위아래라……. 어떤 위아래를 말하는지 궁금하군요.”

장태산이 웃는 얼굴로 최수혁의 말을 이어받았다.

‘하아, 이 새끼 봐라. 그래 너 잘 걸렸다.’

평소 방송이 없을 때면 자주 어울리던 질 안 좋은 친구들과 함께였다.

장태산의 대꾸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건 자명했다.

“나이도 어린 새끼가 귓구멍이 막혔네.”

“크크크. 이거 오늘 쌈빡한 사건 하나 터지겠는데.”

강남에서 잘나가는 부잣집 아들들로 구성된 최수혁의 친구들.

건수를 잡은 듯 흡족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침 심심하던 차에 핑계 좋게 장태산이 걸렸다.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놈이 미모의 여배우와 함께였다.

최수혁이 찜했다던 문효진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놈.

자신들 구역에 무단 침범한 용납할 수 없는 수컷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선배님……. 장태산 선배님은 이쪽 업계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문효진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당황하며 만류에 나섰다.

“그럼?”

“학교 선배님이세요.”

“한국대?”

“네.”

“그럼 잘됐네. 잘난 한국대생 만날 기회가 흔치 않으니 합석하지.”

최수혁이 능구렁이처럼 나왔다.

다른 테이블과 좀 떨어져 있어 시비 걸기도 적당했다.

“그럼 우리도 함께 앉아 놀아볼까?”

“안주가 이게 뭐야. 떡볶이에 순대곱창? 공부하는 새끼들 빈티 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효진 씨 우리 알죠? 저번에 같이 봤잖아.”

“…….”

문효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최수혁과 그 일당들이 싫었다.

그러나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우연히 동석해 짧게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작품 얘기로 미팅을 하는 자리라고 속이고 불러낸 바람에 그때도 자리를 피하지 못했다.

드라마 주연 경력을 갖고 있는 배우는 조연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어떡해……. 이 사람들 다 양아치인데.’

돈만 많은 강남 3류 인생들이 작정하고 장태산을 노렸다.

장태산이 변호사이긴 해도 저놈들이 그런 걸 무서워할 리도 없었다.

대충 봐도 주변에 잘나가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들이 넘쳤다.

고위 경찰들과도 안면이 있는 최수혁과 그의 친구들.

당장이라도 물어뜯으려는 이리떼처럼 장태산을 주변을 에워쌌다.

꿀꺽.

그럼에도 태연하게 잔을 비우는 장태산.

“누가 앉으라고 했습니까?”

차갑게 한마디 쏘아붙이는 장태산.

“내가 앉겠다는 왜 시비셔~.”

“오! 꼴에 남자라고 어깨에 힘 좀 주시겠다?”

자리에 앉으려던 양아치들이 미끼를 문 장태산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전형적인 그들만의 수법.

“다들 왜 그래. 나 엮이면 안 돼.”

“수혁아. 넌 빠져. 이건 우리 일이잖아.”

“와아. 저 새끼 쪼개고 있는 거 보여? 강냉이 안 털면 내가 오늘 성을 간다.”

“형씨. 조용히 따라오지. 효진 씨 앞에서 개처럼 얻어터지기 싫으면. 크크크.”

양아치들이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장태산을 자극했다.

보통 이 정도 기세로 몰아세우면 웬만한 남자들은 꼬리를 말게 마련.

장태산도 곧 그렇게 나오리라 생각했다.

한국대 출신들은 머리만 짱돌이지 주먹은 다 물렁했다.

하지만.

“콜.”

하지만 오늘 만난 한국대 놈은 반응이 달랐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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